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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 성구:...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6-09 00:00
조회
2042
막 10:20-22 “【20】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계명들을 인용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년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20】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하였다.

레인(W. L. Lane)은 “그의 충동적 대답은 그가 율법을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고, 그것을 완전히 성취했다고 확신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라고 하였고, 칼빈(J. Calvin)은 “그는 진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자기 의무를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하는 거짓된 확신을 자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어려서부터의 율법 준행이란 어디까지나 문자적 의미를 따른 외적이며 피상적인 준행이었다. 그는 율법의 속뜻을 알지 못했으며, 따라서 참된 의미에서 율법을 준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 결정적인 이유로 그가 예수님의 진의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여 결국 물러가고 만 행동을 들 수 있다(22절). 그가 영생보다도 재물을 더 사랑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갔다는 것은, 그의 소유가 평소에 그의 우상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율법의 가장 중요한 제 1 계명을 위반하며 살아온 것이다. 또한, 율법의 속뜻인 인간 사랑에 있어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철없는 부자 관원인 청년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는 주시하시며 사랑하신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에 대해 (1) 그의 사랑스럽고 확실한 성품과 솔직함과 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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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때문이라는 설(A. Barnes), (2) 외적으로 심한 죄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W. Hendriksen, C. R. Erdman), (3) 성실한 구도 자세 때문이라는 설,1) (4) 그가 구한 문제 해결을 위한 권유 때문이라는 설(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 119, 마경일) 등이 있다.

앞 구절(20절)의 해석을 미루어 (3)설과 (4)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 권유하신 내용은 행함으로 영생의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지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왜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하시지 않았을까? 이 점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나를 믿어라’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명령을 하신 분에 대해 완전한 신뢰나 자기 포기가 없다면, 그 부자 관원인 청년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청년이 영생을 얻는 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란 앞서 언급한 계명들에 대한 추가적인 성취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J. Calvin, J. Gnilka, 하권, p. 119, E. Schweizer). 따라서, “참된 예수님의 추종자들을 특징짓는 자기 희생적 헌신”(W. L. Lane)이나, “사랑이나 동정”(E. P. Gould) 등의 결핍으로 보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한 견해는 예수님의 취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표현된 내용을 문자적 의미로만 이해한 데서 비롯된 오류인 것이다. 이 점은 예수께서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라고 하신 다음에 ‘그러면 영생을 얻으리라’라거나,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라고 하신 다음에 ‘그리고 영생을 얻으리라’라고 하시지 않은 점과 성경의 구원관이 행함에 의한 구원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것(요3:16, 갈 3장, 엡 2:8)2)으로도 분명해진다. 예수님의 최종적이며 결정적인 말씀은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영생의 주로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서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결정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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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Hendriksen, D. W. Burdick, 黑崎幸吉, 이상근.
2) 필자의 요한복음 3:16의 주석과 갈라디아서 3장의 주석과 에베소서 2:8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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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해가 있는 것을 아셨다. 그것은 바로 그의 소유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고, 더 믿고, 더 의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재물은 곧 신이었다. 이것이 그 나름대로 계명을 열심히 지킨다고 자부하면서도 영생을 얻을 방도를 찾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결정적인 이유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그는 영생을 목전에 두고,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결단의 표로서 재물을 포기하고, 재물에 집착된 마음과 재물이 구원받은 한 표징이라는 유대교의 교리를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는 영생의 주님 예수와 그 주님 이외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의 도구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터득해야 한다. 그 경우에 그는 전혀 새로운 곳인 하늘에서 보화가 주어지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즉, 성격상 하늘에 속해 있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하늘에 온전히 보전되어 있으며, 또한 오늘날에도 미리 맛볼 수 있는 모든 복이 주어지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물론, 그 핵심적인 것은 영생이다. 아직 그에게 남은 것이 있다면 영생의 주님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의 표면적 권유는 그 청년에게 해당되는 것이 확실하다.1) 그러나 영생을 위해 찾아온 부자 관원인 청년에게 주신 예수님의 권유의 취지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영생의 주님 예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마 10:37-). 주님 예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은 언제든지 주님 예수와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결단의 표로서 사랑의 도구로 쓰여져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그 부자 관원인 청년의 반응에 대해서, 마가는【22】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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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A. Bengel, W. W. Wessel, W. L. Lane, E. Schweizer, E. P. Gould, E. Bickersteth, C. E. G. Swift, F. C. Grant, R. Ear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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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비극적 결단은 영생을 얻는 것보다 재물을 훨씬 더 사랑한 것을 반영한다. 그는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실은 재물을 신으로 믿었던 것이다. 마태복음 6:24에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였다. 결국 그는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마 6:24) 재물을 선택했으며, 그 결과는 영생 대신에 슬픔과 근심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결단을 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좇는 결단을 했어야만 했다.

크랜필드는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간 것은 그에게 아직 회개의 소망이 있는 표시가 될 것이다.”1)라고 했지만, 오히려 풀루머는 “그는 갑절의 실망으로 우울하고 마음이 편치 못했다. 왜냐하면, 그가 공로를 세워볼 수 있는 어떤 모험적인 것이 요구되지 않고, 그가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던 것을 버리라고 요구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후자가 더욱 그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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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이상근.

<필자의 www.newrema.com의 \\'난해 성구 사전 1권\\'>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HP 010-6889-3051



전체 4

  • 2012-06-09 10:19

    최목사님.. 엑설런트입니다..^


  • 2012-06-09 10:59

    주님 예수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은 언제든지 주님 예수와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결단의 표로서 사랑의 도구로 쓰여져야 한다.

    최목사님 글을 읽으며 행복합니다. 귀한 말씀으로 새록새록 일깨워 주시니감사합니다.

    ※ 2012-06-09 11:33:17 에 \\김정효(jeong)\" 에 의해 수정됨\"


  • 2012-06-09 11:40

    감사 감사 감사....


  • 2012-06-09 15:15

    김성국 목사님, 이 난해한 성구에 대한 필자의 주석을 높이 평가하며 공감을 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정효 장로님, 새록새록 일깨움을 얻으신다고 하시고, 특히 중요하게 여기신 부분을 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경남 목사님, \"감사 감사 감사...\"라고 하셨는데, 오히려 필자가 더 감사합니다.
    최웅석 권사님, 여전히 난해한 성구를 주석한 필자의 글에 깊은 관심을 보이시고, 특히 더 공감된다고 여기는 부분을 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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