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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난해 성구와 중요 성구 4회 (3:1-2)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6-03-08 10:28
조회
758
마 3: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
[그 때에]는 마태복음 2장과 관련되는 시기가 아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난(눅 1:35-36) 예수님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선교 활동을 언급한 점과 예수님이 삼십 세쯤에 가르치시기 시작한 점(눅 3:23)을 미루어 마태복음 2장 마지막 부분과 마태복음 3장 시작 부분 사이에는 20여 년의 간격이 있다.
[세례 ‘요한’](Ἰωάννης: ‘주께서는 너그러우시다’라는 뜻)은 제사장인 사가랴(눅 1:8)와 아론의 자손이며(눅 1:5)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친족인(눅 1:36) 엘리사벳 사이에서 출생하여 유대에서 살았고, 광야에서 놀라운 활약을 하였다. 나중에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투옥되어 죽임을 당했다(막 6:17-28).
세례 요한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그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적이 있으신(마 3:13-15) 예수님의 평가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11).
[유대 광야], 즉 요한이 {주로 활동했다고 하는 광야(막 1:4)는 “요단강의 양쪽에 퍼져 있는 광야를 가리킨다”(黑崎幸吉). “광야는 정말로 황량한 곳이며, 자갈과 깨진 돌과 바위로 덮여 있는 불모의 백악질 흙으로 된 거대한 기복 지역이다. 여기 저기에 덤불 조각과 땅바닥을 기는 뱀이 나타난다.······마지막 분석은 모든 악에 기울어진 인간의 마음이다”(W. Hendriksen).
이런 광야에도 더러 사람이 살았고, 심지어 마을이 형성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인적이 아주 드물었다(삼상 25:1, 2). 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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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 시대에는 이런 광야에도 여섯 개의 성읍이 있었다(수 15:61-62).
“광야는 또한 쿰란 종파의 거처였다. 아마도 세례 요한은 그들과 접촉했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그들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그의 금욕적 생활과 엄격한 훈련은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렇지만, 그의 세례 의식이나 윤리적 행위와 종말론적 심판에 대한 강조는 그들에게서 비롯된 것 같지 않다”(W. W. Wessel).}①
{플루머(A. Plummer)는 “요한이 그들과 접촉했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하였다. 또, 그는 금욕 생활과 진부한 유대교보다 더 나은 어떤 것에 대한 열망말고는, 요한의 원리와 그들의 원리 사이에 비슷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 그는 양자 사이의 차이에 대해, 요한은 하나님 나라를 설교했고, 그들은 분리를 설교했다고 하였다. 또, 그는 그들은 사회를 버렸고, 요한은 사회를 개혁하려고 힘썼다고 하였다.}②
[전파하여]는 케뤼스손(κηρύσσων)으로서 {임금, 군주, 행정 장관, 총독, 군대 장관 등의 공식 통신문을 배달하거나, 공공 소환장이나 공적 요구서를 전달하거나, 기타 여러 가지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뜻하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선포하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을 뜻한다(딤후 1:11, 벧후 2:5). 특히, 이 말은 바울 서신에 자주 나오는데(롬 10:8, 고전 1:23, 고후 4:5, 빌 1:15), “언제나 엄격하고 공적이며 권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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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필자의 막 1:4의 주석.
2) 필자의 눅 1:80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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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선포의 개념을 지니는 것이다”(F. D. Gealy).}③
이 일을 위해 임명된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나 다른 사람들의 사상을 말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것만을 받아 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의 거짓 예언자들에게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 있을진저”(겔 13:3)라고 힐책하였다.
세례 요한의 선교 활동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알고 믿게 하는 것이었다.

마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회개하라]는 메타노에이테(μετανοείτε)이며 ‘정서뿐만 아니라 마음과 의지를 전환하다’를 뜻한다. 회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종교적‧지적‧도덕적 면에서 완전히 전환하는 것이다. 회개란 근본적인 생의 변화를 초래하는 근본적인 관점의 변화이다(고후 7:9, 딤후 2:25).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을 떠난 지정의를 포함한 모든 생활에서 유대인의 왕 메시아를 영접할 준비를 위해 돌아서라는 것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선포의 직접적인 대상이 바로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유대인들이라는 점이다.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의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ών οὐρανών)은 본서의 독특한 용어이며,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하늘 나라’, ‘주의 나라’ 등과 같은 말이다.
[천국] 곧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예수님의 교훈의 기본 주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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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자의 딤전 2:7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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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W. W. Wessel, H. E. Luccock). 비록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구약성경이나 외경에 나타나지 않으나, 그 사상은 양쪽에 풍부하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출 15:18),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10),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 43:15),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사 52:7),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3)와 같은 진술로 가득 차 있다.
그런 문장들은 주님의 왕권이 현재적 실재(하나님은 지금 자기 권한을 행사하신다)와 미래의 소망(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통치하실 것인데, 그 때에 그분은 자신의 통치를 거역한 모든 것을 진압하실 것이다) 둘 다임을 드러내 준다(W. W. Wessel).
현재(마 12:28, 눅 11:20, 17:21)와 미래(마 13:41-43, 20:21, 막 9:1, 47, 14:25, 눅 22:16, 18, 요 14:2, 18:36, 고전 15:50, 고후 5:1, 갈 5:21)로서의 하나님 나라 사이의 긴장은 예수님의 교훈 속에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 성격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었다. 즉, 유대교 개념처럼 육적이며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영원한 나라이었다(E. Schweizer). 하나님 나라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이다.④ 이 통치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이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이며, 이 실제적 구현이 예수님의 인격과 교훈과 생애이다. 따라서, 바울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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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 E. G. Swift, “Bruce, Metzger”(in W. W. Wessel), W. W. Wessel, W. Hendriksen, C. R. Erdman, D. W. Burdick, R. McL. Wilso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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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하였다. 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움직여져야 한다.}⑤
[가까웠느니라]는 완료형인 엥기켄(ἤγγικεν)이며,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 말이다. 그 낱말은 ‘가까이 다가오다’, ‘당도하다’, ‘미치다’, ‘이르다’(욘 3:6) 등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완료형인 엥기켄(ἤγγικεν)이 임박한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 도달한 것을 의미하는지의 여부를 규명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출현이 바로 마지막 때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의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점을 보아 후자를 취해야 한다.
이 사상은 마가와 같다. {“그 때에는 마르코에게도 우주적 사건이 된다. 그 통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가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느님의 왕국으로 확장된다. 현재 돌입해 오고, 완전한 하느님의 왕국(Gottesreich)에로 치닫고 있는 하느님의 통치는 결단을 요구한다. 이 결단은 돌이킴(Umkehr)과 믿음을 포함한다”(J. Gnilka, p. 81).}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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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필자의 막 1:15의 주석.
6) 필자의 막 1:15의 주석.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년), pp. 115-118.

필자의 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4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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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08 22:02

    등록하고 나서 검토하느라 읽어 보니 이 성경 말씀이 각종 종교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 특히 필자를 비롯한 우리 감리교회에 절실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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