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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회가 한국교회를 살린다.

작성자
유은식
작성일
2016-12-16 09:33
조회
1933
한국감리교회 회생의 근원은 사경회!

오늘 날의 사경회는 왜 주춤 하고 있는가?

한국감리교회에 있어서 사경회는 교회의 근원이었다. 먼저 사경회는 한국감리교회 초기 선교사들의 생활이었다. 새해가 되면 신년마지 사경회를 했고 선교지에서 활동을 하다 잠시 휴가를 얻었다면 동료들끼리 모여 사경회를 가졌고 큰 모임 앞에서 그들은 모여 사경회를 가졌다. 즉 영적 고갈을 예방했으며 고갈된 영적 능력을 채우는 일로 사경회는 필수였다. 자신의 선교현장에서 늘 도전을 받으며 또 감당할 사명을 위해 사경회를 통해 극복해 나갔다. 이런 의식 속에 1903년에 가졌던 하디의 영적 갈등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성령의 도우심에서 사역에 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하려 했음을 고백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교인들에게 까지 고백하여 조선인들의 회개와 고백으로 이어져 원산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 일이 있은 후 4년을 뛰어 넘어 사경회를 통해 길선주가 회중 앞에서 자신의 비윤리적인 생활을 참회하며 고백함이 모인 2천명을 마루바닥에서 구르며 고백하는 평양대부흥운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또 사경회를 통해 100만인 구령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1903년부터 일어난 원산대부흥운동이나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이 민족대부흥운동으로 전국으로 펼쳐진 집회는 사경회를 통해 일어난 운동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회중들의 고백은 선교사와 조선인 지도자들의 고백이 원동력이 되었고 이 고백은 전국 어디서나 모이는 사경회 장소를 찾아 나섰다. 당시의 사경회는 2주간 계속 이어졌다. 여기에 참석한 이들은 스스로 숙식을 해결하며 전국에서 모인 사경회였다. 동원해서 모인 것이 아니다. 각 교회마다 단체로 등록하고 숙소정하고 모인 그런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해결하며 각각 모인 집회였다.

결국 오늘의 한국교회는 사경회를 통해 세워졌으며 또 지금 까지 존재하게 된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왜 오늘의 사경회는 이런 모습의 사경회가 되지 못하고 사경을 헤메고 있을까?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으나 당시의 사경회와 지금의 사경회가 다른 것은 무엇인가?

1. 사경회 준비의 차이다.
당시의 선교사는 사경회를 통해 사경회에 성령의 임하심을 위한 영적 준비를 했으나 지금의 사경회 준비는 사경회 운영의 관리를 준비하고 있다.

2. 당시의 사경회 강사는 사경회를 통해 기도하며 묵상하며 사경회를 준비하기 위한 사경회를 갖는 영적인 준비를 했지만 오늘의 강사는 지식으로 준비하고 있다.

3. 사경회에 참석하는 이들은 말씀 사모함에 어디든지 거리들 마다하고 참석했지만 오늘의 사경회에 참석은 바빠서 못하고 관심 없어 코앞에서 갖는 사경회에도 참석안하는 현실이 오늘의 시대적 환경이다. 그래서 억지로 동원에 힘쓰고 있으며 여기에 장로들은 특권의식을 갖고 참석을 안 하고 있다. 이것은 필자만의 생각인가?

이것이 사경회의 과거와 오늘의 차이라고 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사경회가 바로설 수 있으며 사경회를 통해 감리교회가 존재해 갈 수 있을까? 마침 감리회 본부 교육국에서 사경회 회복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평소 사경회에 관심을 갖고 또 지방 교육부 총무로서 시행했던 분야로서 교육국이 시행하는 사경회 중점 사역에 기대해 보며 평소 느끼고 생각해 왔던 사경회에 대한 정리를 소개한다.



사경회가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회복한다!

고난, 희망, 구원, 섬김
(조선 초기 사경회에 대한 역사적 배경)

복음의 씨앗이 우리나라에 심겨지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거두기까지 많은 신앙의 사건들과 신앙의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바로 사경회이다. 1903-1910에 있었던 민족 대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경회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방식으로 성경말씀을 읽고 해석해 가면서 공부했던 성경공부 반이었다. 초기 사경회를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한 번 쯤은 고민하고 한 번 쯤은 질문을 제기해야만 했던 많은 다양한 문제들을 사경회시간을 통해서 함께 토론하고 질문하고 또 답을 찾아가면서 그들의 삶의 자리의 문제들과 그들의 신앙문제를 하나로 만들어 갈 수 있었다.

조선선교 초기의 사경회는 성경공부는 물론 신학교육과 부흥회였다. 사경회로 시작된 1903년의 하디에서 1907년의 길선주에게로 이어진 고백의 열기와 부흥의 열기 그리고 1909년의 100만인 구령운동으로 나타난 전도의 열기는 사경회의 꽃이었다. 이렇게 1903년부터 1910년까지 나타난 민족 대 부흥운동은 어떻게 조선교회에서 아니 조선역사에서 이뤄질 수 있었을까? 새 인천지방 2015 사경회에서 이 과정과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계획을 했고 진행해 보고자 한다.

I. 고난의 종교(1866-1884) / 토마스의 조선선교관심과 조선의 수난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조선에 들어 와 선교를 할 수 있었던 것에는 조선역사의 배경이 있었다. 그것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공식선교사로 입국할 수 있었던 것은 고종의 의료와 교육선교에 대한 윤허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윤허는 매클레이 선교사의 조선방문과 요청에서 였으며 그의 조선방문은 가우쳐목사의 요청에서 였고 가우쳐목사의 요청은 보빙사절단 특히 박영식의 요청에서 였고 보빙사의 미국방문은 조미수호조약으로 인해 이뤄졌으며 조미수호조약은 신미양요에서 비롯되었고 신미양요는 제너러셔먼호 사건에 대한 미국의 보상요구에서 일어난 것이며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조선선교에 불살랐던 토마스와 무관하지 않음을 본다.
결국 조선선교에 관심을 가진 토마스의 조선선교열정이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편승이 되었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1971년 신미양요를 신미양요는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조미수호조약은 보빙사절단이 1883년 9월 미국을 방문케 하였다. 집권초기부터 지속적으로 조선의 혼란을 겪은 고종은 보빙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면서 미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아 오라고 특명을 내렸고 보빙사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우쳐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가우쳐목사를 만난 보빙사의 박영식은 고종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고종 : 그 나라를 처음 가 보았는데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면 무엇이냐?
홍영식 : 언어가 불통하고 문자가 같지 않아 잘 파악하고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무엇보다도 기기의 제조 및 차, 전보 등이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고종 : 우리가 미국에서 장점을 취할 것은 무엇이냐?
홍영식 : 특히 우리가 가장 중요시 할 것은 교육에 관한 일인데 만약 미국의 교육방법을 본 받아 인재를 양성해서 백방으로 대응한다면 아마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므로 반드시 미국교육제도의 법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 보고를 들은 고종은 조선의 변화를 위해 많은 생각과 대화를 나눴다.

보빙사가 만난 가우쳐가 미 선교부에 조선선교를 요청함과 더불어 매클레이에게 조선선교답사를 요청 했고 이에 1884년 6월 24일 매클레이가 조선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고종은 조선을 변화시키기 위해 무언가 돌파구를 찾던 때에 보빙사의 보고와 매클레이의 요청이 맞물려 선교윤허를 한 것이다. 이로 인해 1885년 4월 아펜젤러 언더우드가 같은 날 한 배를 타고 제물포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보빙사의 보고에 따라 고종은 1884년에 우정국설치와 왕실목장에 근대 농업 시험장을 1885년 배재학당을 1887년에 전기도입을 하였다. 이렇게 보빙사의 미국 방문으로 얻은 결과물로 조선의 변화를 고종은 추진하였다. 결국 12세로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경험한 조선의 혼란 즉 병인박해와 병인양요 제너럴셔먼호사건 부친인 대원군의 청나라 피납 운양호사건과 조일수호조약 신미양요와 조미수호조약 들 국왕으로서 겪지 말아야 할 국가의 수치를 겪어야만 했던 고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선교윤허를 한 것이다.

이렇게 1866년부터 1885년까지
조선의 19세기 말에 있던 여러 정치적 혼란 속에서
기독교 복음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아우러져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린
과정 속에서 함께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복음은 조선에 복음이 들어오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적 섭리였다.
기독교는 우리 역사와 맞물려 우리의 고난과 함께 아우른 종교였다.
기독교는 암울했던 조선에 서광을 비춰준 종교였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이다.
이것이 한국감리회의 첫 번째 정체성이다.
한국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그런 복음으로 한국감리교회는 회복해야한다는 것이다.


II. 희망의 종교(1884-1903) / 고종의 선교윤허로 인한 복음수용과 삶의 변화

고난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1866년에 천주교인이라고 박해를 받던 병인박해 이후 19년의 조선인들 특히 인천의 어려움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1882년 조미수호조약 이후 안정을 되 찾아가고 있었고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물론 이후에도 갑신정변 등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지만 1885년 4월 5일 오후에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일행들이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884년 12월 4일에 있었던 갑신정변의 여파가 두 선교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지는 못했다.

푸트공사의 권면으로 부인을 대동한 아펜젤러는 제물포항 대불여관에 머물면서 추이를 살폈고 단신으로 들어 온 언더우드는 바로 한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한 주간 머물면서도 상황이 좋지 않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일본으로 되돌아가기 전 이렇게 기도문을 작성하였다.

“우리는 부활절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 아멘 -

짧고 간결한 기도문이지만 여기서 아펜젤러가 말하고 있는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은 무엇이며‘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한국역사에 나타난 결과로 보아 조선의 개화와 독립이었다. 일찍이 한양으로 들어 온 언더우드도 기도문을 작성하였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 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의심부터 내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내용 발췌)

언더우드의 기도는 아펜셀러 기도문의 해설 같기도 하다.
선교사들은 조선선교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1. 의료선교
선교사들이 들어 와 제일먼저 이룩한 것은 의료사업이었다.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이 들어 와 보호를 받았다. 병들어 사는 이들이 아픈 것을 아픈 것이라 알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았지만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인간의 참된 행복을 알았다.

알렌이 세운 제중원, 알렌은 갑신정변에서 칼에 맞아 크게 상처를 받아 죽게 된 민영익을 살려내므로 의료의 힘이 무엇인가를 조선인들에게 알게 했다. 이곳에서 일하던 스크랜턴이 정동에 병원을 세워 정동병원이라 했고 고종은 무료봉사를 격려하는 마음에서 시병원이라고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스크랜턴은 이곳은 거의 양반들만 진료를 받기에 가난한 백성들을 찾아 남대문 근처에 진료소를 설치해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되었다. 이화학당내 여성들을 위한 조선 최초의 부인 병원을 세웠으며 아현에 아오게시약소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의료선교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었고 함께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 곳에 교회를 세워나갔다. 의료선교의 힘이었다.

2. 학원선교
아펜젤러는 정동에 남자학교를 세웠다. 고종은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하사했고 메리스크랜턴은 여아학교를 세웠다. 명성황후가 이화학당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언더우드는 고아학교를 세웠다. 경신학교의 전신이다.

존스부인이 인천 사택에서 시작한 영화여학교(1892년) 남감리회 선교사이자 중국에서 활동한 캠벨이 들어와 시작한 배화학당(1898년) 이외에도 윤치호에 의해 개성에서 시작한 한영서원 이것은 송도학교로 발전하였다. 많은 학교가 세워졌고 인재양성을 하였다. 당시 교육기관인 서당엔 양반 집 자제들만 배움을 가졌지만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갈 수 있었던 새로운 학교와 새롭게 배울 수 있는 학문들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3. 문서선교
아펜젤러, 스크랜턴, 언더우드, 헤론 등 장감 선교사들과 성서번역위원회(1887년)을 조직하였다. 성서번역을 위한 모임이었으나 이 일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는 미이미교회 강례, 존스는 구약공부와 초학언문, 게일의 천로역정, 헐버트는 민필지 등 번역과 저술을 하기도 하였다.
존스는 조선에서 아직 찬송가가 없었을 때 인천에서 찬송을 가르쳤으며 입에서 입으로 부르던 찬송을 가사를 적어 조선 최초로 가사만 담긴 무곡 찬송가를 만들었다.

4. 복음선교
의료선교를 시작한 선교사들의 활동은 그저 진료에만 신경을 쓴 것이 아니라 복음을 함께 전했다. 고종의 윤하는 의료와 교육에 한정되어 있어 바로 교회를 세울 수 없었으나 조선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정동병원은 정동교회 전신인 벧엘교회를 상동병원은 상동교회를 동대문 곁에 있던 보구여관은 동대문교회를 아현시약소는 아현교회를 세웠다.

인천엔 아펜젤러가 올링거와 함께 내리교회 전신인 웨슬리교회를 세웠고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만수교회 그리고 부평지역선교, 강화교동지역선교, 남양선교, 안산 수원등지로 복음은 번져나갔다. 장로교회는 아직 인천선교가 없었다. 당시 선교구역 경계가 설정되어 인천은 감리교회 선교구역이었다. 그러나 광복이후 장로교회의 선교로 제1장로교회, 제2장로교회 등 수많은 교회가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족선교
이렇게 전해진 기독교복음은 민족애로도 나타났다. 당시 조선으로서는 세계정세에 아둔했고 열강들의 지배를 받아오던 때였다. 국모인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당하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가자 감리교인이었던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문을 세워 주권회복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기공식이 있었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축가를 했고 아펜젤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였다.

하나님께 츅슈하되 죠션 대군쥬 폐하와 왕태자 뎐하께셔 셩채가 안강하시고
죠션독립이 몇 만년을 지내도 문허지지 안케되며 죠션젼국 인민이 졈졈 학문이 늘고
재산이 늘어 새사람이 되게 햐야 줍쇼샤......

아펜젤러가 조선을 사랑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대목을 보면 아펜젤러는 고종의 건강과 조선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조선인의 깨우침과 새 사람이 되길 기원하고 있다. 1년 뒤, 조선은 대한제국을 건설하고 고종은 황제가 되었다. 기독교 복음의 민족적 관심은 3.1운동, 임정활동, 애국운동, 계몽운동 등으로 이어져 민족의 광복을 결실로 만들어가고 있음을 본다.

5. 언더우드 선교사와 새문안교회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 언더우드(Horace Granr Underwood)는 한양으로 들어왔다. 언더우드의 초기 활동은 알렌이 세운 제중원에서 그를 돕는 일로부터 시작하였다. 고아학교를 세웠다. 조선은 교육과 의료사업에 관해 매우 협조적이었으나 집회는 허용하지 않았다. 선교사들과 외국 국적을 가진 기독교인들만이 참석할 수 있는 제한적인 집회만 허용 되었다. 언더우드는 고아학교를 세운 이후 그는 새문안 교회를 주축으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우기 시작하였다. 연동교회(1894년) 널다리교회(1894년) 송천교회(1895년) 대구제일교회(1895년) 승동교회(1896년)을 설립하였다. 이렇게 한양 내에서 이뤄진 지 교회 활동은 수도권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 온 1885년 이후엔 지난 19년간의 조선의 분위기와는 너무 달랐다. 교회에 가는 양반의 인력거를 끌던 머슴이 자연히 함께 교회에 갔다. 그들은 양반이 들어가는 예배실까지 들어 갈 수는 없어 교회 문밖에서 있을 때 안에서 설교자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다. 양반과 상놈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이 소식은 상놈들에게 새로운 희망이었다. 양반과 상놈이 함께 교회에 출석했지만 머슴이 먼저 교회장로 혹은 목사가 되었다. 이것은 교회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일로 조선엔 양반 상놈의 제도가 자연스럽게 사라져갔다. 당시 여성에겐 이름이 없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며 세례명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자신이 불리어졌을 때 자신의 정체성을 알았고 세상을 가진 주인과도 같았다.
이렇게 복음을 통해 형제와 사랑을 알았다. 엄청난 삶의 변화가 온 것이다. 1885년 4월부터 선교사들이 들어 온 이후 수많은 선교사들이 엄청난 활동을 해 왔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선교활동이라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조선인들의 복음이해도 아직은 어설프기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의 마음속엔 깨달음이 쌓여갔다.

이렇게 선교사들이 보여준 그 복음을 보면

기독교는 우리 조선에 교회를 세운 종교이다.
기독교는 우리에게 새로운 민족정신을 일깨워준(개화) 종교였으며,
기독교는 우리 민족에게 주권의식을 가져다 준(독립) 종교였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다.
이것이 한국감리교회의 두 번째 정체성이다.
우리의 한국감리교회는 세상을 향해 희망을 주어야 한다.



전체 3

  • 2016-12-16 16:19

    내가 시비를 건다.
    시비.


  • 2016-12-17 02:11

    사경회,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책으로써 우리의 신앙과 생활과 신학의 표준이 되고 영의 양식이되고, 시공을 초월하여 현재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 들을 수 있게 하는 책이다. 하디나 초기 선교사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였다. 거기에서 회개가 있었고 삶의 변화가 있었다. 초대교회 부흥사로 평양대부흥의 불을 붙힌 그였으나 신학교 교수를 하며 성경비평학을 받아들여 소개하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을 통해 듣고 순종하던 삶을 잊어버리고 영적으로 무력한 자가 되어 더 이상 부흥사의 삶을 살지 못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성경을 이성으로 납득되는 것만 걸러서 읽고 신비적인 사건이나 영적 진리를 부인하다 보면 도덕적 교훈의 책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신비를 부인하는 신학은 이미 신학이 아닌 것이다.


    • 2016-12-17 09:39

      어찌되엇건 하디나 탁사의 제자들이 목회자가 되어 독립운동에 나선것은 분명한 것이니 민족인재 양성의 공로가 잇다 할것입니다.(신학세계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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