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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을 개정하면 감리교단이 바로 되는가?.....

작성자
오재영
작성일
2015-08-12 13:35
조회
961
여러해 전부터 때만 되면 장정을 개정 한다는 거창한 명분으로 거액의 금전을 소비하면서 각 연회에서 추천된 위원들이 모여 교단의 문제를 해결할 것 같은 모습들이 이제는 연례 행사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출발의 다짐과는 달리 결과는 언제나 혹시나 했던 것들이 역시나 로 신앙의 기본 상식에도 맞지 않는 개정으로 인하여 오히려 본래의 내용보다도 복잡하게 하던 일들을 금년에도 그대로 이어갈것 같은 모습들이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문제의 본질은 각자의 위치에서 조용히 개교회를 섬기고있는 대다수의 목회자와 성도에게 있는것이 아니다. 오히려 혼란의 과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당사자들이 정작 본인들은 배제한 채 나열하는 단어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백가쟁명(百家爭鳴)으로 자신의 냉철한 반성이 없는 이들의 흔적은 모두가 교회의 주인 되시는 주님을 의식하지 않는, 오히려 주님을 만홀히 여기는 가엽고 딱한 모습들이다. 시대가 병들어 어지러울수록 문제가 많을수록 너나없이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며 바라기 마련인데, 오늘 우리의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이토록 혼돈의 아픔과 불안을 격고 있는 조국 앞에 분명한 미래의 청사진이 될 구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대충 마무리 되어진 개정된 장정의 내용을 보면서 이모습이 과연 오늘 이 시대에 내세를 말하는 구도자들의 집단에서 세상을 향하여 내놓을 수 있는 내용인가? 이것하자고, 그 자리에 자기이름을 올리기 위하여 그토록 귀 막고 집요하게 몽니를 부렸다는 것인가?... 하나같이 시세(時勢)를 모르는 육적 그리스도인의 가련한 모습들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교단의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 장정 때문은 아니다. 일부 사람들의 주장처럼 제비뽑기를 하지않아서 바른 지도자를 세우지 못하고 구성원 모두에게 총대의 권리를 주지않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것도 아니다.

종교학에서는 그 시대의 모든 종교를 통틀어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로 구분하는 기준점을 자기부인(自己否認)에 둔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부인 이란 자신이 믿고 추구하는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자신의 욕망이 부인되고 있다면, 그가 따르는 종교는 고등종교이지만, 그가 추구하는 신앙이 단지 자기욕망의 성취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그 종교가 과거에 아무리 긴 세월 찬란한 역사를 이어왔다 하여도 종교의 형태와 관계없이 그것은 한낱 사이비 무당과 차이 없는 하등종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피한방울 흘림없이 오직 은혜로 피 흘림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아 섬기며 지켜야할 우리 기독교대한 감리회의 실상은 어떠한가? 교단의 성직자라 할 수 있는 중책을 섬기기 위하여 그자리에 오르기까지 자행한 부끄러운 흔적들은 모두들 정리 하였는가? 직분에 따르는 주님의 엄위를 두려워하는 마음들은 가지고 있는가?
비록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어 내든 고등종교라 할지라도 위에 있는 사제가 자기부인을 생략하여 타락하면 세상의 이교도들보다도 더 추한 모습들임을 과거의 역사에서. 그리고 성서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제정러시아의 성직자들이 타락의 극치를 달릴 때 무신론의 공산주의 혁명으로 온 세계가 피로 물들은 형극의 70여년의 고난이 시작이 될 때 혁명전야까지 열렸던 종교회의에서 날밤 새우며 밤늦게 까지 다툰 논쟁의 주제가 무엇이었든가?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이땅에서 벌이고 있는 소모적인 논쟁과는 관계가 없는가? 모두가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고 있듯이 누가 그 자리에 오르느냐? 하는 다툼들, 도무지 남 잘되는 꼴은 두고 볼 수 없다는 듯이 세상이 무어라 비웃든 말든, 집요하게 허물기에 집착하는 이들, 남에 허물을 지적하기보다도 자신들이 구도자의 길에서 얼마나 벗어나있는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함, 등등 모두가 시급한 우리의 과제들이다. 부디 책임을 맡고 있는 이들은 주님의 존전 앞에서 위원들의 격에맞는 신앙의 삶과 경륜에 합당한 모습을 기대한다. 가벼움의 자세들을 버리고 분수에 벗어나는 욕심들을 거둬들이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주님 뜻 까지도 헤아리는 겸손을 기대한다. 이길 만이 그동안 위치 벗어나 남긴 부끄러움의 흔적을 씻어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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