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동완 목사 1주기 추도식 설교(2008.9.9)
살든지 죽든지
빌 1:20-21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하늘나라로 가신 고 김동완 목사님 1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특별히 고인의 생애 한 가운데 자리한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이렇게 다시 모이게 되어 감회가 새롭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마치 그가 어디엔가 앉아서 우리를 응시 하는 듯 합니다. 평소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친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무엇보다 그런 생생한 느낌을 간직한 채 지내시는 사모님과 자녀들, 그리고 친구들와 동역자들 위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위로가 같이 하시길 빕니다.
벌써 김동완 목사님이 우리 곁을 떠난 지 1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와 사회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정체상태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입장에서 보나,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인권현실을 보면 김동완 목사님의 빈자리가 참 크게 느껴집니다.
지금은 그를 기억하는 시간이요, 여기는 그를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김동완 목사님을 회고할 때, 우리 한국기독교는 위대한 지도자요, 아름다운 동역자요, 장수같은 운동가를 잃었다는 서운함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상실감에는 뚜렷한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지난 30여 년 동안 정의와 평화 운동의 가장 구체적인 증언자로서 인권운동을 펼쳐왔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돌아보더라도 한국사회는 늘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지금은 민주화가 크게 진척되었고,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것 같았던 야만적인 현실은 비로소 과거가 되었습니다.
민주화된 오늘 우리사회는 자유로운 인권을 보장하고, 선진국 수준의 시민적 권리를 담보해 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군사독재의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비록 최근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있지만 머지않아 곧 잠잠해지리라는 기대도 갖고 있습니다. 이젠 누가 흔들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만큼 민주와 평화의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에 김동완 목사님과 그 분의 선배들과 그 분의 동료들과 그 분의 후배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징검다리였고, 마당발이었으며, 때로는 산파로, 때로는 고난당하는 모습으로 우리의 현대사를 참 성실한 몸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인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마 25:40)에 대한 관심으로 목사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의 인권운동과 연합사업에 대한 소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부였고, 말씀대로 살려했던 몸부림은 제자로서의 사명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김동완 목사님은 살아있을 때이든, 비록 죽어 우리 곁을 떠난 지금이든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는 법과 죽는 법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죽이고, 주님의 영광과 의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과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사람들의 인기나 비판 때문에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 망설이게 되고, 그러면 결국 기회주의자나 출세주의자들로 전락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향해 우리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기에 ‘의에 이르는 죽음’은 바로 복된 죽음이며, 영광을 얻으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몽테뉴는 그의 수상록에서 “인간 생애의 목적은 죽음이다. 이것은 필연적인 목적이다. 죽음은 가장 평범한 사실이므로 죽음을 멀리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은 목적에서 이탈하는 어리석음이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생활 속에서 죽음과 가까이 지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노래하기를 ‘나와 죽음 사이는 한 발자국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결코 남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과 죽음의 신비 속에서 평생을 엄숙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평범한 사건이지만 그러나 죽음처럼 심각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기에 죽음도 유익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얼마나 지혜로운 것입니까?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죽음을 각오한 생(生)만이 영원에 연결된 삶이요, 죽음을 잊어버리고 사는 생(生), 또는 죽음을 겁내고 비겁하게 사는 인생은 영원을 잃게 되는 인생입니다.
인간 김동완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그것은 죽어서 사는 지혜로운 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4-2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죽음이라는 것은 인생의 마지막에 한 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내 삶과 연결되어서 날마다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실한 삶의 흔적, 열매있는 삶을 위해 날마다 땅에 떨어져 죽는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18세기 미국의 감리교 복음전도자 죠지 휫필드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녹이 슬어서 없어지느니 차라리 닳아서 없어지는 것이 더 낫다”. 일생을 바쳐 할 일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런 점에서 일생을 바쳐 할 일이 있었던 김동완 목사님은 마치 전태일 열사처럼, 문익환 목사님처럼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김동완 목사님의 삶의 유산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험악했던 인권유린 상황을 돌아보면, 과연 누가‘예수 사랑’ 없이 누가 억압과 박해의 현장을 함께 지키며, 누가 감히 고난을 자처할 수 있었겠습니까? 돌아보면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실은 고난당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고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사는 변할 리가 없습니다. 거대담론에 취해있는 우리의 관심사로부터 소외되었을 뿐입니다. 돌아보십시오. 우리 안의 타자와 공동체의 소수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 안에는 1950년대 식 냉전의식과 21세기의 시민의식이 병립하고 있습니다. 피해의식으로 가득한 과거와 자기만족적인 현재와 그리고 예언자 의식이 결여된 미래는 서로 아무런 반성과 성찰 없이 나란히 자기 영역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부활신앙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마치 돌무덤이 열리듯,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과 사랑에 대하여 문을 여신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죽음도 유익한 삶,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죽음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 비록 김동완 목사님은 곁에 계시지 않지만 그가 남긴 생전의 삶과 죽음을 회고하면서 다시금 부활신앙의 확신을 갖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참석한 유가족과 동역자들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혜와 평화를 베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