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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기록

작성자
이주익
작성일
2019-02-22 16:52
조회
1746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기록

1919년(기미년) 1월 중 나는 의주읍 장로교회 초청을 받아 10일간 부흥회, 사경회, 새벽기도회 등을 인도하여 사랑과 은혜를 많이 받고, 하루는 교우 중 장병일과 길동무를 삼아 통군정에 오르니 천지장강이 앞에 누어 있고 임진왜란 시 고적이 완연한지라. 자연 사정이 감발하여 칠절일수로 창하였다. 주일예배 시에 교우급 주교학생 천 여인이 교기, 반기 등을 나열하고 시가에 나가서 시위행렬을 시행하였으니 이것이 곧 독립운동 행렬의 효시라 할 수 있었다. 의주읍 집회를 마치고 귀경하니 때는 2월 초이오, 태황제께서 승하하신 후 십 수일이 지났더라. 시내에는 국장 준비로 어수선하였다.

2월 19일, 나는 종로 청년회관 내 기독신보사를 방문하고 주필 김필수 목사와 작반(作伴)하여 남문 밖 제중원 약방 주임 이갑성 사저에 나가본즉 이곳에 회합한 인사들은 김필수,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기선, 박희도, 현순 등이었고, 모임 신간은 오후 2시경이었다.

이날 토의의 주제는 독립운동이었다. 해외에서의 중대한 소식을 종합하면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이광수, 최팔용 등이 유학생을 중심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며, 미주에서는 이승만을 파리에 파송하여 평화회의에 조선 독립을 요구하였다 하며,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유(波遺)하는 등 해외에서 운동을 선행하였으니 국내에서는 거국일치로 운동을 필행하여야 될 것이라 하고 심야까지 토의하였다. 김필수는 토의 중에 귀가하고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기선, 박희도, 현순 등 7인은 이 자리에서 기독교회를 대표하여 간부를 조직하고 천도교회와 합동하여 운동하기로 결의하였다.

다음 날(20일) 밤, 이승훈, 현순 양인은 탐정의 주목을 피하여가며 제동 최린을 방문하여 운동계획을 말하니 최 씨 왈 “손병희 선생님은 결심이 확고하니 우리는 단행할 뿐이라”하였다. 이· 현 양인은 귀래(歸來)하여 간부에 보고하니 이어진 간부회의에서는 태황제 국장일을 임박하여 거사하기로 하고 서무, 외교, 통신, 회계의 3부를 분담하여 담임하니 서무에 이승훈, 함태영, 오기선, 외교 통신에 현순, 안세환, 이갑성, 회계에 박희도이었다.

국내의 운동을 해외 동포와 열강에 선포하여 세계 여론을 일으키게 할 필요를 절감한 부원들은 이날 외교 통신원 1인을 상해로 파유(波遺)하여 파리 평화회의와 미국 동포들에게 통고하며 외양 형세를 살피어 국내로 통신하는 사명을 주지함을 결의하고 이 일을 나에게 맡기기로 결의했다.

2월 22일, 밤에 이· 현 양인이 최린의 집에 다시 가서 상기 사항을 상의하니 최 씨가 극히 찬성하고 천도교 측의 경비 2천 원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날 본인(현순)과 최린 간의 밀약은 봉천 해천 양행을 찾아가서 최창식(云丁)을 만나 동행하되 상해로 잠입한 김철에게 운동 금 1만 원을 주었으니 사세를 따라 쓰라고 하고 통신상 암호는 霖자로 정하였다.

다음 날(23일), 이승훈이 천도교 본부로 금 이천 원을 지래(持來)하여 1천 원을 기독교 측 간부에게, 1천 원은 나에게 여비로 지급했다.

2월 24일, 밤에 나는 가족에게만 고별하고 용산역에서 남만주행 열차를 타고 출발할 때 박희도가 전송하면서 자기의 금시계를 신표로 나에게 주었다.

2월 25일, 아침 신의주에 도착하여 그곳 장로교회 장정노 목사를 방문하고 노정의 뜻을 대강 말한 후 휴대금은 미곡상을 하는 동포에게 주어 단동 역으로 선도하게 하고 나는 장 목사와 동반하여 평산 의원 신의사를 방문, 접대를 받고 이날 밤 봉천행 차를 타고 출발하여 26일 아침 봉천역에 도착하였다. 십간 방에 있는 해천 양행을 찾아드니 양행주 이해천의 환대를 받고 뒷방에서 종일 잠복하였으나 최창식이 야심에 래(來)하여 최 군은 내일 아침에 출발하기로 하고 나는 다음날 출발, 다음날 오후 천진에 도착하여 영국인이 경영하는 애스터 호텔에 투숙하고 숙박부에 하균(河均), 영어로는 David Hah라 하였다.

2월 27일, 오후 최창식이 도착함에 이날 밤 천진을 출발하여 28일 포구에 도착, 양자강을 건너 남경에 도착, 다시 출발하여 다음 날 오후 7시경에 상해 북첨에 도착하니 이날이 3월 1일 이였다. 이날 상해의 기후는 음랭하고 봄비가 내려 버들잎이 초생 하였다. 장로교 휘치(Fitch) 선교사를 찾아가 만나니 그의 안내로 맨 먼저 선우혁을 만나 삼마로에서 투숙했고 다음 날 남경로 대동여관에 이숙했다.

3월 2일 밤, 모주 채관에서 신규식, 이광수, 선우혁, 김철, 신현민 등이 회집하여 본인과 최창식을 접대하고 이곳에 온 목적을 물으매 나는 국내 독립당을 대표하여 상해에서 외교, 선전, 통신 등을 진행하고자 왔다고 말했다. 최창식은 최남선의 저작인 독립선언서를 국산지에 세서하여 흉중에 품고 온 것을 보였으며 그리고 국내에서 전보 오기만을 고대하였다.

3월 4일 아침에, 연합통신으로 영문 대륙보(The China Press)에 3.1 운동의 대거가 등재되어 당일 상해 인사들을 소집, 협의한 후 임시사무소를 불란서 조계지 하비로(霞飛路)에 설치하고 본인(현순)이 총무가 되고 통신 서기에 이광수, 여운형, 서무에 신규식, 신헌민, 재무에 김철, 선우혁이 담당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최 우선의 일로 국내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을 영문장전(長電)으로 파리 평화회의 프랑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중국 등 6개국 대표에게 발송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민회와 연해주 국민회에 전보했고, 조동호는 한문으로 현순과 이광수는 영문으로 독립선언서를 번역하여 한·영문 신문사에 발표했다. 신헌민의 소개로 손문의 기관지 상해 잡지 주임 장경자를 만난즉 영국기자 1인을 국내에 파유(波遺)하여 운동정형(運動情形)을 세밀히 탐색하여 오도록 권고하기로 했다.

3월 8일, 나와 최창식이 장경자와 북경으로 가 북경반점에 투숙하여 중국인 혁명가 여럿을 만나 동아의 정세와 한족의 독립운동을 논했고, 장경자가 소개한 영국인 기자 게일(William R. Giles)을 만나 국내에 파유(波遺)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김규식을 파리에 파유(波遺)할 시에 많은 도움을 준 영국인 저술가 심슨(Lener B. Simson)을 방문하고 대한의 독립운동 정형(情形)을 말하였더니, 그가 국제 기자단에 소개함으로 중 외기자 수십 인을 회견하고 일본의 한국 통치에 따른 해독과 거국일치로 발생한 독립운동의 진 의미를 해설하여 각국 신문에 크게 선포되었다.

당시에, 손정도는 북경에 먼저 와 합달문(哈達門) 내 감리교 가영병원에 투숙하고 하란사 여사도 내숙 중에 우연히 유행성 감위(感胃)에 걸려 고통 하다가 불행, 병사하매 경성에서 남편 하상기가 래(來)하여 화인(華人) 예배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하고 북경성 외에 안장하였다.

그 후, 본인 또한 합달문 내 병원에 유숙하며 외교를 진행하였는데 최창식(云丁)도 동숙하고 손정도는 입정(立丁)으로 나는 석정(石丁)으로 작호하였다.

원장 홉킨스 박사의 친절한 대우를 받았으며 북경 기독교 청년회를 방문하고 미국인 총무인 R. R. Dailey, 중국인 장용지를 접견하고 델리 총무의 안내로 미국 공사관을 방문, 일등 비서관 텐니를 만나 우리 운동의 정세와 방략을 말하고 협조를 청하니, 텐니 씨는 공식적으로는 협조할 수 없으나 이면으로는 얼마든지 협조하겠다고 하면서 Y.M.C.A. 데일리 총무에게 지휘하여 상해의 유력 인사들에게 소개장을 만들어 주었으니, 상해 총영사 커닝햄, 중국 Y.M.C.A. 서일장 총무 등이었다. 이곳에서 최창식은 국내로 다시 가서 운동을 지휘하며 재정을 모집하여 오기로 하고 귀국했고 나와 손정도, 장경자 등은 동반하여 상해로 회정했다.

3월 26일, 상해에 도착, 김신부로(金神父路) 프랑스인 집에 투숙하니 김철균이 와 고하기를 많은 동지들이 북경을 거쳐 이곳에 와, 최고 기관을 조직하려하니 주의하라 하였다.

다음 날(3월 27일) 밤, 법계 보창로(法界 寶昌路) 모처에서 각방 인사들이 회집하니 연해주 이동녕, 만주 이회영, 이시영, 북경에서 이광, 조성환, 조용은 이더라. 상해 인사들과 합석하여 최고 기관 조직 안을 토의할 때 조소앙(용은)이 열변을 토하여 이 안을 토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나는 임시의장으로 선택되어 회의를 조종한 결과 국내 운동을 응원하는 재외기관 설치 안이 통과되어 연구위원 8인을 선정하니 위원은 이동녕, 이시영, 조소앙, 이광, 조성환, 신헌민, 이광수, 현순 등이었다.

상기 위원 등이 수차 회합하여 상의하였으나 결과가 없었다. 그 후 만주에서 신채호, 경성에서 신익희, 이봉수, 고한, 임득산이 상해로 왔는데 임득산은 평북 철산 사람이며 순실 용맹한 의남아로 나의 통신을 수차 전달하였고, 접제금(接濟金)도 가져다주고 임시정부 조직 후에는 모금에 열성을 다했다. 이봉수는, 천도교 측 청년으로 국내외로 출몰하여 정부조직에 노력했던바 손병희로 대통령, 박영효로 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로 선거할 뜻을 비전(秘傳)하였다. 신익희는, 기호인(畿湖人)들과 연합하여 암중비약(暗中飛躍)을 시도하였으니 신헌민, 이시영, 이동녕, 신규식과 교류하여 무슨 결탁을 하였는지 하루는 나의 숙소에 와서 국내 인사들의 근황을 전하며 국외 유수 인물들을 망라하여 정부를 조직하라는 사명을 대래(帶來)하였다 전했다.

4월 초에,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신헌민, 신규식, 신익희, 신채호, 조성환, 조소항, 이광수, 이광, 현순 등이 남경로 선시공사(先施公司) 여관에 회합하여 임시정부 조직 안을 토의하였으나 논조가 일치하지 못하여 산회하였다. 제2차로 법계 보창로(法界 寶昌路) 모처로 이상의 인사 외에 다수 청년과 협동하여 우선 임시 의정원을 조직하니 원장에는 이동녕이 당선됐고 임시정부는 통령제를 피하고 총리제로 채용하기로 했다.

4월 11일, 제3차로 이날은 법계(法界) 김신부로 부근 일대양옥(一大洋屋)을 세(貰)로 얻어 임시 의정원을 개원했다. 이날 현안인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 청년들이 권총과 목봉들을 가지고 와서 일방은 회중을 보호하고 일방은 회중을 위협하여 공정한 조직을 최(催)한 것과 신채호가 총리로 추천된 인사 중 이승만, 박영효, 이상재 등을 반대하고 박용만을 추천하니 청년 중 현창운이 신채호를 빗대어 추천하매 회중이 대소(大笑)하자 신 씨가 분노하여 퇴장하였다.

신 씨가, 이승만을 반대하며 박용만을 추천한 것은 박용만이 김규식에게 이승만이 위임통치를 미국 정부에 청원하였다고 전보한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당시 형세는 내, 외지를 막론하고 인심의 취향이 이승만에게 폭주하였던 고로 결국에는 임시정부를 조직하니 그 각원은 다음과 같다.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최고의원 이동녕, 이시영, 현순, 손정도, 신채호, 신헌민, 신익희, 이광수, 이광, 조성환, 조동호, 백남칠, 김철, 조소항, 최근우, 한우근, 현창인 등이 기억에 남아있다.

4월 12일, 임시헌장 10조와 임시정부 조직 선포문을 국내에 보내 선포하게 했고 차장을 선임하여 정무를 집행하게 하니 외차 현순, 내차 신익희, 법차 이광수, 재차 선우혁, 군차 조성환, 교차 김철 등이더라. 나는, 외차의 직임 유무를 막론하고 실무에만 주력하여 상해의 중국인 서일장, 당소휘, 미국인 마티넥 대위(해군출장 소장) 등을 방문 법계 요처의 안전책을 논의하는 한편 불란서 변호사에게 매주 금 600 데일을 주고 불란서 영사와 연결을 지어 적의 암행을 예통(豫通)케 하였고 상해 영자 신문에 반월(半月) 3백 원을 주고 선전을 시작하였는데 나의 “대한독립운동의 전말”이 영문 장논문(長論文)으로 등재하였다. 또한 국내에 파귀한 게일 씨에게서 온 적의 폭행 사진들을 수집하여 발간, 선포하였다.

4월 하순에, 한남수, 이규갑, 홍진 등이 국내에서 래(來)하여 한성국민대표회(漢城國民代表會)에서 조직한 정부를 선포하니 총재에 이승만을 추대한 소위 한성계통의 정부였다. 상해 인사들과 연석하여 수차 회합, 한성 정부는 물시(勿施)하고 임시정부를 그대로 추대하여 내외 시정에만 노력하기로 하였다.

5월 초에, 안창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홍콩에 도착하여 상해로의 안전도를 조성환에게 전문한바 조 씨는 북경으로 회정하며 이 일을 나에게 위탁하매 홍콩으로 가 4일간 안 씨를 탐문하다가 우연히 한 여관에서 만나니 동행인은 정인과 황진남이었다. 수일간 민족 사업을 토론하며 4인이 작반하여 홍콩에서 미국 선편으로 무사히 상해에 도착했다. 나의 부재중에 상해에서는 일대 소란이 있었으니, 적 경찰이 불란서 영사의 허가를 득하여 불란서 조계지내 임정 거주 역에 돌입하여 신헌민을 체포하여 경성으로 호송했고, 이동녕, 이회영, 이시영, 이광 등은 북경으로 도피하였더라. 안창호와 나는 김창세 의사가 근무하는 병원에 투숙하였다.

6월 중, 상해에는 경남에서 윤현진, 함북에서 이춘숙, 해주에서 김구, 의주에서 이유필, 노령에서 원세훈, 경성에서 남형우가 왔으며 7월 중에는 경성에서 최창식이 와서 나의 숙소에서 함께 지냈다. 상해에 온 안창호는 각방 인사들을 망라하여 정국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고 기개(幾個) 인사들이 안씨를 추대하고 빈약중(貧弱中)에 정국의 현상을 유지하였으니 그 인사들은 양준명, 이유필, 김구, 서병호, 김홍서, 이광수 등이요, 외교는 정인과 황진남으로 신문 선전만 계속할 뿐이었다. 당시에, 재미 이승만은 상해계통인 임시정부 총리의 직을 수락 선포하고 차제에는 한성계통 정부의 총재직도 수락하여 선포하는 한편 상해 정부에 총리를 대통령으로 게제하여 달라고 하였으며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 국민회를 지휘하며 애국금(愛國金)을 모집하게 하였는데 이승만은 워싱톤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공채금(公債金) 모집을 결정한 후 임시정부에 애국금을 변경하여 공채금으로 개정하라고 하였다.

안창호는, 이런 복잡한 시국에 임하여 정서를 정돈하며 시정을 일층 새롭게 하기로 결심하고 총리를 대리하여 차장을, 선발 총장을 대리케 할새 상해 유력 인사들에게 출각(出閣)을 간청하였다. 나의 숙소에도 수차 내방하여 내무차장의 임을 부탁하였으나 고사하던 중 최창식이 내각 서기 장관을 임했고 내각 형성이 안 됨으로 정국이 혼란하매 내차 출마를 허락했다. 그리하여 여섯 차장의 서임이 선포되었으니 내차 현순, 외차 여운형, 법차 신익희, 재차 윤현진, 군차 이춘숙, 교차 김철, 내각 서기관장은 최창식이었다.

정부청사는, 불란서 조계지 하비로에 설립하고 부서를 배정하니 하층 전면 우방에는 내부와 교통부를 두고 좌방은 재무부가 전용했고 후면 우방은 접대실로 하고 상층 대방은 총리실이요, 전방은 법무와 서기 장관이 병용하며 후방은 외부와 군부가 병용하고 장랑일좌에는 김구의 지휘하에 있는 경호원 20명이 정복으로 근무하며 정청 정문에는 인도인 순경으로 수직하게 하였다. 매일 출근은, 오전 9시로 오후 4시까지 근무하고 매일 아침 출근 시에는 정부 직원들이 집합실에 회집하여 무궁화가 1절을 제창하고 총리의 교시가 있은후 각 부로 시무했다.

대리 총리 안창호가 제1회 각의를 소지하고 의안을 제출하니,
1. 총리 이승만이 총리를 대통령으로 게재하여 달라 함이요.
2. 총리 이승만이 애국금을 폐지하고 공채금만을 인준해 달라 함이요.
3. 상해 정부를 한성 정부로 개조하고 이동휘를 영래(迎來)하자 함이었다.
이상 3건을 토의, 결정한 후 임시 의정원에 제출하여 의결하게 하기로 하고 아령(俄領)에 대표를 파견, 이동휘를 영입하기로 결단하였는데 정부 측 대표로 현순, 김용겸을 특파하되 아령(俄領) 인사 원세훈과 동반하여 등정하게 하였다.

8월 중순경, 현순, 김용겸, 원세훈 등 3인은 상해에서 영국 선박으로 출항하나 영구(營口)에 도착하니 한인 정탐인 하나가 미행한바 공책을 세워 내일 아침에 출발하겠다고 광고하고 밤중에 잠출(潛出)하여 대석교에서 출차하여 다음 날 아침 봉천, 빈강(濱江)을 거쳐 8월 30일 해삼위(海參威)에 도착하여 신한촌(新韓村)을 방문하고 이동휘를 상봉하매 망국 한에 부둥켜안고 낙누(落淚)하였다.

이참에 온 뜻을 고하니 이씨가 목연응락(牧然應諾)하였다. 다음날 아령(俄領) 인사들이 요리점에 회합하여 정부 특파원 현·김 양인을 초대하였다. 이 자리에서 나는 상해에서 조직된 정부는 적법적이 못 된 것을 느끼어 이제로는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정부를 봉재(奉載)하기로 본 정부 제작은 결심하였으니 이동휘 씨는 급속히 상해로가 총리의 직에 취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이날 회합한 인사들은 다 가합(可合)하게 들었다. 직후 상해로의 귀환 안전로를 찾은즉 미 군함에 가서 해군 대위 마틴낵 씨를 예방하고 해삼위에 온 뜻과 우리 정부의 중요 인물을 안전하게 상해로 귀환하게 할 터인데 만주에서 적 경비가 엄밀하여 통과하기 어려우니 미 군함에 승선하여 해로로 돌아가게 도와줄 수 있는가 하니 그가 나를 대동하여 사령관 아이철벅 대령에게 소개하였다. 사령관의 주선으로 러시아 선에 자리를 얻어 이동휘, 김립, 남공선, 현순 4인이 한방에 합석, 극비리에 출항 9월 하순에 상해에 안착했다.

상해 인사들은 이동휘를 열광적으로 환영하고 속히 국무총리에 취임키를 바랐으나 이시는 내심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며칠 후 승인개조(承認改造)란 언서를 제기하며 취임을 고사하였다. 열광 중에 있던 상해 인심이 크게 격동되니 이씨가 요청하기를 각원 중 신규식, 이동녕, 이시영 등을 다시 청래(請來)하여 합동 취임하게 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서 신익희를 항주에 보내 신규식을, 현순을 북경에 보내 이동녕, 이시영을 청래(請來)하였다. 내가 북경에서 돌아온 수일 후 불란서 영사의 권고로 정청을 닫게 되었고 10월 하순경 북경에서 이동녕, 이시영이 도착하였다.

11월 초에, 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법무 신규식, 재무 이시영, 노동 안창호 등이 일시 동석 회합하여 광대(廣大)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 기간 내무부 경찰국장 김구가 적탐 선우갑을 잡아 송치하였으며 국내 선교사가 송금해 온 금 일만 원을 내가 찾았는데 해주인 박추숙이 자기 돈이라 하여 주었더니 김구가 박을 잡아 가두고 금액 전부를 압수하여 정부에 납부한 일이 있었다.

11월 중에, 안창호가 나의 숙소에 찾아와 말하기를 해삼위 인사들을 파입(派入)함으로 정국에 일대 비난이 일어나니 파입한 책임을 내가 지고 사직할 수밖에 없다 하기에 내가 책임은 수반에게 있어 군이 사직해야 하나 대국을 수습할 인물이며 수완 또한 나에게 비할 바 아니니 사직하지 말고 정부를 원만하게 운영토록 하고 대신 파입 자인 내가 사직하겠다고 하고 수일 후 내무 차장직을 사임하였다. 당시 최창식 또한 내각서기 장관직을 사직하였고 겨울 장병로 애인리 집에서 법계 공원 부근 군관로에 집을 얻어 최창식과 함께 이사했다.

1920년 2월, 임시정부의 특파로 북경에 올라가 미 감리교회 동양 선교 총회에 참석한즉, 본국에서 총대 최병헌, 김종우, 노블, 케블 등을 반갑게 만났다. 그 시에 손정도가 선교사 수십 인을 청하여 접대하고 동양평화의 관건은 오직 조선 독립에 있음을 역설했다. 다시 상해로 와 삼일절을 맞아 제1회 삼일절 기념식을 법계(法界) 변덕로에 있는 올림픽 극장에서 거행하였는데 순서 중 내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과 여운형이 상기식을 행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5월경, 이승만이 나를 주미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임명하고 여비 500 달러를 보내왔고 그 직임을 수락하여 나는 상해 정계가 파란(波瀾)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6월 25일 구주로 출정하였다. <현순 자사에서 발췌>

* 동아일보 제30325호 2019년 2월 19일 화요일 A22 - 참고바람 -

"3.1운동 알린 첫 외신 보도 中 '차이나 프레스'(대륙보) 지면 찾았다."
상하이 시립 도서관에서 신문 원본을 확인한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11일자와 15일자에 평화와 자주 독립을 염원한 3.1 독립선언서에 내용이 소개돼 있다"며 "당시 민족대표 측으로부터 외교통신 업무를 맡은 현순 목사의 역할이 컸다"고 했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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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2

  • 2019-02-24 01:47

    조소앙 본명이 용은 이엇넹^^
    궁금햇엇어요. 후손 조인래님과 만낫어요.
    글고 대전인가? 국회의원 조승래도 인척이더군요.


  • 2019-02-24 13:41

    三. 一 운동과 나의 사명

    會集 : 李承勳, 咸台榮, 李甲成, 安世瑗, 吳基善, 朴熙道, 玄楯.
    庶務員 : 李承勳, 咸台榮, 吳基善.
    外交通信員 : 李甲成, 玄楯.
    天道敎代表 : 崔麟과 配合하여 運動金 二千 元을 受하고, 一千 元은 幹部에 두고 一千 元을 내가 携帶. 나는 崔氏와 暗號를 [霖字]로 定하고 1919年 2月 22日에 龍山驛에서 發程.
    23日 : 新義州에 到着.
    24日 : 奉天到着, 海天洋行에 投留.
    25日 : 奉天驛 發程, 특히 崔云丁[昌植]을 만남.
    26日 : 天津到着, 英人 애스터 하우스 旅館投宿, 河均으로 變名.
    27日 : 崔云丁이 來到하여 當日 夜車로 上海에 赴함.
    3月 1日 : 上海에 到着하여 美人 죠지파취 牧師를 訪問하고 그의 指導로 鮮于爀을 찾아 中國人 旅館에 投宿하고 다음 날, 申奎植, 申憲民, 金澈, 李光洙. 趙東吾, 鮮于爀의 招待를 받음.
    3月 4日 : 內地 三. 一 運動의 暴發을 接受하고 宣傳部員을 組織.
    總務 : 玄楯.
    庶務 : 申奎植. 申憲民.
    財務 : 金澈, 鮮于爀.
    漢文書記 : 趙東吾.
    英文書記 : 李光洙

    最先頭로 巴里平和會에 各國 代表 6人에게 英文電을 打함. 하와이 及 桑港 韓人 國民會에 打電. 事務所는 法界 霞飛路에 定하고 나의 宿所는 同界金神父路 法人家로 定함. 孫文의 英文 機關報인 上海 께샛 기자 張敬予와 接하여 獨立宣言文을 英文으로 發布하여 나와 崔云丁, 張敬予는 北京으로 가서 英人 길을 國內로 派遣하여 日人의 蠻行을 調査 發表케 한다. <현순 자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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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94 함창석 2024.04.30 42
13793 원형수 2024.04.29 113
13792 홍일기 2024.04.29 91
13791 최세창 2024.04.25 120
13790 이주헌 2024.04.24 89
13789 박상철 2024.04.24 89
13788 함창석 2024.04.22 107
13787 홍일기 2024.04.22 153
13786 정진우 2024.04.19 154
13785 송신일 2024.04.18 160
13784 민관기 2024.04.18 230
13783 원형수 2024.04.17 250
13782 박연훈 2024.04.15 135
13781 김병태 2024.04.15 532
13780 함창석 2024.04.15 126
13779 송신일 2024.04.14 179
13778 최세창 2024.04.13 141
13777 홍일기 2024.04.12 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