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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는 암살 되었다?

작성자
이주익
작성일
2015-06-20 07:40
조회
2409
한반도의 근세사는 사면초가로 시작된다. 한반도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일찍부터 조선이 가진 부동항이 그들의 사활이었다면, 남쪽 섬나라 일본에게 조선 땅이야말로 그들의 사활이 걸린 대륙의 교두보였다. 소련(중국)과 일본이 남북에서 침공해 온 세력이었다면 남북 양대 세력에 동서로 침공해 온 것은 영국과 미국이다. 이 같은 침공의 역사는 조선 개항의 역사로 시작된다.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청진항을 접수한 영국과 산업혁명을 통해 일본의 요코하마를 접수한 미국은 각기 두 사람의 대리인을 통해 조선의 개항권을 접수하게 된다. 조선의 개항권을 거머쥐고 내한한 첫 번째 사람이 독일 국적의 뮐렌도르프이다. 그는 이홍장의 사람으로 조선에 왔지만 국적과는 상관없이 영국식 조세와 무역을 조선국왕으로부터 위임받아 전횡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의외로 중국식도 영국식도 아닌 자주적인 것이었다. 이 일로 그는 조선 국왕의 총애를 받은 최초의 외국인 신하였으나 타의에 의해 추방되었으며, 그가 추방된 그 자리에 들어선 사람이 미국 오하이오의 젊은 판사 O.N. 데니였다. 조선에 온 데니는 조선을 손아귀에 넣고 단숨에 요리하려고 했다. 조선에 머문 3년 여 간에 그는 기득권 세력인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세력을 영국과 미국, 독일 프랑스와 대등한 위치에 서도록 재편했으며, 이와 함께 조선의 국부를 이들 7개국이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도록 주선했다.

즉, 미국에게는 금광과 철도를, 독일엔 전신을, 전화는 프랑스에, 소련에겐 벌채권과 부동항을 내주게 된 것이다. 이 조치는 청국과 일본을 소외시킨 조치로 O.N. 데니는 중국의 조선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 원세개(遠世凱)에 의해 조선에서 추방당하게 되었으며,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의 국토 60%에 해당하는 미개간 국토의 개발권을 주는 것이다. 이 일은 청일, 러일 간의 한반도 국토 쟁탈전쟁을 야기하게 만들었다.

이 역사의 난마 속에 등장한 인물이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이다. 언더우드(알렌) 선교사가 한국의 평양 미션의 책임자였다면 아펜젤러(스크랜턴) 선교사는 서울 미션의 책임자였다. 아펜젤러는 요코하마에서 한국으로 오는 배 안에서 조선 최고 실력자 뮐렌도르프를 만났고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미국과 조선왕실의 은거지인 블라디보스톡으로 가 그가 보관했던 조선관련 중요 문서를 가지고 귀국했다.

또한 아펜젤러는 O.N. 데니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그와 막중지연을 유지했으며 청일전쟁 당시에는 양 진영을 다니며 각종정보를 입수하는 등 모종의 조정역할을 한 근거를 남기고 있다. 또한 아펜젤러는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귀임해 여러 곳을 방문했으며, 특히 오하이오로 가 O.N. 데니와 함께 그곳 마을군사학교 교관으로 있던 한국주재원 헐버트를 만나 그에게 한국으로 다시 와 한국의 미션을 크게 일으키자고 권유했다.

귀임 후 한국 미션의 최고 책임자가 된 아펜젤러는 그의 막료인 헐버트와 존스와 함께 독립협회 사건으로 구속된 애국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독립운동체로 YMCA를 재건하는 한편 이승만 등 핵심 주모자들을 미국으로 망명토록 하는 동시에 알렌 공사와 존스 선교사로 하여금 하와이와 멕시코 이민을 주선함으로써 미국에서 대한이라는 이름의 미국식 민주국가 건설을 도왔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미주 이민모집이 개시되고 있던 1902년 6월 11일 해난 사고로 순직했다. 이 해난 사고는 수영에 능한 그가 충분히 살 수 있음에도 그와 동행한 한 여학생과 두 사람의 조사를 구하려함으로 인한 ‘의인의 죽음’ 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뮐렌도르프와 O.N. 데니의 진영을 오가며 양국 주도의 한반도 정책에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아펜젤러의 돌연한 죽음은 예사롭지는 않다는 것이다.

경인철도 건널목에서 일본낭인의 행패가 있었고, 이 일이 그로 하여금 일본만 취항하고 있었던 여객선을 이용해 목포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고 그가 타고 있던 배가 비정기 화물선이었고, 그 배를 침몰시킨 대형 여객선은 같은 회사 선적의 여객선으로 사고 후 유유히 인천항으로 귀향했다는 점이다. 후일 화물선에 일본낭인(자객)이 함께 있었다고 말한다면 무슨 근거로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2015년 6월 20일
냉천동에서.



전체 7

  • 2015-06-25 22:12

    음~왜그랫을가?
    대담히 궁금해요.


  • 2015-06-26 12:40

    또 오타. 대단히.


  • 2015-06-27 12:03

    글 잘 읽고 감사합니다. 개인은 자립 능력을, 국가는 부국강병을 이루지 못하면 수치와 불행을 당하게 되지
    요.


  • 2015-06-20 07:48

    개연성을 근거로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한반도 근대사의 몇 대목을 살펴보았다.


  • 2015-06-20 08:04

    감리회 안에도
    반일목사, 친일목사
    반일선교사, 친일선교사
    ......
    당시 국제정세 속에 살아가는 게 대단히 어려웠겠지요?


  • 2015-06-20 18:09

    상당한 근거로 접근된 주장으로서 공감이 갑니다.
    또 다른 분노가 형성되네요
    밝혀야 할 과제
    우리감리교회는 선교사님들의 순교에 역행하는
    배은망덕의 시대에 몰입된 듯 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 2015-06-24 07:01

    안녕하세요.
    위 두 분 장로님의 값진 표현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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