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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화인가 인간화인가?

작성자
현종서
작성일
2018-11-27 12:18
조회
801
복음화는 성서적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체험하고 전하는 일로서, 죄성(original sin)을 가지고 태어나 하나님앞에서 태생적 죄인으로 그 죄성의 열매로 나타나는 불의한 언행심사를 하나님께 회개하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그 회개와 신앙을 보시고 그 죄를 용서하시고 이제는 용서받아 깨끗해 졌느니라 선포하신다.(justification) 그 선언에 접하여 사죄의 기쁨, 평강을 체험하며(new born, opening communication with God)사죄 받은자답게 감사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노력하며 용서해 주신 분의 명령, "네 이웃을 네 몸 처럼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새 생명 얻은 자로써(성령의 감화와 인도아래) 열심히 실천해 가려 해야 한다.(process of sanctification with helping of Holy Spirit) 이런 개인구원이 기초가 되어 이웃 사랑의 확대로서 사회구원을 위한 노력으로까지 확대되어 가는 것,(social salvation) 이것이 복음화이다.
이러한 것이 기독교 구원론이며 루터가 재발견한 것이고 칼빈의 체계화와 웨슬리의 사랑의 실천의 가르침을 통한 보완으로서 개신교 구원의 신학이 완성되었다.

감리교단의 지도인사들인 감독들은 이러한 의식을 확고히 가지고 있는 가? 그러한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어서 정권과 한 목소리를 내며 적극 협조하려 하는가? 이 교단의 신학자들은 영적인 감각이 살아있어서 감리교단의 성도들을 바로 이끌고 있는가? 교단의 기관지 기독교타임지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 가? 정권의 정치를 무조건 칭송하며 따르고 있는 가? 아니면 때로 진리로써 견제하고 있는 가?

그런데, 인간 이성을 존중하며 그것이 이끄는 대로의 철학을 하다 보니 하나님의 계시 진리도 철학이라는 학문의 이름으로 이성의 지배하에 두려한다. 계시 진리일지라도 이성으로 설명을 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이성으로 납득이 안되는 것은 신비라하여 배제하거나 이성으로 납득이 되도록 재해석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을 이성만으로는 알 수가 없어 자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신을 만들어 내었다. 수많은 우상들을 환경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만들어 내었다. 그중 하나가 인간 자신을 믿는 것이다. 인간이성의 의식과 판단과 노력으로서 인간행복의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인데 그중 하나가 맑시즘이라는 사상이다. 이것은 인간의 작품으로 하나의 철학이다. 이것은 하나님없이 인간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인간의 이상세계를 실현 할 수 있다고 하는 사상이다. 그래서 인간화라 말할 수도 있다.

문제는 기독교의 구원의 진리속에 이 맑스사상이 조직적 악과 싸우기 위해 방법론적으로 필요하다고 설득하며 기독교회속에 슬며시 들어와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의 방법을 변조 대치하는 데 있다. 복음의 변조는 여러 가지 재해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경계해야 한다.하나님의 계시 진리를 담는 사상인가 계시와 상관없이 인간의 이상을 따라 인간이 만든 사상이냐? 우리는 구원의 길로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문제는 신학의 이름으로 이것이 들어와(예, 민중신학 또는 해방신학)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를 변조시키는데 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시작되고 완성되는데, 맑시즘적인 개혁과 변화를 실천하는 데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과 실천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들의 사상적 연대와 활동으로 이룰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없이 인간의 모순(불행의 원인)을 제거하고 인간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의 구원을 흉내내 만든 무신론적인 인간의 사상과 그 사상의 실천에 불과한 것으로 초월적 하나님의 신적인 구원과는 차이가 나는 인간의 자구 노력에 불과하며, 그러한 노력은 개인구원의 바탕이 없이도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으로 한동안 조직이 개혁되는 듯 보이나 개인이 구원되지 못한 이들이 권력을 쥐고 휘두르다 보면, 불의 하다고 개혁한 전 조직체와 다를바 없는 또는 더 악한 조직체가 되어 내로남불의 악을 휘두르며 그 조직이 생산적이 아니라 파괴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공산주의가 들어간 나라마다 결국 인권을 억압하고 새 귀족층을 만들고 대다수 인민은 가난하고 못살게 만든다.( 이 운동에는 회개도 없고 칭의와 성화도 없다. 성령의 역사도 필요치 않다. 따라서 근본적인 인간개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다.)

결국 남이 벌어놓은 것 법으로 뺏어 나눠먹다가 그것 마져 떨어져 다 가난하게 되는 구조인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이나 은총과 자발적 생산력이 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의 노력으로 잘 되가는 듯 보이나 얼마 안가서 번아웃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윗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그분은 우리를 지으셨으며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분은 우리를 축복을 주실 수도 있고 저주를 할 수 도 있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 인생들은 장차 그분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들어나고 심판을 받게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나의 주인이라 자존망대하지 말고 그분 앞에 겸허히 엎드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 그것이 인간이 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인간의 조직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대리행세 하려 해서도 안된다. 그것이 교권이든 정치권이든 말이다. 그들은 임시 부여 받은 권력을 두렵고 떨림으로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철학사와 일반문화속에 파고 들어온 이사상은 사회문화와 대화하려 우리들의 신학속에도 들어와 교회사와 종교철학과 기독교교육과 기독교윤리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사회와 대화하는 신학을 하기 위한 것임으로 그러한 사상을 대화를 하는 중에 은연중 영향을 받고 있고 받았고 그래서 신학속에 그들의 사상을 분별없이 받아들여 기독교 진리의 변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기독교진리의 효과적인 전파나 변증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철학에 기독교의 진리를 꿰맞추려 하는 모양새를 보인다.그러다 보니그들이 목표하는 여러 과정의 기초 과정 교육을 충실히 해주며 또는 그들 사상의 나팔 수 역할을 하게 되나 복음을 가리우는 역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신앙과 신학의 근본은 성경인데, 성경자체의 계시성과 권위를 부정한다. 그리고 창조론 대신 진화론의 사상과 학문의 방법론을 받아들이고 그러한 이성위주의 학문의 방법으로 신학을 하다보니 또 복음의 해설과 변증이 아닌 변종 철학을 만들어 내면서 새로 깨달아 만든 신학이라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수많은 신학들, 그것 따라가며 공부하기가 바쁘다.

새로운 신학 -당시 상황과 문화에 효과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려는 -좋은 데, 그것은 늘 표준과 같이 가며 표준에서 벗어나는 것 같은 언어나 이념, 실험 신학은 표준(성경의 본질적 메시지, 정통신학)의 충고와 견제와 비판에도 귀를 기울이며 항상 더 타당한 해설을 찾으면서 설득과 더불어 새로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중에는 통일교회의 원리 강론도 성경해석도 독창적인 새로운 신학이라고 보아 칭찬한 영적으로볼 때 무지한 신학자가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동양의 음양의 원리로 성경을 해석하며 새로운 구원의 방법을 말하였다. 그럴듯하나(그래서 많은 추종자를 얻었으나) 성경의 기본 구원의 메시지와는 다른, 그야 말로 다른 복음이었던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과 성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또 하나의 철학이요 이단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많은 철학적인 탐구와 수행을 통해 비로서 깨달아 지는 진리가 아니다. 그런 것은 필수요건이 아니다. 어떤 이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진리 문턱에 이르기도 한다. 웨슬리처럼, almost christian 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진짜 기독교인이 된것은 올더스케잇의 "회심 체험" 또는 거듭남, 중생, 신생의 체험이 있은 후 였다. 그런데 그 중생의 체험,또는 성령의 체험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경로가 다 다르다.
그 체험이후의 삶은 옛 사람(자기가 주인되어 사는 삶)과 새사람(그리스도가 주인되어 사는 삶)의 구별이 너무나 뚜렷한 것이다. 그리고 진짜 중생한 사람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통로가 열려 성령의 권고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성화를 이루기 까지 계속적인 자각과 회개,개선과 선행을 성령의 권고를 받아 행하게 된다.

그런데 자유주의적 신학이나 철학을 하다가 하나님의 계시와 상관이 없는, 다시 초등학문으로 떨어져 신앙을 가지지 못한 이들의 논리를 따르다 보면 그 수준에 머물게 된다. 살아계시고 우리와 교제 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타락되어 기능이 온전치 못한 이성을 활용하여 하나님을 찾으려 하니 여전히 숨어계시어 알 수 없는 하나님이 됨으로, "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진리를 찾기 위해 목말라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나타나 주시고 만나주신다. 며칠전 나운몽 장로와 용문산 기도원, 애향숙을 연구한 영성신학자(남성현)의 강의가 있었다. 4-5세기의 영성신학의 출발점이요 기초로 마태5장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을 들었는 데, 나운몽 장로의 신앙체험도 바로 이점에서 맥이 같다고 하는 해설이었다. 나운몽 장로는 당시 지성인 이었으나 신학을 한 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만난 하나님과 그분과의 만남속에서 체험하며 배운 도리는 기독교의 핵심진리와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토착화의 신앙과 신학이라는 게 학문의 방법이 아니라. 이런 체험의 방법을 통해서도 이루어 질 수 있구나 하며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론과 체험이 만날 때 그 진리는 더욱 단단해 진다. 감신의 이론적 철학적 토착화 신학이 이런 체험과 만난다면 그 신학의 진가가 살아나리라고 본다.

그런데, 토착화 신학의 예를 종교다원주의 적인 체험의 사람인 다석의 철학과 체험에서 찾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의 구원으로부터 이탈하여 다원주의적구원을 말하는 결과를 초래 하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인 것이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유일한 대속주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지극한 사랑의 표현만이 아니다. 그것은 죄에 대한 무서운 심판이 있는 하나님의 공의가 들어난 사건인 것이다. 그러한 대속의 구원을 다른 종교 사상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 그래서 그들(타종교의 원조)의 정도를 그리스도의 위치에 올릴 게 아니라 하나의 몽학 선생으로 그리스도의 발앞으로 인도하는, 세례요한 역할을 하는 자로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여러 종교 창시자와 동렬에 놓는 다면 그는 아직 성령의 감화를 받아 진리를 만나지 못한 상태요 거듭남의 체험을 하지 못한 자라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 이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행4:12)는 성경의 변할 수 없는 메시지, 기독교구원의 유일성과 독특성을 성경을 기초로한 기독교는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사상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며 양보하는 순간, 그것은 "성서적인 기독교"일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론도 체험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웨슬리가 취한 자세였다. 자기의 신학이 성경의 기본메시지에 어긋난다면 많은 비판속에서 자기 신학을 반성하며 교정해야 한다. 기독교진리는 공론공론이어서는 안된다.실패도 좋은 경험이요 잘 쓰면 약이 된다. 실험을 마음 껏 하도록 하되 자기 절대에 빠져서는 안되며 비판에도 늘 열려 있어,개선해 간다면 더욱 진리를 잘 변증할 수 있는 학문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좋은 증인이 된 것이 그 자신이 자기 신념과 사상으로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무리를 사상과 행동으로 대적한 이력이 있었던 까닭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를 바로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상과 비슷한 옷을 입었으나 노략질하는 이리의 선전에 속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상과 비슷한 옷이나 그리스도 사상을 흉내낸 본질이 다른 옷을 입은 가짜 그리스도인,사이비 그리스도와 그 선지자일 수도 있다는 경계심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를 분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는 영분별의 은사를 주시기도 한다.(고전12:10) 일반적으로는 그의 열매로 그 나무됨을 분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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