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12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6-09-25 10:46
조회
1262
최세창: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객원 교수. 저서:신약 27권 주석 외 다수. 426-3051)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2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2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12 강>>

다. 각색 병자 고침과 귀신 쫓음<1:32-34>
    <비교 : 마 8:16-17, 눅 4:40-41>

山口 昇은 “이 부분을 불트만 등은(다가와) 마가에 의한 정리구(편집구)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데라나 크란필드는 베드로에 근거한 기사라고 해석하고 있다.”라고 소개하면서, 그 자신은 “저물어 해질 때에”라고 한 시간적 요소와 “문 앞에”라고 한 장소적 요소가 앞의 기사와 결부된다는 점을 들어 베드로에 근거한 것으로 해석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34절 후반이 편집구라는 데에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J. Gnilka, p. 107).
아무튼, 현 상태에서 이 기사의 전승 부분과 편집구 부분을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그러므로 그란트(F. C. Grant)가 “의심할 여지없이 전승에 근거했지만, 이 부분은 마가 자신의 양식으로 편집한 요약이다.”라고 한 설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무난하다.

마가는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일에 이어 군중을 고치신 일을 기록하고 있다. 루콕(H. E. Luccock)은 “이 부분은 복음서에서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마가는 이 부분을 【32】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로 시작한다.
유대인들은 우리와 달리, 해 질 때부터 그 다음 날 해질 때까지를 하루로 치므로, 저물어 해 질 때에는 안식일(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이 끝난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안식일이 끝난 후에 치료받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므로, 이 때를 기다려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1:23의 주석을 보라.)들을 예수께 데려온 것이다. “데려오니(에페론, ἔφερον)는 앞의 모든(판타스, πάντας)과 뒤에 나오는 ‘많은’(πολλοὺς)과 함께 마가의 애용어이다”(Gaston).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일반 병자와 귀신 들린 자가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다는 점이다(J. N. Davies, H. Alford, C. E. G. Swift). 이 두 부류의 사람들과 그들을 예수께 데려온 사람들은, “예수님의 존엄성과 기능을 인식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적을 행하는 자가 그들 중에 있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에 온 것이다. 예수께서는 회개와 천국이 가까웠음을 설교하러 오셨으나, 사람들은 다만 고통과 고난으로부터의 구조만을 생각하였다”(W. L. Lane). 여기에 메시아의 인간적 고독이 있다. 그야말로 군중 속의 고독이다.
아무튼, 우리는 문제를 가진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해야만 한다. 실상,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다. 있다면, 다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모두가 다 예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것보다 더 큰 도움은 없는 것이다. 직접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사랑의 중개인 역할을 해야 한다.

마가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33】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라고 하였다.
원문의 첫머리에는 “그리고”(카이, καὶ)가 있어 앞의 문장과 구분을 짓고 있다.
온 동네가는 과장법이고, 문 앞에는 베드로의 집 문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 과장법은 예수님의 인기가 대단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가는 그 결과에 대해, 【34】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마가복음의 특징인 ‘메시아 비밀’에 속하는 것이다(1:43-44, 3:11-12, 5:43, 7:36, 8:30). “본절의 많은과 32절의 ‘모든’은 대조적인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8:16에는 그 두 낱말이 바뀌어 있다”(A. E. Sanner).
예수님의 병 고침과 축귀의 신적 사랑과 능력은 수의 다소가 문제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존재하시는 한 인생에 절망이란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이 역사하신 방법에 대해, 누가는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눅 4:40)라고 하였고, 마태는 “말씀으로”(마 8:16)라고 하였다.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은지, 또 두 가지 방법을 다 사용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이 모든 고난이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건지신다는 점이다. 비록 그들의 믿음이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신뢰하여 온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시지 않는다.
예수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신 까닭은 다음과 같다.
① 불결하고 불경한 것들의 증거를 받으려고 하시지 않았다(F. C. Grant). ② 비자발적이며 절대적 사실에 대한 내키지 않는 인식이고, 도덕적‧영적 변화를 일으키는 발견이 아니었다(R. A. Cole). ③ 예수님의 비밀은 실제로 십자가에서만 명백해질 것이며, 따라서 사람이 실제로 그것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로 예수님을 따라가야만 하므로 아직은 선포를 위한 시간이 아니다(E. Schweizer). ④ 치유와 축귀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이고, 복음 선포가 근본적인 것이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단순한 이적 행위자로 알려지시는 것을 심히 꺼리셨다. 이 점은 귀신들이 쫓겨나는 마당에 굳이 예수님의 정체를 공개하려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참조 : 9:9의 주석을 보라).
예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에 의한 인간의 메시아 고백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예수께 인도한 사람들 중에 몇이나 영혼 구원을 얻었는지 심히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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