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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계신 '말씀'(호 로고스, ὁ λόγος)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6-03-15 09:55
조회
912
1. 시작하는 말

사과는 빨갛고 맛있는 것이라고 하는 유치원 아이의 지식도 있고, 사과의 다양한 색과 껍질과 속과 씨, 그리고 각종 사과에 각각 함유된 각종 영양소 등을 아는 전문가의 지식도 있습니다.
목사나 신학자나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도 다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깊이와 넓이도 각기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통 인간으로 아는 이들도 있고, 본받을 도덕적 인물로 아는 이들도 있고, 죽은 예언자가 환생한 예언자로 아는 이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화 있을진저”와 같은 표현들을 들어 보통 인간도 못 된다고 한 무신론 대학자도 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로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영원한 천국에 가기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생각하며 판단하고, 믿음으로 행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보다 깊고 보다 폭넓게 알지 않으면 안 됩니다.

2.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장엄한 선언을 했습니다.
“태초”의 헬라어 아르케(ἀρχῇ)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기원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처음’을 뜻한다. 즉, 무엇인가가 발생하는 근원이고,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을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주석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의 원문은 그리스도가 ‘태초에 태어나셨다’(ἐν ἀρχῇ ἐγένετο)는 뜻이 아니라 ‘태초에 존재해 오셨다’(ἐν ἀρχῇ ἦν)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성육하여 오신 예수님 안에서, 세계와 시간 너머에 존재하시며 창조의 기원이 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참으로 영광스럽고 신비한 만남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의 헬라어 로고스(λόγος)는 원래 우주를 지배하는 이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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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내기 위해 스토아 철학에서 즐겨 쓰는 말입니다. 또, 지성 또는 이성과 말씀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레트C. K. Barrett)는 “그 말 자체는 범신론적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보다 초기의 스토아 학파는 로고스 외에 다른 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로고스는 합리적 원칙으로서 그에 따라 우주가 존재했으며, 다양한 정도로 ‘종자 로고스’(σπερματικοὶ λόγοι)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러한 합리적 원칙에 따라 자신들의 삶을 형성해야 했다.”라고 주석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영원부터 존재하시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죄와 불신앙으로 멸망당할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고, 그의 영이신 성령으로 인해 구세주로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이 내주하신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할 것을 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인 로고스를 사용한 것입니다.
태초부터 존재해 온 로고스인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이 로고스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표현은 삼위일체의 교리인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5을 보면,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계와 시간 너머 영원부터 존재해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와 불신앙으로 멸망당해 마땅한 우리를 귀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영생을 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성결한 삶을 사는 값진 존재로 변했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소개한 것입니다.
한 미국인 의사가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서 의료 봉사를 하다가, 외국에서 축산 기술을 배우고 온 청년을 알게 됐습니다. 그 마을에는 남자가 청혼할 때,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암소를 받고 딸을 주십시오.”라고 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특등 신붓감은 암소 세 마리, 괜찮은 신붓감은 두 마리, 보통 신붓감은 한 마리로 승낙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의사는 그 청년이 술렁거리는 청년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청혼 선물로 암소를 아홉 마리나 몰고 가는 걸 보았습니다. 청년은 마을 촌장집도, 지역 유지인 바나나 농장 주인집도, 여선생네 집도 그냥 지나치더니 허름한 집 앞에 멈춰 그 집 노인에게 딸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노인의 딸은 키에 비해 너무 마르고 심약해 보이는 초라한 처녀였습니다. 청혼 상대가 암소 한 마리의 가치밖에 안 되는 것을 안 사람들은 더 놀랐습니다.
그 후, 미국인 의사는 의료 봉사를 마치고 귀국했고, 오랜 세월이 지나 휴가차 그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큰 사업가가 된 그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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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나 저녁식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의사가 식사를 하면서 그에게 청혼 선물로는 과도하게 암소 아홉 마리를 건넨 이유를 물었으나 빙긋 웃을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찻잔을 들고 아름답고 우아한 흑인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유창한 영어는 물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속으로 ‘아! 이 사람이 그때의 바싹 마른 처녀와 결혼한 뒤에 또 다른 아내를 맞았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사업가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이 그때 청혼한 처녀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저 사람을 사랑하며 결혼을 꿈꿔 왔습니다. 사실 제 아내는 청혼 선물로 암소 한 마리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 사랑한 여인이 스스로 자기 가치를 암소 한 마리 값에 한정하고 평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청혼 때 암소를 몇 마리 받았느냐가 평생토록 자기 가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세 마리보다 훨씬 많은 아홉 마리를 생각해낸 것입니다.
결혼하고 아내에게 공부를 하라거나, 외모를 꾸미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아내를 사랑했고, 사랑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처음엔 무척 놀라던 아내가 암소 아홉 마리에 걸맞은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아내를 똑같이 사랑하지만, 아내는 결혼할 당시의 모습보다 지금의 모습을 더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집에는 암소가 없어서 못 가나 싶습니다.
우리는 그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받은 사람에 걸맞은 감사와 보은, 기도와 말씀 순종의 사람이 되어 있습니까? 혹시나 걸맞지 않은 모습은 아닙니까?
죄와 불신앙으로 멸망당해 마땅한 우리 인류를 사랑하여 구원하시려고, 성육하여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다 깊이 보다 폭넓게 알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인류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다 로고스를 통하여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로고스 곧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대행자이시며 중보자이셨습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습니다.
또, 요한 사도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헬라어 조에(ζωὴ)는 ‘생애’를 뜻하는 비오스(βίος)와 다르고, 죽음과 멸망의 반대인 신적 생명인 영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조에는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덕으로부터 비롯되는 생명’(βίος κατ’ ἀρετήν)이나,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신비적 실체로서의 불멸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구원받은 우리가 분여받아 누리는 영원한 신적 생명입니다. 스트와트(J. S. Stewart)는 “바울의 구원과 관련되는 모든 것인 기쁨과 평화, 능력과 성장, 도덕적 승리 등은 생명이란 말에 포함된다.”라고 주석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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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 생명 이후의 영역에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누리는 생명은 영원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그리스도인이란 이 생명으로 사는바 성령으로 말미암은 영적 지각과 영적 지식, 영적 판단과 영적 갈망, 영적 기쁨과 영적 능력 등을 소유한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을 순종하는 영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요한 사도는 로고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가리켜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원시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빛이셨고, 믿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은 종말론적인 빛에 들어가 그 안에 거하는 사람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그들의 과거는 ‘어둠’으로, 그들의 세례는 ‘빛을 주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이시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은 이성은 영생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비춰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맺음말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 너머 영원부터 존재해 오신 성자 하나님이시고, 창조의 중보자이시고, 죄와 불신앙으로 멸망당할 인간을 구원하여 영생을 누리게 하시려고 성육하여 오신 영생의 주이십니다. 그의 영원한 생명은 사람들에게 비취는 빛입니다.
우리는 그 상상을 초월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을 받은 사람에 걸맞은 감사와 보은, 기도와 말씀 순종의 사람으로 변했습니까? 혹시나 걸맞지 않은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 모두 주 예수님의 영생의 빛을 받아 거듭난 사람으로서 세상에 영생의 빛을 반사하는 빛이 되시기 바랍니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2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전체 4

  • 2016-03-15 09:56

    (설교의 성경 본문 : 요한복음 1:1-5)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 2016-03-15 10:06

    아멘.
    다른 말하지 않음.


  • 2016-03-15 11:44

    필자의 설교에 \"아멘\"으로 화답해서 감사합니다.


  • 2016-03-16 10:56

    각종 종교인들을 비롯한 세상 사람들은 영원부터 선재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의 빛이 비취되 깨닫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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