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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척도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6-11-26 12:17
조회
1140
창세기 17:1-8, 히브리서 11:1-10.


오늘은 본문의 말씀들을 통하여 “신앙의 척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척도라는 말은 국어사전에서 어떤 사물을 재는 ‘자’ 혹은 ‘계획의 표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기준을 재는 측량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겉으로 나타나는 그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배추의 속도 못보고, 양파의 속도 못보는 우리의 눈으로는 그들의 신앙상태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외모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의 척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인가요?
예배시간에 빠짐없이 출석하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인가요?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에게 인사 잘하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가요?
교회의 잡다한 일들을 많이 하는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인가요?
예! 물론 그런 분들이 신앙이 좋은 이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만으로는 부족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신앙을 재어 볼 수 있을까요?

1. 11조가 믿음의 척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물질의 사용법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을 어떻게 어디에 쓰느냐? 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심성과 인격과 믿음이 나타나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도소에 두 사람의 사형수들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그들에게 이왕에 죽을 것이니 신체의 부위들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당신들의 지체 부위를 이식하여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쾌히 승낙하고 자신들의 신체부위를 팔 것을 승낙하고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은 그 돈을 자선단체에다 기탁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나쁜 일만하고 선한 일 한번 해보지 못한 악한 사람인데 마지막으로 선한데 쓰이기를 바랍니다.”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자기의 신체를 판돈으로, 이왕에 죽을 인생인데 실컷 먹고 싶은 것들이나 먹어나보자 하고, 통닭과 삼겹살과 갈비들을 사서 날마다 뜯어먹었습니다.
그는 며칠을 그렇게 실컷 뜯어먹는 동안에 그의 온 얼굴에는 개기름이 번지르르하니 흐르고 윤기가 났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는 교도관들은 혀를 껄껄 차며 “아! 자기 살을 뜯어 먹는 잔인한 사람”이라고 불쌍하게 쳐다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를 지나서 자신의 신체부위를 판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한 사람은 특사로 풀려났는데, 날마다 고기를 뜯어먹으며 포식한사람은 사형을 받았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포식한 사람은 결국 자신의 생명을 포식하고 뜯어 먹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지금 그 사람만 그렇게 산다고 보십니까?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지를 아니합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들이 모두 우리의 것이었습니까?
우리가 창조하고, 우리가 만들고, 우리가 생성시켰습니까?
그런 것들이 아니라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그렇다고하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다 잠시잠깐 맡은 것들이며 빌려서 사용하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빌려서 사용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사용료들을 우리는 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도 여러분!
만물의 주인이시오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용료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사용료를 청구하시지 않았고 대금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우리에게 수입에 대한 감사를 알고, 11조로 하나님께 감사를 하라는 계명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조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들의 도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14: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11조에 관한 말씀이 22절에서나 나오고, 28번이나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3번이나 언급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11조는 구약의 것이고, 신약에서는 해당하지 않는 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11조에 대한 언급을 하셨을까요?
그러므로 신앙이 있는 성도라고하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라야 할 것이고, 지켜야만 하지를 않겠습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런데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를 참 신앙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2:37).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11조도 못하는 신앙은 거짓말입니다.
11조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온도를 재는 척도는 온도계이듯이, 신앙의 척도를 재는 것은, 11조로 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조도 못하는 사람을, 집사나 권사나 장로로 세운다면, 그 교회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중직을 맡으면 결국은 교회의 말썽이나 일으키고 헛된 주장이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멀리서부터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찾아가서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기 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할지라도, 11조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교회의 살림을 맡길 수 있으며, 교회 중직을 맡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또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11조를 하는 믿음이 참 믿음이요, 참 신앙인 것입니다.

2. 봉사는 헌신의 척도입니다.
봉사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는 ‘남을 받들어 섬기고, 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헌신이라는 말은 ‘몸을 바쳐 있는 힘을 다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있는 ‘힘을 다해 남을 받들어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곧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주위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고 헌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복음의 사역에는 이렇게 말없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봉사하는 이들의 헌신으로 큰일들을 감당하였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5병2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어떤 이름 없는 어린아이가 자기가 먹으려던 식사를 제공하여 기적을 낳게 하였습니다.
세리 장 삭캐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대접하였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하여 자기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어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 어떤 사람은 자기의 나귀새끼를 예수님께 제공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깔아드리고 종려 수 잎을 꺾어서 길에 깔아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에,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새 무덤을 제공하여 드렸습니다.
이렇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성도들은 손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요한일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열왕기상 17:13-17, 사렙다의 과부는 주의 종 엘리야를 위하여 자기와 아들이 함께 먹을 양식으로 대접하였더니, 3년 6개월의 가뭄이 지나기까지 먹고 입고 마시는 일에 염려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요한복음 11:11-43,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들은,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며 봉사하였을 때, 오라비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묻혔을 찌라도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3일 동안, 유대인의 총독 빌라도와 헤롯왕에게 심문과 조롱을 받으시고, 온몸에 매를 맞으시고 지치고 피곤한 몸으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올라가실 때, 쓰러지고 넘어지며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골고다까지 옮겨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감당한 시몬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후에 교회사에 나타난 시몬은,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그의 자녀들도 모두 믿음의 가족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1, 안디옥교회의 니게르라는 시므온이 나오는데, 시므온은 시몬과 같은 이름이고, 니게르는 아프리카 흑인의 별명인 점을 보아서, 로마서 16:13,에 나오는 시몬과 동일 한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고 한 것은 바로, 구레네 시몬의 아내라고 합니다.
그의 신분을 마가복음 15:21,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라고 말합니다.
그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 시몬은, 이후 어떤 초대교회의 감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잠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골고다까지 올라간 이후로 그의 이름이 영원히 빛나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생명의 책, 성경에 까지 기록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봉사는 고사하고 거역하고 패역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구스여인을 첩으로 삼았을 때,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비난하자, 하나님은 미리암을 쳐서 문둥병이 들게 하여 평생을 진 밖에서 장막을 치고 외롭게 살게 하였습니다.

민수기 16장에 나오는 고라와 그의 동조자들은 주의 종 모세를 거역하고 비난하다가 저주를 받아서 땅이 갈라짐으로 산채로 음부로 떨어져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보면 부자 나발은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종 다윗을 무시하고 없인 여기다가 저주를 받아 죽었고 그의 재산과 예쁜 아내는 다윗의 첩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헤롯왕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칼 든 군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어 2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였으나 예수님은 해치지 못하였고, 자신은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총독 빌라도는 불법 재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내어주었으나, 그는 총독 자리에서 즉시 쫓겨났고, 저주를 받아 죽었다고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주님의 일에 봉사하고 헌신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순교는 영생의 척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하다가 매를 맞고 감옥에도 갇혔으며, 죽기까지 충성을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충성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시절에 베드로가 받은 죽음을 순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리 순교를 원하여도 순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순교를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까?

어떤 목사님은 자신이 병들어 죽거나,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거나,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여 죽기보다는 순교를 하게 해 달라고 평생을 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데, 어떤 정신병자가 칼을 들고 올라가 설교하시는 목사님을 찔러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성도들은, “우리교회 목사님은 기도하시던 대로 순교하셨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의 어떤 죽음보다도 순교의 죽음은 가장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깨끗하고 값진 죽음입니다.
성스러운 죽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순교를 할 수가 없는 것일까요?
핍박이 있는 시대도 아니고 환란이나 곤고가 있는 시대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순교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참으로 원한다면 오늘 날에도 순교는 가능합니다.
꼭 초대교회 시대에 있었던 네로황제를 비롯한 박해자들의 무자비한 순교의 박해가 아닐지라도, 종교의 자유가 주어져있고, 신앙의 보장이 되어있는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순교적인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순교입니까?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부정하며 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성도들을 위하여 사는 삶의 사람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사는 삶의 사람입니다.
남을 위하여 사는 삶의 사람입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 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도 중요 하지만 잘 죽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지혜 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서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가 중요 합니다.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수백 년, 수천 년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지만 그러나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사람은 누구나 다 반듯이 죽습니다.
다만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죽느냐? 가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믿음을 지키다가 죽어 갔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신앙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희생한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순교자들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시리아사람 시므온은 423년부터 안디옥에서 동족으로, 16리 떨어진 곳에 6m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서 지내다가, 나중에는 18m의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위에서 설교하며 지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후에 그를 사람들은 주상성자라고 불렀습니다.
남들은 그를 이해할 수없는 사람으로 생각했을는지 모르지만, 시므온은 남이 알지 못하는 천국을 그의 가슴에 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소유욕을 버리고 몸에 걸친 누더기로 만족하며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를 헛되게 살았다고 말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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