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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교회들에게 주고싶은 은사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5-03-05 12:16
조회
1240
주고 싶은 은사
로마서 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바울이 바라는 소망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만나고자 하는 소망이었음을, 본문에서 강하게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마치 부모님들이 헤어져있는 자녀들을 보고 싶어 하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11-32절에 보면 아버지의 품을 떠나간 둘째 아들을 사모하는 아버지는 그 아들이 비록 먼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아버지에게서 상속을 받은 그 재산들을 모두 탕진하고, 돼지들 틈에서 쥐염열매로 허기를 채우려하다가, 염치는 없으나 아버지의 집으로 찾아가는 그 아들을,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는 그래도 그 아들을 그리워하며 매일 동구 밖으로 나가서 집나간 그 아들이 다시 되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비유로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아마 바울이 로마의 교회와 성도들을 보고 싶어 하는 심정은, 집을 나간 아들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심정과 같았을 것입니다.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를 생이별하고 타국에 떠나와서 사는 사람들처럼, 바울이 로마를 사모하고 성도들을 보고 싶어 했는지도 모릅니다.
바울이 그토록 사모하고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믿음 안에서 보고 싶어 하는 소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가지고 다시 아담을 찾으시고 가인을 찾으시고 죄를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고 찾는 자에게는 더 기뻐하시고 함께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 가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랑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바울도 그런 사랑의 심정으로 로마교회와 성도들을 그리워했습니다. 그 사랑은 얼마나 지극했든지, “심히 원하는”만큼 보고 싶어 했습니다.

“보기를 심히 원한다.”는 말은 열망적인 감정의 표현입니다.
보아도 좋고, 보지 않아도 좋다고 하는, 미온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보고 싶으나, 보지 못하고 있으니 애가타고 간장이 녹아내리는 듯, 한 것보다도 더한 염원입니다.

우리는 몇 년 전에 개구리를 잡으려 간다고 집을 나간, 대구성서초등학교의 5어린이들에 대한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 부모들은 아들들을 찾기 위해 현상금을 준비하고, 그도 부족해서 직장도 직업도 팽개치고, 미친 듯이 산과 들과 도시마다 울부짖으며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5어린이가 죽어서 백골이 되어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그 부모님들의 가슴이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겠습니까?
그 부모님들이 자기의 자녀들을 보고 싶어서 찾아다니는 모습들이 바로, “심히 보고 싶어”하는 모습입니다.

‘심히 보고 싶다’는 말은 보고 싶은 것, 외에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오직 보기만 애타게 사모하는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바울은, 아마 꿈속에서라도 수 없이 로마를 꿈꾸지 않았나? 하고 생각이 되어 집니다.
또 잠꼬대까지도 하지 않았나? 생각도 해 봅니다.
로마는 당시에 세계를 지배하는 수도였습니다.
그러므로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지배자가 되어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억압하고 있어서, 어떻게 보면 원수의 나라이고 지배국의 수도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로마를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으로 여겨집니다.
어떻게 자신이 증거하는 스승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로마인의 총독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받고 참혹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고 분한 원수의 나라 로마를 그렇게도 사모하였는가? 하고 생각되지만, 바울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던 예수님의 교훈을 사랑으로 실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이며 겸손함을 겸비한 사도임을 알게 합니다.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대 사도는, 특별히 로마서를 장문으로 기록하면서까지, 로마를 사모하는 열망을 수 없이 되 뇌였던 것입니다.

로마는 팔레스타인 땅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정치적으로 누르고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있었으나, 원수를 갚는 것은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고, 사랑으로 모범을 보여주어서 로마를 복음화 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바울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한국인들과 흑인들 간의 갈등은 심각하게 벌어져 왔습니다.
흑인들은 공공연하게 한국인들을 괴롭히며 물건들을 훔쳐갔습니다.
그 때문에 한국인들과의 마찰이 일어나고 폭력으로 까지 번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흑인 가수는 한국인에 대하여서는 약탈과 살인까지도 부추기는 노래를 부르고 음반까지 내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들에게 “이는 이로” 갚지를 않았고, 흑인들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노래와 음반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업을 맡은 사람이 바로 한국인의 목사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정신이고 바울의 정신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본적도 없고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만나본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보혈로 한 형제가 된 성도들은, 모두 다 한 형제들이요, 모두 다 한 가족들임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사랑은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심령으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사랑의 심령으로 보고 싶어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이처럼 로마를 가보고 싶어 하였을까요?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야심에서 로마를 가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명예를 구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바울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존경받는 가말리엘 선생에게서 배웠습니다(행 5:34).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행 16:37).
권력과 명예를 소유했으나, 지금은 단호하게 모두다 배설물처럼 아낌없이 버렸습니다(빌 3:8).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행 22:3)고 자신의 이력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십자가 밑에서 죽이고, 예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명예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것도 아니며, 명예를 위하는 삶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격적인 존경을 받기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이였습니다.
걸어보지도 못한 어떤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어가게 하였더니,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우상처럼 떠받들며 바나바는 쓰스(제우스)라고 하고 바울은 말하는 허메라고 하며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며, “우리는 신이 아니라,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다”고 하며 외쳤습니다(행 14:8-15).
바울은 결코 사람들에게 경배나 존경을 받으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이비종교의 지도자들 중엔, 자신들이 마치 신이나 되는 것처럼 경배 받으려하고 존경받으려하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돈을 벌기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높은 지식을 터득한 사람으로서 얼마든지 사람들로부터 대우를 받으며 랍비노릇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비량으로 천막을 만들며, 복음을 증거하는 데에만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바울이 로마를 관광하려는 목적도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세계의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였고, 지금도 가보고 싶어 하는 세계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관광이나 하면서 한가하게 다니고자 하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가지고 살지를 않았습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외치고자하는 것이, 그의 사도직으로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갚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나는 복음의 빚진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복음의 빚을 갚는 길은, 어떻게 하던지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고, 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귀의 시키려고 하는 일이 그의 목적이요 염원이요 전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로마를 그렇게도 가려고 애쓰고 사모하였습니까?
무슨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고 싶어서 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교회를 위해서 준비한 최상 최대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은 재주가 많아도 모방 할 수도 없고, 지혜나 지식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으로서도 도저히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선물은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주고 싶다고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육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계산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롬 6:23), 그저 얻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약 1:17).
은사는 맛을 본 사람만이 은사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히 6:4).
은사는 여러 가지로 역사하며(고전 12:4), 성부(렘 31:12, 롬 6:23, 11:29), 성자(롬 6:23), 성령(고전 12:9),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은사는 기도로 얻으며(고후 1:11), 사모해야하며(고전 12:31),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합니다(벧전 4:10).

은사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임하시는데,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 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고전 12:8-11)고 하신 것을 보면, 사람마다 다르게 은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은사를 받았는데도 묻어두고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더러는 은사에 무감각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하여 더욱 은사가 불 일듯 하게 일어나 더 많은 일을 하게 하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로마에 가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각종 은사를 나누어 주고 싶은 것이 바울의 꿈이고 바람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나누어 주고 싶어 하는 은사들은, 그 어떤 선물들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어느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고, 살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 어느 방법으로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은사를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더 많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으며, 더 영광스럽고 거룩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으며, 더 은혜롭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주님의 사도들이나 초대교회의 집사들은 각기 능력과 은사에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에 가서 교인들에게 은사를 나누어줄 때, 바울 자신도 어떻게 은사를 나누어질 것인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능력과 믿음에 따라서 주의 성령이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은사를 나누어 주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 가운데, 믿음으로 강건하게 되어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실정으로 보아서, 기독교는 여러 종류의 박해자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믿음이 약해져서 낙심하고 타락할 까봐 바울은 염려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이 되어 집니다.
무엇보다도 바울 자신이 과거에 기독교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견고케 한다.”고 하는 말은, “고정한다.”(눅 16:26). “튼튼한 기초위에 세운다.”(눅 9:51)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골고다에 십자가가 튼튼히 서있기에, 사탄 마귀의 계교는 무너졌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튼튼히 서있기에, 인류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독 생 성자의 희생으로 흘리신 보혈과 굳게 서있는 십자가의 흔적을 보시고, 인류에게 심판을 거두어주신 것입니다.
골고다 산상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아무도 위로하지 아니하고 비난과 조롱과 멸시함으로 괴롭히는 무리들뿐이었습니다.
어떤 자는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너를 믿겠다.”고 비웃었고, 어떤 자는 “엘리야가 와서 도와줄 껄”하고 비웃었고, 또 어떤 자는 예수님의 벗어놓은 옷들을 나누어 가졌으며, 그도 모자라서 더 가지려고 고통으로 죽어가는 십자가 아래에서, 주사위를 던지며 도박을 하였습니다.

지금 로마교회는 원수들과 핍박 자들과 조롱하고 비웃는 무리들에게 우겨 쌓여 있는 것입니다.
문명의 대도시에서, 수많은 불신자들에게 둘려 쌓여 강렬한 유혹의 바람에 시달린 채, 신앙의 고전을 당하고 있습니다.
만약 로마교회가 믿음으로 굳건히 서있지 않으면, 믿음을 지탱하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허다한 무리들이 로마교회를 핍박하고 조롱하고 멸시하여, 믿음을 지탱하지 못하게 할까봐, 바울은 속히 로마로 찾아가 성도들을 만나고 은사를 나누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예수님을 멸시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사탄 마귀는, 로마교회라고 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 마귀는 언제 어디서나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포효하듯이 지금도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 있지 않으면, 작은 시험과 작은 환란에도 넘어지고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견고하게 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은 열심히 모이고, 모여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자라고 견고하게 서있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진리는 신자들을 거룩하고 견고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요 17:17).

지금 로마에는, 교회를 제대로 이끌어 갈만한 선생도 지도자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베드로도 로마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로마를 방문해야 할 책임은 더욱 큰 것입니다.
아직은 로마교회는 잎만 무성하였지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나무에 잎은 무성하여도 뿌리가 없으면 제대로 자라거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폭풍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올라가면 뿌리내리는 신앙, 견고한 믿음으로 가꾸어 주어야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태풍이 몰려와도 넘어지지 않고, 굳건하게 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전체 1

  • 2015-03-08 00:22

    바울님 저에겐 은사주지 마시고 다른 이들에게 마니 주셔요.
    남으면 혹 째끔 주시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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