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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방(向方)없이 달리는 사람들.....

작성자
오재영
작성일
2016-03-15 20:54
조회
1569
아침 Q.T시간,
묵상 에세이 란에 응암교회 이기철 목사님의 ‘빵집에 오신예수’의 내용에 한국전쟁 중 에버렛 스완슨 목사가 주님으로부터 들은 음성,
“너는 어떻게 살아야하겠느냐?” 그때부터 시작된 사역 ‘컴 패션’에 관한 이야기가 오랫동안 마음을 무겁게 했다.

미국 시카고에서 사역하던 그가 전쟁 중인 1952년 미군들을 위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한국을 방문하고 집회를 마친 후
종로부근의 한 숙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 유리창 너머로 눈 쌓인 종로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청소차에 던져 넣는 쓰레기더미 가운데 어린아이의 손이 쓸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뛰어나왔다.
손짓 발짓해가며 어린 아이의 손을 보았다고 했지만 청소부들이 알아듣지를 못한다.

그는 직접 청소차위에 뛰어올라갔다.
청소차위에 올라간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자세히 보니 거기에 가득 실린 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지난밤 추운날씨로 인하여 종로바닥에서 얼어 죽은 전쟁고아들의 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지난밤 그 아이들과 불과 10여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편히 잘 잤는데, 만약 웅크리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자신이 묵고 있던 방에 모았더라면 살릴 수 가 있었는데 자신은 혼자 그곳을 차지하고 누워 편히 잠을 잤던 것이다.

너무나 가슴이 아파 울고 있는 그에게 주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에버렛! 너는 보았느냐? 이제 너는 어떻게 살아야하겠느냐?” 그때부터 시작된 사역이 ‘컴 패션’이었다.
주님의 음성 앞에 정직하게 응답했던 한사람을 통해 수십만의 전쟁고아들이 그때부터 오늘까지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주님 앞에서 오직 은혜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 소명자(召命者)요 구도자(求道者)들인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지금 그리스도의 성직자(聖職者)라고 하는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주님께 부르짖고 있는가? 그리고 언제쯤이면 자신의 행동들이 부끄러운 것을 깨닫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겸손의 모습들을 볼 수가 있을까?

별 희한한 이들이 다 있다.
분쟁이 있는 곳마다 등장하는 이들, 자신이 맡았던 감리사의 임기를 마쳤음에도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궤변과 요설을 늘어놓으며 섬기지 않는이. 감독의 임기를 지냈음에도 이제는 회장까지도 한번 올라보겠다고 하는 이, 모두가 거룩한 성직을 섬김보다는 무슨 입신양명(立身揚名)이나 신분상승(身分上昇)의 기회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나같이 명예와 허상에 걸신들린,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면서도 치유 받지 못한 열등감을 채우려고 애쓰는 이들의 가련한 모습들이다.

한마디로 위에 거론된 직분은 아무나 무슨 교회가 크다거나 패거리 동원하여 세를 불려 쟁취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감당하여야할 성직이며 위임받은 소명이다.
어디 성직(聖職)에 고위직과 하위직이 있겠는가? 각자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을 보라.
하루에도 삶에 희망을 잃고 절망한 이들 중에 1천여 명이 자살을 시도하여 40여명이 생을 달리한다는 통계가 있다.
그중에는 목사와 그의 아내 되는 사모와 전도사들도 섞여있다는 소식이다.

소명으로 알고, 기대와 꿈, 쉬운 길을 포기하고 좁은 길을 선택했음에도 사역의 어려움 때문에 고민하는 대부분의 선후배 동역자들,
그러함에도 여전히 형제를 공박하며, 정죄하며, 자신의 뜻에 반하면 소송장 들고 “동분서주” 분주한가?
명색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들이 관계된 “감게”나 당당뉴스의 게시판에 등장하는 일부 인사들의 흐트러진 모습들을 보노라면
한심하다 못해 너무나 가련하고 불쌍하다. 하나같이 정신 줄을 놓은 이들의 모습이다.

한때는 속세를 버리고 구도정진 하겠다고 머리 민이들 중에 구도와는 상관없이 거느리고 있는 처자식 먹여 살리겠다고 각목 들고 설쳐대는 땡 중들 때문에 온 불자들을 부끄럽게 하더니, 이제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 따르겠다고 맹세한 이들이 어느 순간 지고 있어야할 십자가는 보이지를 않고 성경을 들고 있어야할 손에 소송장이나 들고, 남에 발 걸어 넘어뜨리는 이들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이와 같이 자기성찰에 눈감은 모리배의 위치에서 형통한 삶을 보리라 기대하는가?

홍수 때마다 육지의 온갖 불순물이 바다를 향하여도 아직까지 생명력과 푸른빛을 유지하는 것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자정능력, 2.8~3%의 염분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를 잃어버리고 소명에 눈감고 사명을 등한시 하여 은혜를 망각한 이들마다 대가를 지불하였다.
당연히, 그리고 묵묵히 가야할 방향을 잃어버린 오늘의 가련한 우리들, 너나 할 것 없이 신속히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는 것만이 자신이사는 길이며 긍휼을 입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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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3-16 10:48

    오재영 목사님, 글 잘 읽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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