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4-18 한나라당 조찬기도회 설교
빈 무덤
요 20:1-10
오늘 이 아침에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맨 처음 하신 말씀은 “평안하냐?” 였습니다. 우리의 부활 인사는 바로 평화의 인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안해하던 막달라 마리아에게도(마 28:9), 의심이 많았던 도마에게도(요 20:26) 주님은 평화의 인사를 전하셨습니다.
이 시간 이 나라 정치일선에서 수고하는 여러분들께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언제나 평화롭고, 이 나라 국방과 경제가 늘 평강하며, 국민의 일상생활이 항상 평안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와 평강과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물론 불신앙으로는 이러한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흔히 부활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고, 하나의 속임수와 같이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확신이 없는 믿음은 흔들리는 그릇과 같아서 원하는 것을 담기가 힘들 뿐 아니라 그릇 안의 것까지 쏟아버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만큼 부활신앙을 갖는 일은 믿음 없이는 어려운 법입니다.
사실 더 어려운 것은 부활신앙을 지니고 거듭난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많지만 진정한 부활신앙으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생활은 단지 겉모습의 변화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솝 우화에 ‘요술장이와 생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생쥐 한 마리가 요술쟁이의 집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에 고양이가 살았기 때문에 무서워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술쟁이는 무서워하는 생쥐를 측은히 여겨서 고양이의 모양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개를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개의 모양으로 다시 만들어 주었더니, 또 이번에는 호랑이가 무섭다는 것이었습니다. 실망한 요술쟁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양만 바꾸어졌지 마음은 계속 생쥐의 마음이니 넌 가망이 없다. 다시 생쥐가 되어라.”
믿음은 겉모습이 아니라 속사람의 변화를 뜻합니다. 겉모양이야 어떻게 보이든, 외형적인 조건이 어떻게 변화하든, 그것들은 문제의 해결점이 되지 못합니다. 해결은 생쥐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마음으로부터 거듭 나는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그리스도교 진리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인간을 변화시키고, 역사의 물꼬를 바꾸는 영적인 에너지가 충만한 까닭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남으로써 육적인 욕망과 결별한 사람들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악의 도구가 되지 않기 위하여 양심의 눈을 밝히 떠야 하며, 이 사회의 죄악을 저지하고 격감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인 믿음의 길이나. 국민과의 정직한 관계인 정치의 길이나 같은 이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도하면서 특별히 한 여인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보도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사방이 아직 어두울 때 일어난 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두려워하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무덤 입구를 막았던 돌이 옮겨진 것을 목격하면서,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한 막달라 마리아는 곧장 제자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맨 처음 부활소식을 알린 장본인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예전에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밀려 조연에 불과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성탄절에 마리아에 가려졌던 요셉이 부각되고 있고, 부활절에 베드로에게 가려졌던 막달라 마리아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잃어버린 보석을 찾는 것과 같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과거에 많은 죄를 범했고, 또 값없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녀가 바칠 수 있는 것 역시 두려움 없는 사랑뿐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빈무덤을 본 즉시 추측하기를, 누군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딴 곳에 두었다고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그 놀라움에는 행여 누군가가 무덤을 파 헤쳐 예수를 두 번 모독한 것이 아닐까하는 당혹스러움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놀라운 전갈에 두 명의 제자가 급히 달려와서 무덤을 조사하고 그것이 비어 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살펴보니 세마포와 수건은 제 자리에 개켜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기 전이기에 의아해 합니다.
성경(마 28:11-15)에 따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적대자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거짓 증거를 일삼았습니다. 제자들이 그 시신을 도둑질하였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무덤지기가 예수님의 시신을 어디로 옮겼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였습니다.
주후 150년 경, 초대 교부 저스틴이 쓴 ‘트리포와의 대화’에도 부활에 대한 거짓 소문에 관련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만들어낸 이른바 ‘도적설’은 지금도 부활에 대한 이단사설로 남아있어,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훼방하려고 합니다. 주후 165년 경에 기록된 위경 베드로복음서(11:46-49)에도 군인들과 장로들이 함께 이 사실을 빌라도에게 보고하고 있으며 빌라도는 군병들에게 침묵을 지키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금도 기독교 신앙에 도전하는 존재가 있음을 볼 때 그 당시에는 오죽했겠습니까? 따라서 복음서 기록자들은 그 당시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유대인 적대자들의 주장을 의식적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러난 정황으로 볼 때 시체 도난이나 이장은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일찍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무덤이 비어있다니! 스승을 사랑했던 두 제자에게는 대경실색할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뒤이어 제자들은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요 20:8).
무엇을 믿었습니까? 빈 무덤은 바로 죽음을 이기고 떠난 자리였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산 증거가 된 생생한 현장이 되었습니다. 이제 빈 무덤은 믿음을 통해 얻는 새로운 차원의 생명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나 오늘이나 빈무덤은 부활 신앙의 참 증거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성경 주석책인 미드라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으로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사막은 뜨겁고 갈 길은 멀었습니다. 마침내 물도 떨어졌습니다. 아들은 목이 타고 피곤해 죽을 것 같다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머지않아 동네가 나타날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아들을 격려하며,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쯤 가자 묘지가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말하기를 “이제 묘지를 보았으니 곧 동네가 나올 것”이라고 아들을 안심시켰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사막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마을 밖에 묘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묘지는 마을이 가까이 있다는 안내표지가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덤이 모여 있는 묘지가 죽음의 증거가 되기 보다는, 사람이 가까이 살고 있다는 인기척과 다름없다는 사실입니다. 무덤이 종말이나 좌절의 상징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과 생명의 상징으로 인식된다는 점은 놀랍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은 실패나 절망이 아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의 표징이었습니다.
빈 무덤은 죽어야만 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부활에만 참여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심정일 것입니다. 그것은 덧없는 욕망일 뿐입니다. 그러나 남긴 것 하나 없이 무덤조차도 남의 무덤에 묻힐 수밖에 없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바로 제대로 죽어야 제대로 살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부활신앙은 지금 내 안에서 이루어질 사건이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참뜻을 증거하면서 여러분들이 밤낮 겪고 있는 정치, 정치인문제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들의 말은 부활사건만큼이나 믿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예전에 비해 사회는 많이 발전하고, 정직해졌습니다만, 여전히 정치는 비난의 대상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늘 우리나라 정치현실이요, 정치인들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에게는 욕심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비워냄으로써 더 풍성한 생명을 얻는다는 부활의 진리와 거리가 먼 존재들처럼 보입니다. 오늘 자기 비움이나 덜어냄이 시대정신임에도, 정치인들은 웰빙 환경이나, 승승전략과는 상관없어 보입니다. 항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절대로 이겨야만 하는 어거지 정치는 이제 달라져야 합니다. 절박한 처지에 닥친 것은 국민의 민생이전에 정치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정치인 동네에서 아직 희망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을 근처에도 무덤이 있지만 그 무덤에서 부활의 기운은 커녕 여전히 썪는 냄새가 납니다. 부탁드리는 것은 이 여의도가 희망의 마을이 되어주길 부탁드립니다. 먼저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이 희망의 등대로서 역할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빈무덤에 있습니다. 만약 구원이 빈 무덤에 있다면, 빈 지갑이라고 행복이 구멍 난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비뚤어진 사고방식과 잘못된 계산법, 삶의 방법을 바꾸어 줄 것입니다. 이제 부활신앙으로 여러분의 삶을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제도 교회는 사람들을 믿음이라는 울타리에 제한하고,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이젠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부활신앙은 믿는 사람들의 생활태도와 사고방식을 좌우합니다. 이젠 그 믿음 때문에 자기를 지키는 것은 물론 세상을 고쳐내야 합니다. 그것은 평신도 사역으로서 정치인 여러분이 할 일입니다. 마틴 루터는 제1의 종교개혁을 통해 평신도에게 성경을 주었지만, 이제 제2의 종교개혁은 평신도들에게 사역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여의도야말로 여러분의 사역의 현장임을 믿습니다. 이곳을 변화시키기 위해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이 먼저 변화하고, 갈등과 다툼을 넘어 화해와 협력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부활은 일회적인 사건이었으나, 부활의 의미는 결코 일회성 행사에 그칠 수 없습니다. 초대 교회가 고난과 시련을 딛고 부활신앙의 터 위에 굳게 세워진 것처럼, 우리의 삶도 부활신앙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부활사건은 방황하던 제자들에게 분명한 목적과 사명을 확실히 제시했으며, 걸어야 할 십자가의 길을 명백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향하는 신앙의 문을 크게 열었습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으로 날마다 새로워지고,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