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임원대회 주제강연(5월 10일)
희망의 청지기
신경하 감독회장
기독교대한감리회가 선교 120주년을 맞아 ‘2005 임원대회’를 연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연례적으로 열렸던 행사이지만, 특히 올해는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의 원년으로서 의미가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이제 다시 영적으로 각성함으로써, 한국 감리교회를 든든히 세워내고 그리고 민족 복음화와 세계를 품는 신앙공동체가 되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희망을 말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이 사회와 역사 앞에서 과연 희망을 주는 공동체이며, 앞으로도 희망을 제시할 수 있을까 라는 물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현장 교회에 있을 때나, 감독회장이 되어서나 변함없는 제 믿음은 ‘교회는 영원한 희망의 공동체’라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지금 이 모습으로는 아니라는 생각도 분명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자랑도 있지만, 허물도 못지않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기보다, 멀리해야할 세상의 습속에 익숙해졌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겉만 의로움을 내세우는 죄인의 존재이며, 말로만 섬김을 강조해온 오만한 존재였습니다. 경건의 모양만 주장하되 경건한 생활을 게을리 한 부끄러운 신앙인이었습니다. 오늘 거룩한 교회가 신뢰를 잃고, 존엄을 상실한 것은 먼저 교회의 책임자요, 임원된 우리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지난 봄에 장로교 예장 통합측이 발행하는 기독공보 50주년에 초대받아 축사를 하였습니다. 그날 총회장인 김태범 목사님이 설교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이 참 인상적입니다. “지금 우리 교단은 찢어진 부대와 같습니다. 낡은 부대를 교체하지 못하니 지금 여기저기에서 찢어지고 터지고 있습니다. 꿰매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영락교회, 광성교회 등 예장 통합의 대표적인 교회들이 극단적으로 분쟁하고, 사회 문제화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대로는 안된다는 강한 자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어떻습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올해는 기독교대한(조선)감리회가 세워진 지 7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우리 선배들은 1930년에 미감리회와 남감리회의 합동을 이루었고, 이 합동은 장차 미국 내 감리교회의 연합을 가져온 선구적인 안목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여러 차례의 갈등과 분리를 겪었지만 언제나 하나로 재일치하였고, 지역과 계파, 세대와 신학노선의 차이와 불화에도 불구하고 성서적이고 복음적이며 현대화된 교회제도를 이루어 가고 있음을 자부합니다.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는 새로 건설될 한국 감리교회의 성격을 ‘진정한 기독교회’, ‘진정한 감리교회’, ‘조선적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기독교회’(truly Christian Church)는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르침에 충실한 교회입니다.
‘진정한 감리교회’(truly Methodist Church)는 감리교 창시자 웨슬리의 정신에 충실한 교회를 뜻합니다.
‘조선적 교회’(Korean Church)는 한국의 민족적 상황과 현실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수난을 당해온 민족과 함께 하며, 조선의 문화와 풍속과 관습에 조화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감리교회는 누구에게나 ‘열린 교회’를 지향하였습니다. 한국 감리교회가 1930년 총회 때 여성 안수를 채택한 것과 모든 의회에 목회자와 평신도를 같은 수로 구성하도록 규정한 것은 이같은 열린교회, 평등교회를 지향한 결과입니다. 특히 전도와 교육과 사회봉사를 균형 있게 전개하기로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이래로 교회는 질적인 변화와 양적인 성장을 계속해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생래(生來)적으로 진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 있는 이의 특징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변화와 성장은 살아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변하지 않으면, 각성하지 않으면 ‘화석화’된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감리교인은 복음이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인 것을 믿으며 성령의 역사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교회’여야 함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모범으로 따르는 존 웨슬리는 이렇게 유언처럼 말하였습니다.
“메도디스트라 불리는 사람들의 조직이 설령 이 땅에서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염려하지 않는다. 두려운 것은, 단지 능력 없는 형식적인 종교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행여 오늘 우리가 존 웨슬리의 두려움처럼, 감리교회가 사람들의 욕망과 권력으로 유지됨으로써, 정의와 사랑을 나눔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지는 않을까 염려됩니다.
존 웨슬리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경건한 삶 속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메도디스트 운동도 의심할 여지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고 이미 강하게 경고하였습니다.
이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은과 금은 이제 우리에게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잃었다”
선교 120주년을 맞아 우리가 먼저 영적 각성을 통해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라는 목표를 정한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감독회의에서는 우리부터 영적 각성의 모범을 보이고, 앞장서서 실천해 나가자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 결과로 “감독회의 영적 각성 선언문”을 발표한 것입니다. 물론 어떤 행정수단과 정치적 방법에 앞서 먼저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려고 합니다. 그것은 처음이며, 동시에 마지막인 가장 중요한 선택임을 믿습니다.
영적 각성은 한마디로 다시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는 회개운동입니다.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진정한 회개와 새 출발의 바탕 위에 시작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물론 이것은 행사치례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감독회의가 첫단추를 꿰었으니, 이제는 연회와 지방 그리고 현장교회에 이르기까지, 더 나아가 우리 한사람 한사람 감리교인의 결단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감독회장의 직무를 하는 중에 종종 어떤 목회자에 대해, 어떤 교회에 대해 교회 안팎에서 시시비비가 오르내리는 것을 듣습니다. 제게 직접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고, 인터넷을 통해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저 자신도 구설수를 듣고, 도마 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목회자들의 비리를 고발할 때 저는 남의 일 같지 않게 분노를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교회가 이러 저러한 문제가 발단이 되어 쪼개지고, 파탄이 나고, 교인들이 흩어진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저로서는 남의 일 같지 않게 분노를 느끼기도 하고, 또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동정심이 들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럴 때마다 어떠한 비난과 책망보다 먼저 거룩한 질문이 요청되어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에게 세 차례나 반복하신 주님의 물음(요 21:17)이 나를 살리고, 그리고 우리 교회를 살리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를 살릴 것을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의 위기는, 한국 목회자들의 위기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물음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다만 거룩한 물음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그 거룩한 물음에 근심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거룩한 물음이 나를 일으켜 주고, 길을 돌아가게 하고, 새로운 삶을 다시 결단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를 위해 함께 청지기 직분을 맡은 여러분!
이미 여러분은 위대한 물음 속에서 출발한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기독교대한감리회의 자랑스런 목사로서, 장로로서, 희망의 청지기로서 위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희망을 설계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사랑하는가 라는 물음에서 시작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어려운 직분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는 결코 새로운 주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인류의 희망으로 역사 속에서 존재하였습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지난 선교 120년 동안 이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해왔습니다.
저는 선교 120년이 지닌 의미를 이렇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60년은 구한 말 척박한 땅에 감리교회가 복음의 뿌리를 내리고 일제 강점기 속에서 고난과 함께 교회가 성장하던 시기였습니다.
두 번째 60년은 해방과 분단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성장과 분열을 함께 겪어온 세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 번 째 60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감리교회의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지속가능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 재도약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 민족의 미래를 함께 준비하며, 평화와 통일시대를 여는 교회로서 준비해야 합니다.
작년 8월에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호남선교대회의 열기와 성취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감리교회의 저력을 발견했다고 말들 하였습니다. 다시 감리교회가 역사의 흐름 가운데 상승분위기를 탔다고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뜨겁게 기도하고 새롭게 변화해 나간다면 우리는 분명히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희망을 주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습니까? 세 가지 목표를 정하였습니다. 나날이 새로워지는 감리교회, 든든히 서 가는 감리교회, 세계로 나아가는 감리교회입니다.
먼저, 나날이 새로워지는 감리교회는 무엇입니까?
우리 감리교회가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적 각성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그러한 시점입니다. 오늘 우리는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부터, 목회자들과 평신도들 모두 영적으로 각성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 감리교회가 다시 살아나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듭남은 자기 발견과 자기 사랑은 물론 새로운 창조, 새로운 대안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로부터 우리 공동체가 더불어 깨어나고 성장하는 일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희망을 주는 하나님의 사람, 희망을 주는 교회로 새로워져 나갈 수 있습니다.
지난 선교역사를 보면 우리 감리교회는 언제나 영적 각성을 주도한 자랑스런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례로 1903년 원산에서 감리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와 기도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심령 대 부흥운동, 새벽기도운동, 백만 명 구령운동으로 이어지며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민족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일어났던 현상이며, 어느 누구도 희망을 줄 수 없었을 때 발생했던 신앙운동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영적 각성은 희망을 발견하는 안목을 제공했고, 시야를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둘째,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될 때,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몸이란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든든히 성장해 갈 때, 아름답고 희망을 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든든한 교회로 서가기 위해서는 우선 ‘양적으로 부흥과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으로 전도하고 교회부흥에 전심전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질적인 성장도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학자들은 교회가 사회적으로도 성장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회적 성장은 교회가 사회 속에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를 잘하면 교회는 사회 속에서 든든히 서가면서 사회를 변화시키는 희망의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희망이 있는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우리 감리교회는 존 웨슬리의 유산을 이어받아 영적 부흥과 사회적 성화가 잘 조화된 선교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웨슬리는 많은 평신도를 훈련시켜 복음전도자와 부흥운동의 주역이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는 데 앞장서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리교회가 영국사회를 개혁하며 든든히 서가게 하였던 것입니다.
셋째, 세계로 나아가는 감리교회가 될 때 희망을 주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웨슬리의 정신을 따라 세계적인 선교 비전을 가진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이 민족과 세계를 향해 큰 비전을 가진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세계를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감리교회는 앞으로 큰 과제가 눈앞에 놓여있습니다. 2006년 7월, 서울에서 열리는 제19차 세계감리교대회에는 전 세계에서 5000명이 넘는 감리교 지도자들과 젊은이들이 한국을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한국 감리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이 대회를 성공적으로 준비하고 개최할 때, 우리 민족 위에 화해와 평화의 전기가 마련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한국 감리교회가 21세기 세계선교를 주도하는 교회로 새롭게 거듭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대회가 의미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하시는 하나님”이란 주제가 우리 민족의 화해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전망하기 때문입니다. 질리앙 킹스턴 프로그램위원장은 주제 채택과 관련하여 “WMC에 적합하고 개최국 상황에도 합당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저는 이 대회가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위험한 분단국가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화해케 하시고, 평화로운 통일로 이루어 가시려는 놀라운 계획이 담겨있음을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화해자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책망하고 심판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부르시고, 용서하셨습니다. 당신과 화해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화해의 사절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써 화해의 직분을 맡은 사람입니다. 세계감리교대회를 통해 우리 한국감리교회는 한국교회의 뜨거운 복음열정과 함께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화해의 물꼬를 트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 일을 잘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부름받은 종으로서, 청지기 직분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청지기(Oikonomia)란 ‘어떤 집의 가사를 맡아 관리하도록 주인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종이나 삯군’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과 오늘의 교회와 이 사회와 역사까지 맡겨주셨습니다. 한스 릴제 감독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깊은 염원에 대한 응답을 주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전 생애를 어떻게 책임있게 운용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9-10)
특별히 우리는 희망의 청지기로 부름 받았습니다. 제 생각에 희망의 청지기는 세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특별한 지도력을 가져야 합니다.
최근 ‘엄마형 리더’가 각광을 받는다고 합니다. 남성적 성향을 가진 리더를 ‘상어형 리더’, 그리고 여성적 성향을 가진 리더를 ‘돌고래형 리더’라고 규정합니다. 같이 행동하기 보다는 홀로 공격하고 쟁취하는 상어가 남성적 리더십이라면,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갖고 친화력과 높은 소통능력으로 정보를 함께 나누는 돌고래는 여성형 리더십입니다.
여성 리더십의 특징은 꼼꼼함과 유연성, 그리고 서비스 정신이 바탕을 이룹니다. 앞으로 조직에서 필요한 것은 직원을 칼날처럼 짓누르거나 예리하게 재단하는 불굴의 남성적 기업가 정신이 아니라, 엄마처럼 세세하게 보살펴주는 배려의 정신일 것입니다. 친절하고, 따듯한 감성을 지닌 ‘엄마형 리더’야말로 조직의 유연성을 만들고 직원들에게 책임감을 준다고 합니다.
희망의 청지기의 지도력은 남을 다스리는 능력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심부름하는 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섬김과 봉사의 직책이라는 청기기상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바로 희망의 청지기는 섬기고, 봉사함으로써 감동을 주고, 지도자의 말이 아닌 지도자의 행동을 통해 희망을 경험하게 합니다.
둘째로 특별한 소명의식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세우셨다는 소중한 자각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합니다. 그런데 수술을 하는 이유가 꼭 못생기거나, 눈이나 코가 비뚤어진 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미국의 성형외과 의사 맥스웰 몰츠의 조사에 따르면, 성형수술을 받은 후에 환자들의 인생살이가 달라졌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혁신은 내면의 자아 이미지를 바꾸는데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셀프 이미지입니다. 즉 정신적 성형수술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자각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렘 9:26)는 말씀이나, 바울 사도의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 3:3)라는 말씀은 자신의 의식과 내면으로부터, 영적 각성을 통해 새롭게 창조해 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통해 자기 자신감, 자기 사랑함, 자기 존중감, 자기 희망을 얻음으로써 나부터 희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특별한 은총의 생활입니다.
청지기는 다만 주인의 재산과 사람을 관리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희망의 청지기는 권리보다 의무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희망의 청지기는 은총으로 사는 사람이며, 은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닙니까?
우리는 내 것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남의 물건을 빌려다가 오랫동안 쓰고 나면 내 물건인줄 착각하게 됩니다. 돌려 줄때가 되면 아쉬운 생각이 먼저 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 중에는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재산도, 건강도, 생명도 내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맡아서 관리하다 보니까 어느새 내 것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겪는 위기와 혼란의 출발점은 나 자신이 어느새 주인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위기는 먼저 부정적인 생각, 소극적인 생각,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서 비롯됩니다. 더 큰 위험은 이기주의, 탐욕, 그리고 특권적 사고입니다.
우리는 다시 희망의 청지기로서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 앞에 빈 손으로, 맨 발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희망의 청지기로써, 자기 자신으로부터 창조적인 변화를 시작해 봅시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볼 수 있으면서도 비전이 없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매일 조금씩 개선하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한일 월드컵의 영웅인 히딩크 감독도 날마다 1%씩 바꾼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향하여 거룩한 꿈을 가지고 나아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세상에 희망을 주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로의 남은 생을 살아야 합니다.
희망은 매우 종말론적인 메시지입니다. 희망은 교회가 지닌 예언자의 능력입니다. 비록 우리는 천기를 누설할만한 지혜와 능력은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맡겨주셨습니다. 모두가 절망하고 눈앞이 캄캄하다고 좌절하는 가운데 희망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용기입니다. 그래서 현재 안에 배태되어있는 미래를 보았던 예언자들은 미래에 대해 말할 때에 완료형 문장으로 썼던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역사를 보는 눈은 현실에 고정되거나, 정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현실보다 먼저 앞서 나갔습니다. 그것이 희망의 본질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제 여러분의 희망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말씀 드리십시오. 또 여러분에게 묻는 이들에게 여러분의 희망을 보여주십시오. 이제 우리는 우리 속에서 넘쳐나는 희망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사랑과 정의를 지키며, 너희 하나님에게만 희망을 두고 살아라”(호 12:6).
이제 기독교대한감리회 임원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가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를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참되고 충성된 희망의 청지기가 되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