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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회가 대한민국을 회복한다.

작성자
유은식
작성일
2016-12-16 08:59
조회
1478
III. 구원의 종교(1903-1910) / 깨달음과 고백, 교회의 부흥, 소명과 전도

고난에서 희망을 본 조선인들은 영적갈등을 느끼기 시작했다.
1885년부터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였다. 사람들은 새로운 기독교 문화에 호기심을 갖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정치적 혼란을 피하고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려 나온 사람들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에 와 돌봄을 받았고, 학교에서 새로운 학문을 배웠으며, 교회에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 했다. 그 경험은 당시 조선인에게 있어서 진정 새로운 경험이었다.

노예와 같은 천민이 병들고 헐벗은 생활에서 보호받고 치유 받는 생활을 해 갔다. 양반과 상놈의 계급사회는 복음 안에서의 한 형제라는 기독교 복음 안에서 무너져 버렸다. 특히 여성들의 지위 변화는 신분의 변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름이 없는 자가 이름을 가지고 인정받는 새로운 세상이 온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런 새로운 경험은 기독교 문화적 삶 속에서 하나하나 그 마음속에 벽돌을 쌓듯 차곡차곡 종교적 체험을 해 나갔고, 기독교 복음적 사고와 경험이 조선인 삶속에서 누적되었다. 이런 조선인들의 마음속엔 언제부턴가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고, 아펜젤러의 순직 소식에 만감이 교차되었다. 영적 갈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1. 1903 원산대부흥운동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는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로서 원산 미감리회 병원에서 일하다 남감리회로 소속을 옮겨 강원도 지경터서 15명에게 세례를 주며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다음해인 1902년부터 하디는 선교사업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침체된 상태였다. 이런 한계로 도전을 받고 있을 때, 1903년 8월 화이트 양(Miss Mary Cutler White)의 권유로 장감선교사들이 모여 사경회 겸 기도회를 가졌다.

하디는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에서 요한복음 14장 12-14, 15-17, 23-24절을 본문으로 하여 효과적인 기도의 세 가지 본질에 관하여 발표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거함(Abiding in Christ)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Faith in Christ) 그리고 성령의 체험(Experience of Pentecost)이었다. 하디는 지난 밤 이 원고를 작성할 때 자신이 성령이 이끄심 속에 살아가지 못했으며, 그리스도의 뜻대로 목회하지 못했음을 깊이 깨닫고 밤새 기도를 하였다.

그는 몸부림치는 이 기도 속에서 주님께서 용서해 주심과 성령 체험으로 얻어진 마음의 큰 평화가 있었다. 하디는 이런 기쁨과 용기를 참석한 선교사들 앞에서 고백하였다. 이에 참석한 이들도 하디처럼 갈등을 겪었던 일들에 공감하며 하디가 받은 은혜와 평안을 같이 나누게 되었다. 하디는 이 기쁜 마음을 갖고 그 주간 주일 아침 원산교회 주일예배 강단에 섰다. 예배를 인도하던 그는 회중들 앞에서 자신의 불신앙과 교만한 마음 그리고 참 신앙의 부족에 대해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 후 3주간 변함없는 그 모습을 교인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를 바라 본 원산교회 교인들도 이런 죄책감을 갖고 참회를 하였다.

하디의 고백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1)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과 기도로 얻어진 기쁨을 선교사들 앞에서 고백하고 나눴다.
동역자로서의 고백이다.
2) 원산감리교회 주일 낮 예배에 회중들 앞에서의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했다.
지도자로서의 고백이다.
3) 또한 한 개인의 입장으로 본 다면 이는 이웃에 대한 고백이다.
형제로서의 고백이다.

이런 하디의 모습을 한 달 가까이 바라보던 조선인들의 마음이 변화 되었다. 마음이 뭉클했으며 감동이 왔다. 지나간 세월 속에 기독교 복음이 이 땅에 들어와 보여줬던 모든 일들이 생각이 났을 것이며, 수많은 선교사들과 스쳐지나 갔던 일들을 회상하며 고마움과 증오, 깨달음과 후회 속에서 마음이 흔들렸으며 조선인들의 마음에 문이 열려 회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디가 보여준 이것이 신앙과 고백의 절정을 이뤘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지도자들이 하지 못하는 고백이다. 회개를 말하면서 고백이 없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이었고 이 영적경험은 1903년 원산에서 여름부터 시작 된 부흥회는 그해 겨울까지 지속 되었다. 이 부흥의 불길은 이듬해 1904년 하디의 인도로 가진 원산 신년사경회로부터 시작하여 개성, 지경터, 한양, 인천등지로 번져나가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아직까지는 개인적 영적 각성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 하디는 안식년으로 귀국하지만 1905년에도 크램을 중심으로 계속 이끌어 나갔다. 서서히 집단적 영적각성의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시작은 원산으로부터였지만 개성, 강화, 재령 등 지방으로 번져나갔다.

1906년 서울에서 장감 연합 사경회가 있었다. 정동교회에서는 장로교회 강사를 승동교회에서 감리교회의 강사를 세웠으며 평양에서는 남산현감리교회와 장대현장로교회에서 성대히 사경회를 가졌다. 이후 개성원산, 서울, 평양 등지에서 신년 사경회와 감리교선교사 사경회, 장로교선교사 사경회 등을 가지면서 원산을 중심으로 한 집회는 전국으로 확산 되어져 갔다. 언제나 사경회는 장감연합으로 모였으며 특히 1903년 사경회를 통해 하디의 영적 고백을 시작으로 언제나 장감연합으로 사경회를 준비했다.

2. 1907 평양대부흥운동
당시 회중들을 위한 사경회는 선교사들의 사경회로 준비 되었다. 선교사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도, 행사를 앞두고도, 새해를 맞이해서도, 여름휴가가 되어도 사경회를 가졌다. 사경회는 그들의 삶이었다. 같은 해 1906년 8월 장감선교사들은 평양에 모여 대형집회를 계획하였다. 도사경회로 장소는 장로교회인 장대현교회에서 그리고 강사는 감리교회 하디선교사로 결정하였다. 새로운 영척 체험을 했으니 많은 이들에게 경험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평양의 선교사들은 이런 목적으로 8일간 성서연구와 기도회를 가졌다. 지난 3-4년 동안 경험했던 성령체험을 수백여 명의 조선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길 원해 하루 1-2시간씩 기도하였고, 매주 월요일 정오기도회가 있었으며 이 기도는 가을과 겨울 내내 계속 되었다. 은혜를 사모하던 때에 조선인 길선주장로가 자청해서 자신이 속한 장대형교회에서 한 주간 준비기도회가 모였다. 그는 1906년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설교를 하면서 뜨거운 집회를 이끌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을 하였다. 이렇게 이 평양 대부흥회가 있기엔 짧게는 3-4개월간의 말씀과 기도의 준비가 있었던 것이며, 길게는 3-4년간의 크고 작은 부흥회를 통해 개개인의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1907년 1월 2일부터 장대현장로교회에서 감리교회의 하디선교사를 강사로 초빙하여 장감연합 도사경회 집회를 가졌다. 첫 주는 별 일 없이 지나갔다. 14일 저녁 길선주장로가 자신의 죄를 고백함에 성령의 불길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자신이 기도회를 인도하여 은혜를 끼쳤던 그 장소에서 죄를 고백한 것이었다. 그의 설교를 들었던 모든 이들이 놀랐다. 그는 단상에서 1년 전 자신의 친구가 죽기 전 셈이 어둔 아내 대신 재산을 정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재산을 정리 하던 중 미화 100달러 상당의 돈을 사취했음을 고백하고 그 여인에게 돈을 돌려주겠다고 고백하였다. 이 집회에서 회중들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였다.

여기서 길선주 장로의 고백에 관심을 가져 보자. 그는 장로교회 장로였으며 설교자였다. 평양 대 부흥회의 준비 기도회를 자청하여 인도하였던 장로였다. 그의 준비기도회설교를 들은 많은 이들이 은혜를 받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그런데 그 설교자가 설교를 들은 회중들 앞에서 길선주자신의 죄를 고백하였다. 그것도 자신이 설교한 같은 장소에서 있은 연속 된 집회에서 말이다. 어쩌면 하디의 고백보다 심리적으로 더 힘들었으리라 보여 진다.

1. 이런 길선주도 하디처럼 회중들 앞에서의 고백하였다.
장로의 신분인 지도자로서의 고백이다.
2. 그는 설교자로서 고백이 아니라 회중 속에 한 사람으로 고백했다.
이웃 속에 형제에 대한 고백이다.
3. 그의 설교에 동료 장로들이 그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은혜를 받았다.
동역자 앞에서의 고백이었다.

이런 길선주의 고백이 있었기에 2천명 이상 모인 이 집회에서 사람들은 기도를 했고,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하기 시작 했고, 마루위에 곤두박질쳐 벼락 맞은 자처럼 쓰러져 나갔다. 그들의 죄 고백은 구체적이었다.

3. 1909년 100만인 구령운동
1908년 여름 남감리교회의 선교사들이 원산에 다시 모였다. 스톡스(M.B. Stokes)목사, 하디목사, 쿠퍼목사, 화이트양 등이 교회는 늘었지만 하나님의 사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데 공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6주간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회를 가졌다. 이듬해 1909년 초 이번에는 송도에서 남감리교회의 선교사들이 모여 이전과 같은 신령한 생활을 하지 못함에 대한 참회를 위해 1주간 동안 기도회를 가졌다. 그러나 스톡스, 리드(W. T. Reid), 갬블(F.K. Gamble) 등 세 사람은 만족하지 못하고 산으로 다시 올라 금식기도를 하였다.

선교사들은 자신의 구역 속에서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스톡스는 자신의 구역 속에서 전도를 하면서 1년 동안 5만 명 전도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 계획은 그해 9월 한양에서 열린 제13차 남감리회 선교연회에서 구체화 되었다. 연회에 안건으로 채택되어 기도회를 가지면서 “이 해에 20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200,000 Souls for Christ This Year)표어를 정하고 전도에 힘쓰기로 하였다.

바로 다음달 10월 감리교 장로교 복음주의 선교부연합공의회가 한양에서 모였을 때, 리드는 “이 해에 20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전도운동을 설명하고, 장감 선교회 공동목표로 정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여져 분과 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리드가 위원장이 되어 기도와 토론을 거쳐 이 표어는 다시 “100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표어가 정해지던 날 동남아를 순회하며 전도하던 채프만(J.W. Chapman)과 알렉산더(C.M. Alexander)일행이 한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조선에 머물면서 5일간 조선인들을 위한 전도세미나도 가졌다. 5만 명 전도목표가 100만 명이 되었다. 기독교인이 14만 명인 당시의 100만이란 수는 엄청난 것이다. 이 근거를 살펴보면 1909년 4월부터 7월 까지 1차로 배가 운동을 하면 28만 명이 된다. 그리고 2차로 8월부터 11월 까지 또 한 번 배가 운동을 하면 56만 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3차인 12월부터 이듬해 1910년 3월 까지 또 한 번 배가 운동을 하면 100만이 넘는다는 계산 하에 이렇게 목표를 세웠다. 한 해 3차에 걸친 배가 운동 과연 가능한지 의문이다. 이 비전에 대해 당시 선교사들은 가능하다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로 나타나진 않았다.

집회 때마다 일어나던 고백의 열기와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던 부흥의 열기 전도의 열기 이것은 선교사(목사) 장로 들이 앞장서서 자신을 돌아보는데서 시작되었다. 자신을 돌아본 평신도들이 고백하였고 한국인 설교자 목회자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복음 앞에서 선 자신의 깨달음을 회중들 앞에 고백하는 그 일에서 말이다. 당시 사경회가 뜨거울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인들의 고난에서 하나님의 손길에서 그리고 복음을 접한 조선인들이 신앙 안에서 희망을 갖으며 신앙에 대한 열망과 그 깨달음에서 가능했다. 이것은 당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고난이 있고 그 속에서 희망을 안고 산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사경회는 우리의 삶의 문제에 질문하고 해답을 찾으며 살아가는 삶의 현장일 것이다.

이렇게 1903년부터 1910년 까지 전국을 강타한 고백의 열기, 부흥의 열기, 전도의 열기는 1910년 조일병탄을 깃 점으로 식어들기 시작하여 수면 밑으로 잠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열기는 지속되었고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부활하여 민족애로 나타났다. 이렇게 복음은 인간의 삶을 변화 시키는 것이다.

기독교복음은 우리에게 기독교적 문화생활을 뛰어 넘어 영적체험을 요구한다.
기독교는 정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며 복음을 전한다.
기독교는 지도자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과 회중들 앞에 고백하게 한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이것이 세 번째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국감리교회의 정체성이다.


IV. 섬김의 종교(1910-1945) / 이웃에 대한 사랑, 계몽운동과 민족애, 봉사와 섬김

고난 속에서 희망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들은 이웃을 향한 섬김을 가졌다.

교역자들의 섬김
1907년을 전후로 조선인 목사들이 대거 탄생했다. 사경회를 통해서 소명을 받았고 사경회를 통해서 지도자가 되었다. 저들은 일찍이 경험한 영적 체험 즉 사경회를 통해 얻은 그 믿음은 그 어느 때에 없었던 것이었다. 조선이 일제와 합방이 되고 신앙의 자유마저 탄압 당하자 한일합방이후에도 들키지 않고 지켜나갔다. 그 열기는 9년 뒤 3.1운동으로 나타났다. 여기에는 복음을 듣고 믿음을 고백한 교회지도자들이 주도해 나갔다. 더욱 그 신앙을 유지해 가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1918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 선포되자 세계각지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이 전개될 때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대한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박용만을 중심으로 한 대한독립단(Korean Independence Leaque)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흥사단(Korean Knight) 활동이 있었다. 중국과 일본 등 외국에서 조선의 독립을 추구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중심으로 불교와 천도교와 협력하여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종교인이 일으킨 만세운동인 3.1운동이 있었다. 이 일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을 보면 정치인들은 한명도 없다. 관료들이 참석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기 교파에서 신학 훈련을 받은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감리교회 이필주 최성모 신흥식 정춘수 오화영 신석구 박희도 김창준 박동완 등 목사, 전도사 9명과 장로교회에서는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양전백 이명용 이승우 이갑성 등 목사 장로 7명이 참석 하였다. 천도교 지도자 15명 그리고 불교지도자 2명이다. 33인을 선정하는 일도 교회목사들이 주도하였다고 한다.

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도 기독교인으로 그가 쓴 선언서의 내용은 기독교사상을 바탕으로 표현된 자유 평등 및 독립사상이었다. 이렇게 기독교지도자들이 앞장선 3.1운동은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온 국민이 참여한 사회적 운동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 성공하지 못하자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지로 해외 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 민족사랑은 임시정부운동으로 발전되며 여기에도 역시 믿음의 사람들이 주도해 나갔다.

평신도지도자들의 섬김
3.1운동 이후 세계 각 지로 흩어진 이주 현상으로 저마다 국내외의 살아가는 현장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왔다. 3.1운동에 참여한 유관순, 임시정부 활동에 이승만, 김구, 안창호, 현순, 도인권 등이 활동했다. 문명퇴치가 급선무로 자각하여 “아는 것이 힘이다.” “다함께 가르치자 배우자.” 고 했다.

조만식은 1920년 평양에서 시작한 조선물산장려운동을 했다. 이 운동은 1923년 서울로 그리고 전국 확산되어 갔다. “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쓰자.”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라고 했다. 반면 일본은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고 사회 문화 종교 면에서 철저히 일본화 시도를 하였다. 이에 YMCA, YWCA와 각 교단 농촌부에서 계몽운동을 하였다.
YMCA농촌사업의 방향에 대해 총괄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신흥우로 그는 농촌문제 해결방안으로서 공업화를 통한 농민전업, 유상매상·유상분배의 점진적 토지개혁, 농사개량, 축산 및 가내수공업 부활, 협동조합을 통한 농민생활의 조직화를 내세웠다. 심훈은 상록수를 썼으며 최용신은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을 섰다. 교회에서는 한글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치고 야학에서는 한글과 역사를 가르쳐 민족혼을 깨웠다. 손메레는 절제회를 만들어 조선기독교절제회, 조선여자 기독교절제회를 통해 금주단연운동과 폐창운동을 벌였으며, 구세군은 자선사업을 벌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일들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계몽운동에 앞장선 이들은 전국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교회에서 신앙훈련을 받은 평신도들이다. 한 두 사람들이 한 두 곳에서 한 것이 아니었다. 전국의 민란을 보듯 전국 교회와 기관들을 중심으로 신앙을 가진 평신도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생활 구석구석 백성들의 눈과 발이 되어주었고 민족의 정신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원군 이후 김옥균에 의해 기독교를 선택하고, 서재필과 같이 기독교를 수용하고 33인 처럼 전문적 신학훈련을 받은 이들이나 평신도들이 이웃에 대한 철저한 봉사로 민족의 혼을 깨운 후 주권 회복의 광복이 주어졌다. 곧 고난 속에서 희망을 가지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 사랑에 감사하는 삶은 언제나 승리한다는 지난 역사의 교훈이며 또 그 중심에 사경회가 큰 역할을 했다.

이렇게 복음은 자신 만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삶으로

기독교복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은 소명이 있어서 이다.
기독교복음은 직분은 자기 자리를 지키거나 행사하기 위함이 아니다.
기독교복음은 지도자로 하여금 이웃을 향해 섬김과 봉사가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이다.
이것이 네 번째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국감리교회의 정체성이다.
한국감리교회는 내 교회 내 교인만이 아니라 고난 받는 이들을 섬겨야 한다.

이를 종합해 보면
1. 조선에 대한 토마스의 선교 적 관심에 비롯된 정치적 소용돌이는
아펜젤러 등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결과를 낳았다.
기독교복음은 역경 속에서도 전해졌다. 기독교 복음은 고난의 종교이다.

2. 선교사들이 전해 준 복음은 조선의 개화와 독립의 밑 걸음이 되었다.
기독교 복음은 한 민족을 일깨워 주고 나라를 살린다.
기독교 복음은 희망의 종교이다.
3. 복음을 받아들인 조선인들은 사회적, 문화적, 영적으로 수용하였다.
영적 회심 속에 성숙한 신앙인으로 거듭난 것이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이다.

4. 우리의 고난 속에서 희망을 갖고 그 희망 속에서 구원을 경험했다면
사회적 구원도 이뤄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고난 받는 이들을 향한 섬김과 봉사이기에
기독교는 섬김의 종교이다.

결국 믿지 않은 사람이 인생의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 희망을 갖고
구원의 확신을 얻어 믿음의 생활을 해 가는 과정을 우리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여 준 한국교회의 처음의 모습 곧
고난의 종교 희망의 종교 구원의 종교 섬김의 종교로
한국감리교회는 회복하여야 한다.

****

21세기에 사경회를 갖는 교회와 지방마다 한국교회를 이끌어 가는 디딤돌이 되길 희망한다.
이렇게 이번 2017 사경회는 이 민족의 변화를 가져다 준 1903-1910의 대 사경회가 있게 된 조선의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삼아 그 정신을 2017대 사경회에서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사경회를 준비하며 모였던 선교사들의 사경회처럼
우리도 2017 사경회를 위한 준비기도회를 갖으며
2017 사경회에서 고백, 부흥, 전도의 열기를 회복하자는 것이 목적이다.

또한 당시 사경회는 장감연합으로 준비했으며
또 감리교회에 장로교 목사를 장로교회에 감리교 목사를 초빙해 집회를 갖는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길 원해서이다.
민족 대 부흥운동의 기반이 되었던 사경회는
조선인들의 고난 속에서 희망을 갖게 한 기독교복음을 가지고
복음 앞에서 바른 사람이 되고자 고백하고 결단한 조선인들을
민족 앞에 이웃을 섬기며 살게 했다.
복음의 힘이다.



전체 2

  • 2016-12-16 16:18

    시비걸고 시퍼요.


  • 2016-12-22 21:31

    대 심령부흥이전에 부흥을 위한 합심기도와 사경회 운동이 있었지요. 심령부흥운동후에 연합운동도 잘 되고 폐습 악습이 사라지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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