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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자기를 깨뜨린 사람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7-03-08 23:34
조회
1148
레위기 14:1-9, 마태복음 26:6-13.



“슬픔의 집”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 베다니는 예루살렘의 감람산 동쪽 산허리에서 여리고 쪽 2마일 지점에 위치해있습니다.
대체로 한적한 이 마을은 가난한 나병환자들이 많이 살기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1:13,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썩고 냄새나든 나사로의 시체를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불러내어 다시 살려준 곳으로도 알려집니다.
그 베다니에 시몬이라는 나병환자가 살고 있었습니다(막 14:3, 마 26:6).
본 사건은 예수님께서 그 베다니에 가셨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나병환자 시몬이 어느 날 예수님을 초청하였습니다(눅 7:36).
그때 한 죄 많은 여자가 나아와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제자들은 공연히 비싼 향유를 허비한다고 분하여 책망했으나 예수님은 오히려 그 여자를 칭찬하시고 복음과 함께 이 여자의 행적도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각기 개성의 빛을 발하는 별의 5각을 그려 볼 수가 있습니다.
1각은 예수님을 초대한 나병환자 시몬의 대접입니다.
2각은 예수님을 향유로 기쁘게 해 드린 여인의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3각은 예수님을 정성껏 모시고 다니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4각은 가난한 자들에게 증거 되는 복음입니다.
5각은 본문의 가장 상층에 위치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의 본문 속에서는 이 모든 개성들이 돋보이면서 예수님과 연관을 맺고 각기 관계를 이루어가며 빛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어느 한 가지도 자기의 개성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요 자기보다는 예수님을 향해서 폭을 넓혀 나아가는 진지한 모습들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의 빛나는 믿음의 개성들은 더욱 죄 많은 여인의 향유보다도 깊은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은 다 이 사건 중에서 잊혀 진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전폭적으로 희생한 이 여인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 사건의 맨 나중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예수님께 이런 칭찬까지 받게 된 믿음의 향기는 무엇입니까?

1. 율법을 깨뜨리고 나병환자를 사랑으로 방문했습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에서는 나병환자는 부정함으로 격리된 장소나 진 밖에서 혼자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지켜온 율법이며 규칙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가셔서 식사를 하시게 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라는 기록이 초청 받았음을 시사하고 있지만, 초청한 사람은 바리새인이며 건강한 사람이었고, 본문에는 나병에 걸린 사람이라고 했으니 각기 방문목적이 다른 것이 분명합니다.
또 본문의 나병환자와는 어떤 사이인지 예수님과 나사로처럼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그를 치료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고 예수님이 방문하신 이유도 더 이상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어느 곳이나 누구에게나 방문하시고 만나시고 대화하시고 위로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시기에 가능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의 방문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이 식사하시는 때에 감히 여인의 몸으로 찾아 들어와서 옥합을 깨뜨려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오셨고 병자를 위해 찾으시는 분이지만, 이 여인도 그런 사명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병환자의 집으로 들어온 것은 율법을 깨뜨리고 사랑으로 방문한 것이 분명합니다.

① 율법의 부정(不淨)과 정(淨)함의 규례를 깨뜨린 것입니다.
레위기 13:45-46. “문둥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 되 진밖에 살지니라.”고 하여 부정한 병자를 격리 수용하여 전염되는 것을 예방하려는 의도로 규례를 정했을 것입니다.
병자가 격리된 장소에 거처하든지 건강한 사람이 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부정한 환자의 집에 찾아 들어 왔습니다.
그렇다고 이 여인이 병자를 찾을 자비심이 있었다거나 사랑함이 있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7: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한 것을 미루어보면 아직 여인은 죄의 문제로 고민하던 여자였으리라고 짐작이 됩니다.
결코 병자를 의식하고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의식하고 찾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고 예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남자의 신분도 아니요 여자의 신분으로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부정한 병자의 집으로 찾아 온 것입니다.

율법을 어겨서라도 예수님을 찾은 것이므로 율법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규례와 법칙보다 귀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왔노라”(마 5:1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실 수도 있고 완전케 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부정한 것도 정해지고 예수님이 안 계시면 정한 것도 부정하여 집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계시는 지옥은 천국으로 변하고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천국은 지옥으로 변할 것입니다.

② 율법의 격리된 담을 깨뜨리고 찾은 것입니다.
율법은 건강한 사람과 부정한 병자를 삶과 생활의 벽으로 격리시키고 막았습니다.
그것은 병자들의 병에 대한 고통에 정신적 고통까지 가중시키는 율법이었습니다.
부정한 병이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척들과 친구들도 격리시켜지는 담이 막혀있는 질병인 것입니다.
나병은 가까운 이웃들도 만날 수 없고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가지 못합니다.
원치 않는 부정함으로 자학하는 소리를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외치며 다녀야 했으니 그들의 아픔은 몸과 마음까지도 깊이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마치 죄의 담이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막은 것 같습니다.
미움의 담이 나와 이웃과의 사이를 막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격리된 나병환자의 접근을 예수님도 시도하셨으나 예수님 외에는 이 여자가 처음이었음을 성경에서 봅니다.

민수기 12:10, 모세의 누이 미리암에게 나병이 발하자 격리 수용되었고, 역대하 26:20, 유다 왕 웃시야가 교만하게 제사장의 직무인 제사 직을 스스로 행하다가 이마에 나병이 발하여 별궁으로 쫓겨나 죽는 날 까지 격리수용 되었다가 죽어서도 조상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따로 장사되었다 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친히 나병환자의 환처에 손을 대시고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다고 했습니다(마 8:3).

예수님 외에 이 여인이 나병환자의 집으로 단독 찾아간 최초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함께 동행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울이 예배소 교회에 말한 것과 같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 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옙 2:13-15) 한 것처럼 죄의 담이나 병의 담을 모두 무너뜨려 버리신 분이십니다.
아마 이 여인도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떤 격리된 담이 있다 할지라도 찾아 나설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 갈 여자입니다.
율법은 병을 치유하지는 못하며 가정과 이웃과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담을 쌓을 뿐인데도 예수님은 어떤 병이던 치유하시고 막힌 담을 헐어 화평의 관계를 엮어 주십니다.
이 여인은 그 예수님을 찾음으로 율법을 깨뜨린 사랑과 자비의 주님 안에서 관계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어떤 담도 무너집니다.
예수님께 나오면 어떤 벽도 무너집니다.
원수도 친구로 변하고 미움도 사랑으로 변합니다.
심지어 빌라도와 헤롯은 사이가 나빴으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가까워 졌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눅 23:12).

성도 여러분! 율법보다 크고 사랑 많으신 예수 안에서 참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2. 성차별을 깨뜨리고 여인의 신분을 높여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남녀의 성에대한 차별이 심하였습니다.
율법은 매사에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을 때에도 여아를 낳을 때와 남아를 낳을 때의 산후조리에 차이가 있습니다(레 12:1-5).
성전 세를 내는데도 남자는 12세 이상이면 의무를 주었으나 여자는 의무를 주지 않았습니다.
예배장소에 들어가는데도 여자들은 이방인의 뜰에서 조금 더 들어가는 것에 불과했으나, 남자들은 성소에까지 들어가도록 특권이 주어집니다.
부모의 재산을 상속하는 일에도 딸은 아들과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딸이나 여자라는 이유로 격차가 극심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유대인 랍비들은 우월감을 가지고 살았는데,,,,,,,,,
① 짐승으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였고
②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③ 여자로 태어나지 아니하고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한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여자에 대한 차별대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자의 인권은 아주 무시당하고 살았습니다.
신명기 24:1절은 남편이 아내와 살기 싫으면 이혼 증서를 써서 주면 버려도 된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의 삶은 언제나 남자들의 그늘에서 가려져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의 부정이 의심되면 저주의 물을 마시게 하여 부정함이 있으면 배가 붓고 다리가 썩어 죽음을 당했으나, 부정이 없는 아내는 아무 징조도 나타나지 않았고 남편에게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여자를 나중에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러한 취급을 한 것인지, 아니면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셨기 때문에 남자의 부분적 지체의 취급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여하튼 여자는 사람들의 계수에도 들지 못하는 취급을 받았습니다.

출애굽기 12:37절에 보면 애급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를 여자 아이들의 수를 뺀 남자 장정의 수를 60만이라고 계수했습니다.
신약 복음서의 5병 2어의 기적사건에서도 여자와 아이의 수를 뺀 남자 장정만을 5천명이라고 계수하고 있습니다.
다 같은 사람이면서도 여자가 부당한 취급을 받는 것은 다만 남자와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 한가지뿐입니다.
성별이 다른 한 가지 이유로 여자들은 언제나 남자들의 그늘아래 눌리어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아름다운 행위는 여자의 지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울도 그의 서신 가운데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자의 머리는 깎고 드러내어도 되지만 여자는 머리를 기르고 예배드릴 때 머리를 수건으로 가려야만 하였습니다.
여자의 머리 위에 언제나 남자의 권위가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감히 지금까지 모든 여자들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을 하였으니,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 드린 것입니다.

열왕기하 4:27, 수넴 여인은 외아들이 일사병에 걸려 죽자 갈멜산에 나아가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선지자의 발을 움켜 가슴에 않았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매어 달리는 것은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놀라운 신분의 변화입니다.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한 여인의 위치를 향상시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여인이 칭찬을 받은 사건이 3번 있습니다.
① 예수님 말씀을 열심히 들었던 마리아가 칭찬을 받았습니다.
② 혈루병든 여인의 믿음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③ 예수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린 여인이 칭찬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이 여인의 아름다운 행위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전해진다고까지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드림으로 칭찬을 받을 일인데 진심과 정성으로 드렸으니 주님은 더 기뻐하신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았으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보면 선행을 행한 사마리아사람이 율법사보다 제사장보다 레위인보다 더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부자 아버지의 슬하에서 사랑을 받던 아들도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을 때, 돼지우리에 들어가서 멸시를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사람은 어떤 신분도 변하고 어떤 위치도 변합니다.
천대받던 사람이 귀한 신분으로, 멸시를 당하던 사람이 존귀한 사람으로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또 여자도 남자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영광스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헌신의 사람입니다.
4복음서를 보아도 어떤 남자가 이 여인처럼 주님을 위하고 헌신한 사람이 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남자가 이 여인처럼 눈물과 정성으로 사랑하여 주님을 감동시킨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남자가 몸과 지체를 다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주님을 위로한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남자가 자기의 전 재산을 주님께 바쳐서 주님의 장사를 준비한 사람이 있습니까?
수제자 베드로도 장차 받을 영광을 기대했고, 세배대의 아들도 예수님께 높은 관직을 요구하였으며, 여리고의 삭캐오도 조건 있는 헌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성적으로만 여인이지 남자보다도 마음이 크고 대담한 믿음을 가진 여인이었음을 알게 합니다.

참으로 여장부요 여사도요 여증거자 입니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보다 목동 다윗이 더 큰 사람이라고 노래했듯이 이 여인은 사도들보다 대담하고 믿음의 확신이 있는 마음이 큰 여자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여선교회역할이 모든 교회들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3. 물욕을 깨뜨리고 사랑을 실천한 여인입니다.
사람에게는 3대의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명예욕, 성욕, 물욕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자기는 물욕이 없고 깨끗하다고 말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관광지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기념품을 사는 것도, 실상은 내 것에 대한 작은 물욕의 행위입니다.
아름다운 경치와 조화를 자신이 오래 간직하려는 생각 말입니다.
하물며 거액의 값이 나가는 물건이나 자신이 소유하기에 가능한 것을 누구나 소유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요즈음 정치인들은 정권을 잡으면 서로 사정을 하는데 사정을 받는 사람이나 사정하는 사람이나 모두가다 물욕에 치우친 것은 50보 100보의 차이일 뿐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여인이 예수님께 부어드린 인도산 나드 향유는 300데나리온의 값진 물건입니다.
남자장정의 하루품값이 1데나리온으로 1년 내내 벌어들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할 고액의 값진 물건인데도, 아낌없이 예수님께 부어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과는 상관도 없고 간섭할 일이 아닌데도 이것을 보고 분하게 여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도들은 아직 신앙연령이 성숙하지 못한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12:4절에서는 가룟인 유다가 분하게 여겼다고 했습니다.
가룟인 유다는 돈궤를 맡은 제자입니다.
그는 돈을 훔쳐가려고 분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8절에서 제자들이라고 복수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룟인 유다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분하게 여겼던 것을 뜻합니다.

마가복음 14:4절은 어떤 사람들이 분 내어 서로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분과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나 그 외에 다른 사람들도 분 내어 말한 것 갔습니다.
누가복음 7:39절을 바리새인 시몬이 여인을 멸시하고 예수님께 불평하는 눈치를 가졌음을 말해 줍니다.
아마 그것은 모인 모든 사람들은 다 분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거액의 돈에 욕심을 낸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아낌없이 물욕을 깨고 예수님께 부어 드린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으로는 주님께 드리고 싶어도 아까워서 인색하여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마음 같아서는 재물을 모두 팔아서 베드로의 발 앞에 드리고 싶었으나 여러 가지로 인간적인 생각이나 물욕으로 실천하지 못하여 사도의 책망을 받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들과 정 반대입니다.
아낌없이 주님께 부어 드림으로 물욕을 이긴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향유보다도 더 짙고 향기로운 믿음입니다.

여인의 행동은 잘못된 물질관을 바르게 정리해준 모범적인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벌었으면 자기가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개미와 같이 자기의 소유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래도 가룟인 유다처럼 거미와 같이 남의 신세나 지려는 사람들보다는 낳은 편입니다.

거미는 남의 속을 모두 빨아먹고 껍질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꿀벌과 같이 자신의 것으로 남을 기쁘게 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애써서 모아들인 값진 것으로 예수님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내가 노력하고 벌어들인 물질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쓰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쓰도록 해야 합니다.

현재 물질을 소유하도록 주신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잠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에 불과합니다.
강에서 물이 흘러가듯, 하늘에 구름이 변하듯 세상의 모든 물질도 변하고 주인이 바뀌어 집니다.

영원한 내 것이 없습니다.
영원히 한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도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만들고 가꾸고 수고하여 내게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야고보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했습니다.
물질의 인색함이 죄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
“화 있을 진저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물질의 지나친 탐심이 죄를 부릅니다.
여자는 물질에 대한 탐심을 버렸습니다.
여자는 물질에 대한 애착심을 버렸습니다.
여자는 물질에 대한 인색함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여자는 물질에 대한 소유욕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의 행동은 향유보다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한 것입니다.
여자는 없어질 물질로서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은 심판 때 불에 타서 없어질 것입니다.
지혜로운 청지기는 그 재물로 친구를 사귐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좋은 친구는 예수님 입니다.
여인은 불의의 재물로 의로우신 영원한 친구 예수님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니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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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08 23:45

    필자의 설교집을 구입하신 목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계속하여 설교집 5권과 CD 2장을 2만원에 드리겠습니다. 하오니 친구 목사님들께도 권하여 주시고 목회에 승공하시기 바랍니다. 전화는 010-8208-0675 이고요 어떤 용무가 있으시면 언제라도 전화주십시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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