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평화포럼 개회설교(2008.2.25)
요나의 표적
마 12:39-41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과 같이 하시길 기원합니다.
먼저 북일리노이주연회가 세계평화포럼을 개최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 연회가 세계의 관심사에 대해 눈을 돌리고, 분쟁의 극복을 위해 일하려는 모습은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특히 한반도와 팔레스타인의 문제에 촛점을 맞추고 당사자들을 불러 모아 주신 일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따라 세계 평화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은 평화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상수훈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 5:9)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평화의 원칙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랍비들은 샬롬을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불렀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평화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곧 바로 주어진 계명이다\”라고 하였고, 또 브로우더스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슬렘 교도 역시 \”앗살롬 알레이꿈\”이라고 일상적으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서 교회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개념이 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태도를 갖는 사람은 도덕교과서의 교훈이나 공적으로 정해진 규범에 대해 언제나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교훈과 규범을 반드시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인종주의를 부정하고 공식적으로는 반인종주의적 태도를 갖지만, 심리적으로나 남이 보지 않을 때에는 사람을 인종하거나, 공정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이성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안 되는 태도를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태도입니다.
이것을 신앙생활과 빗대어 본다면, 사람들은 \\’성서적 올바름\\’이란 태도를 갖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서적 올바름\\’은 \\’안다\\’, \\’동의 한다\\’는 것은 물론 그 차원보다 훨씬 높은 \\’믿는다\\’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마치 인종주의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처럼 \\’말씀에 대한 믿음\\’과 \\’말씀에 따른 행함\\’은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성서적 올바름’을 지닌 사람은 평화를 위해 일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인정하고 믿지만, 사람들은 평화에 대해 늘 이중적 태도를 갖습니다. 경우에 따라 하나님의 정의와 자신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극복할 것은 이러한 이중, 삼중, 다중적인 태도입니다.
한국정교회 본부 교육관 벽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평화를 찾아라. 그리하면 네 주위의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Find Peace! Thousands of around you will be saved.). 우리는 말씀을 쫒아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을 따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대표적인 인물이 구약성경의 요나입니다. 그는 앗시리아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편협하게 이해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만 아는 국수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이중적 태도를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을 향해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다고 사람들의 불신앙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도 그런 책망을 듣기에 합당한 사람들입니다. 처음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는 니느웨가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니느웨와 정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였을 때, 그가 만난 것은 저주의 바다였고, 절망의 파도였습니다.
요나는 고래 뱃속에서야 비로소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고, 그 분의 뜻을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절망의 바다에서 평화의 바다로, 죽임의 바다에서 생명의 바다로 인도해 주십니다.
시편 107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 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 도다. …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 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25-30).
사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여전히 요나처럼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평화였는데, 우리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것을 안보요, 안전이라고 선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헐벗은 동포에게 나누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일방적인 퍼주기라고 우겨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수많은 요나들 때문에, 니느웨가 아니라 다시스를 고집하는 요나의 종교 때문에 오랫동안 우리는 절망의 파도와 씨름해야 하였고 죽음의 풍랑과 맞서 씨름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지난 60년 이상 평화가 없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많은 그리스도들이 있지만 그들이 믿는 것은 평화가 없는 복음이었습니다. 이웃이 빠진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 요나들은 남이 아닙니다. 바로 저 자신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저 역시 갈등과 미움의 한 복판에 있었던 요나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너무나 오랫동안 다시스로 가는 앞바다에서 헤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동안 우리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다시 부르셔서 평화의 전도자로, 화해의 사명자로 세워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요나에게 하셨던 것처럼 자기 민족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명령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한반도에는 중국과 마주한 서해바다가 있습니다. 애초에 바다는 분단선이 없었지만 그동안 이 바다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져 전쟁의 바다요, 갈등의 바다요, 서로 오고 가지 못하는 이산(離散)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몇해 전에도 두 차례의 군사적 충돌로 여러 명의 젊은 군인들이 전사하고, 가족들은 커다란 불행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2007년 가을,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으로 우리는 서해바다가 달라지는 모습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서해바다에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면 한국인들의 삶은 엄청나게 변화 할 것입니다. 한강 하구가 열리고, 뱃길로 남과 북의 무역선이 왕래하고, 자유롭고 평화로운 바다어장이 열린다면 남북관계에도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인들과 함정들이 밀집한 이 지역이 전쟁의 바다에서 평화의 바다로 탈바꿈하게 될 유일한 열쇠는 바로 평화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평화는 가장 중요한 일임을 깨달아야 할 것 입니다.
사실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요나의 바다가 존재합니다. 요나의 바다인 지중해는 오랫동안 전쟁과 갈등의 바다였습니다. 그리스와 터키의 전쟁, 키프러스 분쟁은 이미 과거가 되었으나 여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사실 평화의 원칙에서 본다면 중동의 분쟁과 한반도의 갈등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두 곳은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할 평화가 필요한 곳인 것입니다.
제 생각에 요나는 세계를 보는 창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반면교사요, 그런 의미에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내일 우리에게 강의할 부르스 커밍스와 같은 학자를 통해 우리가 한반도 문제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된 것처럼, 이번 컨퍼런스를 통해 우리는 팔레스타인 형제자매들의 고난과 의지를 통해 한반도는 물론 세계평화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열리고, 평화를 이루어가는 길에서 서로 협력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컨퍼런스를 도우시고, 우리 모두에게 평화의 길을 가르쳐 주시길 희망합니다.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과 한반도를 비롯한 모든 분쟁지역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우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평화롭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