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총장조찬기도회 설교(2008.5.30)
오늘의 방주
히 11:6-7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열린 대학총장 조찬기도회에 참석하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이 기도회가 기독교인 총장님들의 교류와 친교를 넘어서 한국 교회를 향해 강한 영향을 주는 영적 나침반이요, 도덕적 발전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커다란 배에는 용골이란 부분이 있습니다. 배의 밑바닥 앞부분이 주둥이처럼 툭 튀어 나와 있는 쇠뭉치 부분을 용골이라고 합니다. 용골의 용도는 높은 파도와 풍랑을 만난 배가 기울지 않고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즉 오뚜기와 같이 원리입니다.
사실 배는 매우 역설적인 몸의 구조를 갖고 있는 셈입니다. 목적지에 빨리 가려면 자기 몸을 가볍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무거운 쇠뭉치를 달고 다니니 말입니다. 그러나 용골이야말로 꼭 필요한 배의 무게중심이었습니다. 저는 이 용골이야말로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에게 있어서 ‘희망의 무게중심’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모임이 특히 한국 기독교에서 희망의 중심이 되어주길 기대합니다.
세계교회 일치와 연합운동의 상징은 배와 십자가입니다. 사실 방주는 인류 처음의 교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교회는 곧 새로운 세계를 잉태할 오늘의 방주라는 의미입니다. 그 방주에는 각양각색의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담겨있고, 육식동물과 초식동물간의 먹이사슬도 방주 안에서 공존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평화의 항구로 안내할 선장이고, 봉사자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노아를 대표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믿음은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이며, 이러한 믿음을 통해서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존재의식을 가지고 합당하게 살려는 사람을 보상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일깨워 죽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노아는 믿음으로 모범적인 의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노아의 방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하나님 앞에서 노아가 행한 신뢰와 순종의 태도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평화의 약속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 시대에서 구원의 방주라고 불릴만한 교회의 존재와 그 행태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나는 평생 현장교회에 몸담아 온 사람으로서, 또 한 교단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또 교회와 국가 또는 사회 간의 관계에서 교회를 대표해온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믿음의 사람 노아와 같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사실 불신과 회의를 품고 있음을 용기 있게 말하지도 못하고,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것이라고 무책임한 확신을 말하지도 못합니다. 그야말로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한국교회의 위상과 모습을 평가자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것이 솔직한 제 모습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 우리시대의 방주를 자처한 교회는 배 구실을 하기 어려울 만큼 낡고 손상되어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안전도에 있어 신뢰를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크게 수리를 하고 개조를 하기 전에는 물에 뜰까 의심스럽습니다. 방주 안에는 밑도 끝도 없는 분쟁과 갈등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오늘의 방주는 침몰하기 직전상태에 있습니다.
구원의 희망은커녕, 적신호가 켜져 있습니다. 과연 2000년간 지속된 교회의 구원을 향한 항해는 하나님 나라의 항구까지 인류를 인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함으로서 가능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 11:7).
지금 우리에게 참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노아처럼 그 경고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오늘의 방주를 수리하고 견고하게 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보다 구체적인 방주를 만들 필요를 요청 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튼튼한 노아의 방주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처음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함으로서 가능합니다.
기독교 복음주의는 바로 세상을 사랑하셔서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본 중의 기본, 원론 중의 원론을 잃어버린다면 우리 교회가 설 땅은 점점 위축되고 말 것입니다.
선거철만 되면 다양한 출마자들이 교회를 찾아오고, 자신이 교인임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당선 되고 나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 중에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찾아보기가 어려워 참 실망스럽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기독교인 정치인들이 정당의 이해를 넘어 신앙 양심을 고집하는 모습을 보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돈키호테 취급을 받을지언정 예수 정신을 대변하는 흉내라도 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교회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라는 요구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설령 교회의 요청을 거절하더라도 기독교인다운 희생과 모범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 기반한 정치인은 많아도 기독교 이상에 기초한 정치인의 부재는 오늘 한국교회의 신앙풍토의 단면일 것입니다. 지금 제가 정치인의 예를 들었지만… 우리의 고민은 기독교인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과, 직업과, 사회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신앙고백이 실현되고, 하나님의 뜻이 구체화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대안을 준비할 수 있는지, 우리는 부지런한 농부의 심정으로 씨앗을 뿌려야 할 것입니다.
선지자 미가는 그의 예언집 미가서 6장 8절에서 우리 생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이 말씀은 미국 전 대통령 지미 카터가 취임식 때 선택한 말씀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비록 재선에 실패했지만,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신앙적 결단을 했던 장본인입니다. 은퇴 후에도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 주는 해비타트 운동을 하고, 고향교회에서 성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성경교사 역할을 자랑스러워했으며, 한반도의 화해를 위해 평양을 방문하는 등 대통령직을 마친 후에 더욱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였기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도 이렇듯 존경받는 기독교인이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신실한 대학총장님들을 통해 대학을 중심으로 한 지성사회의 개혁과 한국사회의 새로움을 위해 귀하게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또 한국교회의 갱신과 성숙을 위해 여러분 자신이 불씨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