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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필요한 목사, 그 목사를 감동시키는 성도...

작성자
오재영
작성일
2020-07-18 11:02
조회
1096
꼭 필요한 목사.

A.R.토레이 목사의 ‘성령론’에 어떤 신실한 스코틀랜드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가 스코틀랜드 전국을 여행하다가 어느 날 밤 한 여관에 묵게 되었을 때, 여관 주인이 그에게 와서 가정 예배를 인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목사는, 여관 주인이 그곳에 묵고 있는 모든 손님과 여관 일꾼들이 모두 예배드리도록 준비를 한다면 기꺼이 예배를 인도하겠다고 했다. 여관 주인은 그 요구에 동의했으므로, 큰방에 그곳 손님들과 여관에서 일하는 이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을 때 그 목사가 여관 주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관 일하는 이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여기에 다 모였습니까?” “예, 다 모였습니다.” 목사가 재차, “모두요?”라고 묻자 여관 주인은 “저, 모두는 아니고요, 딱 한 사람만 못 왔습니다. 부엌에서 단지와 솥을 닦는 소녀인데 너무 더러워서 여기에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했다. 이 목사는 “그 소녀까지 참석하기 전에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라는 대답과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목사를 보고 결국 여관 주인은 그 소녀를 데리고 왔다.

이 신실한 하나님의 종은 그 불쌍하고 무시당하는 그 소녀에게 큰 관심을 갖고, 예배가 끝난 후 모든 사람들이 그 방에서 나갈 때 목사는 그 소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도드리는 법을 가르쳐 줄 테니 잘 들어요. ‘주님 제 자신을 저에게 보여주세요!’ 이 기도를 매일 드릴 수 있겠어요?” 그 소녀는 매일 그 기도를 드리겠다고 대답을 했다. 다음 날 목사는 여관을 떠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목사는 다시 그 여관에 둘러 주인에게 여관에서 일하는 그 소녀에 대해 물었다.

여관 주인은 “그 애는 버렸습니다. 전혀 쓸모가 없게 되었어요. 하루 종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면서 자신이 맡은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목사는 그 소녀를 다시 불러달라고 요청한 후, 그 소녀가 들어오자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다른 기도를 가르쳐 줄 테니 잘 들어요. ‘주님, 당신 자신을 제게 보여주세요.’ 이제 이 기도를 날마다 드리기 바랍니다.”

그 목사는 여관을 떠났고,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난 어느 주일날 아침에 글래스고에 있는 한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예배가 끝난 후에 말쑥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한 여성이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제가 누구인지 아시겠어요?” 목사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누구신지요?” 그 여성은 “몇 해 전에 어느 여관에서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종들 중의 한 사람을 부르셔서, ‘주님, 제 자신을 제게 보여 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고, 또 그 후에는 ‘주님, 당신을 제게 보여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은 기억하시겠어요?” 그 목사는 그제야, “아! 기억납니다...”

그 여성은 “제가 바로 그때 그 소녀입니다. 목사님께서 첫 번째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떠나가신 후에 저는 하나님께 제 자신을 제게 보여 달라고 기도했어요, 하나님께서 저의 비천(卑賤)함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저는 슬픔에 사로잡혀 저의 죄를 생각하느라 밤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낮에도 거의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두 번째 저를 찾아오셔서 가르쳐 주신대로 ‘주여, 당신을 제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매일 기도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과 그분의 사랑, 십자가에서 저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보여주셨어요. 그러자 저의 모든 罪짐이 다 사라지고 저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聖靈께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모두에게 행하시는 일들이 첫째는 우리자신이 罪人임을 보여주시고,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義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공급하시는 의(義),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목사를 감동시키는 성도...

곽선희 목사님의 설교‘자기 십자가의 의미’에 실린 내용 중에, 당신께서 어느 날 무슨 일이 있어서 의사이신분과 저녁식사를 하는 중에, 의사는 참 고생이 많다는 선입견으로. 건강한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좋지 병든 사람하고만 얘기하고, 아프다는 사람하고만 하루 종일 그것도 매일을 만나면 우선 정신적으로 굉장한 희생이라는 생각으로, 그래 “얼마나 힘이 듭니까?”했더니 자기간증하기를, 언젠가 자기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될 때 심각하고 정중하게 묻기를, “아버지, 아버지는 왜 그 고생스런 의사가 되셨습니까?” 아버지의 대답이 “네가 모르는 것이 있다. 나는 환자들을 대할 때 그렇게도 마음이 기쁘단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일수록 그들을 대하면서 나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환자를 치료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는 거야.” 결국 그 아들도 의과대학에 들어갔다고...

의(醫)는 아무그릇에나 담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불리어지는 이름에 합당한 인격과 품격을 갖추어 삶을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직(職)에 관하여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단상(斷想)이 있다. 오래전 이미 고인이 된 이은성씨의 소설 ‘동의보감’에 나오는 내용이다. “醫는 아무 그릇에나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그릇은 心性의 맑기와 크기를 말한다."

의를 담는 그릇은 셋이다.
하나는 인품(人稟)이요 둘은 천품(天稟)이요 셋은 신품(神稟)이다.
인품은 고을의 환자를 고치는 그릇이며 천품은 세상 사방의 환자를 고치는 그릇이요 신품은 온 세상의 만병을 바라보는 그릇이다. 온 지역에 의원(醫院)숫자만큼이나 수도 없이 깔려있는 교회들... 그에 소속된 목사와 자칭 장로들은 선교의 대상들인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떠한 신앙인다운 품격(稟格)과 인격(人格)을 갖추고 있는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허세를 뛰어넘은 치열한 인격도야(人格陶冶)의 신앙인다운 당당함을 갖추었느냐는 말이다.

영적 사역현장에 위기(危機)는 언제나 상존한다.

초년 목회 전도사시절, 1개면으로 되어있는 섬, 12개 리(里)에 13개교회가 있어 마을마다 교회가 있고, 면소재지에는 이름도 중앙교회라는 교회가 있고, 여러 명의 장로 분들이 있어 그 긍지가 대단하였다. 우리교회 장로님은 대화 중에 가끔, “그 교회는요, 소를 잡아도 소문이 안 납니다...”장로님들의 교회사랑이 탁월하고 그 소문은 섬 안의 모든 교회들도 인정들을 하고 있었으니까, 부임 후 어느 날, 1시간거리가 되는 여객선 선실 안에서 동역자분의 소개로 그 교회 몇 분의 장로님들과 동행중 인사와 함께 대화 중에 제일선임 장로께서 당신교회 자랑을 하셨다. “저희교회는요, 목회자를 최고로 대접해드립니다. 그에 덧붙여, 어느 분이든지 저희교회에서 목회실패하면 어디 가셔도 목회성공 못하십니다.” 그때만 하여도 10여년을 데모대에 휩쓸려 거친 세상 물이 덜 빠진 탓에 주책없이 느낀 대로 대답을 하고 말았다.

“장로님, 그건 아니지요, 그 말은 목사님께서 그리 생각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이런 좋은교회에서 목회 제대로 못하면 어디가도 목회다운목회 못한다. 장로님은 이런 목사와 교회부흥 시키지 못하면 어느 목사가 와도 교회 부흥 없다”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차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순간, 그 분위기의 싸늘함과 어색함, 그날 그 입방정으로 한동안 그분들의 외면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는 오해가 풀려 좋은 분들과 함께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로 떠나올 때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한사람의 남성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기까지 성숙하려면 두 여인의 희생이 전제된다.” 목사 에게도 비슷한 원리다. 그를 이끌어준 반듯한 신앙의선배와 철없는 그가 성숙하도록 희생과 섬김으로 들어주고 도와준 성도들의 희생, 대부분 이 원리를 벗어나 사역의 위기를 겪는다.

우리 지방과 내 주변에도 인생의 연륜으로 보면 내 자녀들보다도 나이어린 전도사와 목사들이 있다. 이들을 볼 때면 마음의 절절함을 느낀다. 모두가 상처 없이 감화와 감동의 마음으로 잘 성장해야 할 터인데... 만약 이들이 첫 번 목회에서 상처를 입으면 그 트라우마로 평생을 시달릴 터인데, 감당할 수가 있을까? 이들이야말로 현존하는 미래의 영적 지도자들이며 장래의 희망이니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우환질고의 주말, 다양한 사역의 현장에 주님의 긍휼(矜恤)하심과 임재, 성령님의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기도드린다. - 샬 롬 -



전체 4

  • 2020-07-18 12:27

    서로 섬김속에서 사역을 감당하다 보면 좋은 성도요 좋은 목회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목회자는 교회 부흥도 중요하지만 한사람의 성도를 바른 신앙으로 양육시키는 목회자가 좋은 목회자요 한사람의 성도는 목사님의 깊은신 신앙속에서 말씀으로 잘 양육받는 성도가 좋은 성도일거라 생각합니다.
    좀 오래전 어느날 전임 담임 목사님과 가전제품 가게에서 마주첬는데 목사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의아한 표정으로 대뜸 아니 000교수가 어떻게 장로가 되었어요 묻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한 기억이 납니다 신앙적 쌩탱이를 잘 양육하여 장로로 만드는것 또한 좋은 목사님의 능력입니다 장로의 신앙에 이르기까지 신앙교육을 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능력있는 목사님이 아니죠 라고 했더니 쌩 하니 다른곳으로 가시는 그분의 뒷모습을 보면서 좀 처량하게 보였던 기억이 나네요 그 목사님은 작고하셨지만 그당시 함께 신앙생활 했던 교회의 중진급 성도들이 지금도 하는말중 가슴아픈 말은 정말 그분 천국에 가 계실까 하는 말이라 좀 그렇습니다.


    • 2020-07-18 19:59

      장로님!
      아프리카속담에, “죽어가는 노인은 불타는 도서관과 같다.”
      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목사에게도 경험은 누구에게나 더욱 소중하건만
      아직도 인생경험에는 미숙함이 많은 이들이기에 끊임없는 격려와 지도를
      받아야 할 터인데, 본인이 깨우치기까지 기다려주고 품어줄 넓은
      품을 소유한 분들을 만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 샬 롬 -


  • 2020-07-18 12:34

    물건 品과 여쭐 稟은 같은가요? 다른가요?
    한자 의미로는 당연히 聖徒가 牧師보다는 하나님의 형상에 가깝겠지요?
    감리회는 聖徒가 아니라 敎人이나 敎友라고 호칭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天稟은 타고난 氣質이라 하니...
    人品 天品 神品은 아닐까요?


    • 2020-07-18 20:00

      장로님!
      돌아보면 모두가 수많은 이들 중에서 은혜와 사명있어 허락하신 소수의 소중한 만남들인데,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받은 은혜보다는 아직 眼目과 召命에 미숙함에도 무거운
      책임을 맡은 탓으로 생각됩니다. 신품(神稟)이 되려면 주님 하라 하신대로만 하면 되는데, 필요할 때는
      모두가 보이지를 않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 평안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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