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3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6-08-28 19:47
조회
1370
최세창:풍성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객원 교수. 저서:신약 27권 주석 외 다수. 426-3051)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2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2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3 강>>

제2부 내용 분해


준비 기간
(1:1-13)


본서의 첫 부분은 예수님의 선교 활동을 위한 준비 기간에 대한 기록이다. 이 첫 부분은 표제(1:1)와 세례 요한의 선교(1:2-8)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1:9-11)과 시험을 받으신 예수님(1:12-13 )으로 구성되어 있다.

1. 표제[1:1]

네 복음서들, 특히 공관복음서는 비슷한 점들이 많지만, 각각 다른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가계, 잉태, 탄생, 이름지은 것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누가복음은 말씀의 목격자요 일꾼들이 전한 내용을 그대로 저술하려 한 이들이 많다는 점과 데오빌로 각하에 대한 헌정적 소개를 한 다음에 세례 요한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말씀’이 이미 태초 곧 영원부터 존재하셨으며, 또한 인간과 같이 되셨다는 암시로 시작하였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인 세례 요한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활동적이며, 정력적이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투쟁하고, 정복하시는 사랑의 왕으로 묘사하는 마가다운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왕의 행차에는 사자가 앞서서 길을 예비하고, 또 왕의 오심이나 도착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이 왕 중 왕이신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 것은 이상스러울 것이 없다.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 【1】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라는 표제를 붙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אa, B, D, L, W 사본 등에는 υἱού θεού로 되어 있고 ; A, E, F, G, H, K, M, Δ, Π, ƒ1, ƒ13, 33, 565, 700, 892, 1009, 1010, 1071, 1079 사본 등에는 υἱού τού θεού로 되어 있고 ; 1241 사본에는 υἱού τού κυρίου로 되어 있으나, א*, Θ, 28c, 255 사본 등에는 없다.

이 어구가 없는 사본의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은, 그 이유로 비신학적이며 전기에만 충실한 마가가 처음부터 신학적 어구를 쓰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원문의 무게나 본서 전체에 흐르는 사상으로 보아 이 어구가 참된 것으로 본다. 이는 본서가 단순히 저자의 사상이라기보다는 초대 교회의 주된 신앙 및 신학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아닌게아니라, 이 호칭은 신약성경에 풍부하게 사용되고 있다(마 4:3, 6, 8:29, 16:16, 눅 1:35, 22:70, 요 10:36, 20:31, 행 8:37, 롬 1:4, 고후 1:19, 갈 2:20, 엡 4:13, 요일 3:8, 히 4:14, 계 2:18). 또한, “본서의 베드로 의거설을 생각하면, 이 어구는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 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E. P. G-  ould).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천사(욥 1:6, 2:6), 왕(삼하 7:14), 방백(시 82:6), 이스라엘 백성(출 4:22), 모든 사람(마 5:45, 엡 3:15, 눅 3: 37), 기독교인(요 1:12, 롬 8:15) 등을 가리키는 용어이었다.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이란 영화된 은유나, 죽을 운명인 인간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 기원”(A. Clarke) 또는 “예수님의 신성”(R. Earle)을 강조하는 것이다. 존슨(S. E. Johnson)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또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모든 복음서들이 유대 문학과 대조적으로 메시아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라고 하였다.

메시아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란 “여기서는 메시아 왕국이 신정국( theocracy)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실제적인 통치자이시고, 메시아적 왕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다”(E. P. Gould). 바울 역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 :13-14)라고 하였다.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성부와 성도의 관계에 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유일한 아들로서 신적 본질을 공유하는 이시다. 이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라는 견해와 같으며, 또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이다.](엡 1:3의 주석)라고 하였다.
결국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나 속성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부터 아들로서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다.

[포시트(P. T. Forsyth)는 “하나님은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만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독생자만 있으시고, 많은 자녀들은 유일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이다.”라고 하였다.](요일 1:2의 주석).

예수(Ἰησού)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와전이다. 이는 우리 주님의 이름이다(막 1:1, 눅 1:31, 요 1:17). 구약 시대에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은 모세의 후계자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인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쟁을 수행한 여호수아,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삼상 6:14, 18), 포로 귀환 후의 대제사장 여호수아(학 1:1, 12, 슥 3:1, 3, 4), 그리고 요시야 왕 때의 부윤이던 여호수아(왕하 23:8) 등이 있다.

그리스도(Χριστού)는 [크리스마(χρίσμα : ‘기름 부음’<요일 2:20, 27>)의 파생어로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뜻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 여기에 해당되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 세 직능의 완성자로서의 예수님을 지시한다.
대체로 예수는 그분의 인성을, 그리스도는 그분의 신성을 나타내곤 하였다. 리츠만(Lietzmann)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합된 칭호와 바울의 관계에 대해 “의식문적 문서들 속에 자주 나타나는 이 결합된 칭호가 확증해 주듯이, 이것은 원래의 메시아적 의미를 상기시켜 주는데, 설령 바울이 그런 의미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미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라고 하였다.](롬 1:1의 주석). 이러한 사실은 마가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복음은 유앙겔리우(εὐαγγελίου)이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에게 준 보상(Homer, W. Hendriksen, 마경일)과 전쟁에서의 좋은 소식( E. Schweizer)을 뜻하였고, 여기서 왕자의 출생이나 황제의 즉위의 고지 등을 의미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의 경우에는 하나님에게서 파견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시된 인류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에는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구원뿐만 아니라, 그분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1:15)도 포함되는 것이다.

특히,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죄와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철학 체계, 인간이 만든 어떤 종교, 그리고 어떤 생활 양식의 형태에 대한 훌륭한 충고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C. R. Erdman)](갈 1: 6의 주석).
[휴스(P. E. Hughes)는 “구약성경의 약속과 신약성경의 ‘복음’ 사이에는 참된 동질성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본질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를 내다보고 있었고, 후자는 약속된 것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성을 선포하고 있다.”라고 하였다](히 4:2의 주석).

시작은 아르케(ἀρχή)이며, [시간이나 공간 또는 연속의 ‘처음’, ‘통치’, ‘탁월’, ‘수위’(首位), ‘주권’ 등을 뜻한다(요 1:1, 벧후 3:4, 계 3:14, 21:6, 22:13). 특히, 이 낱말은 “기원의 능력이라는 점에서 ‘처음’을 의미한다. 즉, 무엇인가가 발생하는 근원이고,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을 의미하는 것이다”(W. Barclay).](골 1:18의 주석).
여기서는 복음서를 쓰기 시작하는 것이나 세례 요한의 선교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본서의 표제의 구성 부분으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사실의 시작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Vuncent). 물론, 이 시작은 역사 내의 그리스도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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