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께.
현재 ‘감리회소식’이 ‘자유게시판’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표명이나 감리회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의 글은 ‘자유게시판’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보도자료 ‘순교’ 소개 내용입니다.

작성자
유충일
작성일
2015-10-08 06:44
조회
907
순교
순교의 캘리그라피가 미완성인 이유
1. 사도행전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
2. 순교자와 순교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의미


영화의 간략소개

한국 기독교가 130년을 맞으면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을 지금 기억을 많이 하고 있다. 아펜젤러 언더우드 스크랜튼 이런 분들을 기억하는데 그것도 물론 기억해야 되지만 더 중요한건 우리 한국인들, 복음을 수용했던 한국인들의 선교활동 특히 그분들의 해외에서의 선교활동 이것들은 경시하는 경황이 있는데 이 부분을 우리가 더 많이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다.

최초의 선교사 알렌이 입국한 이후로 30년이 안되어 20만명의 결신자들을 얻었고 총회가 창립되었다. 그 총회가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할 만큼 경이적인 선교의 결실을 맺었던 것은 우리나라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이 교회를 통해 다른 나라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7년 평양장로교신학교에서 최초의 목사 7명이 배출되었고 그 기념 사업으로 선교부가 조직되었으며 그 중의 한 명인 이기풍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도록 결정했다. 그리고 그 당시 해외라고 인식하고 있었던 제주도에 이기풍 목사를 파송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교회의 최초의 선교사 파송이다. 이후 1909년에 한국교회는 만주 일본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 개신교가 복음을 받아들인지 25년만에 해외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고 이렇게 짧은 기간에 해외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세계 선교 역사에 있어서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속에서 한국교회 최초로 해외로 파송되어 순교한 김영학 목사가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순교는 당시 언론에 보도될 만큼 알려졌었으나 지금은 잊혀져 있다.

80여년이 지난 현재 김영학의 아내인 안원정 사모가 남긴 자술서를 최초로 인용하며, 그들의 삶과 슬픈 가족사를 조명한다. 영화는 순교라는 것이 한 사람의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결정과 또 다른 가족의 희생이 함께 어우러진 가장 귀한 값진 열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그리고 순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그 의미를 한국 교회에 전달한다.

그리고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순교한 배형규 목사가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6.25 이후에 처음으로 순교자로 인정한 목회자였다. 또한 함께 순교한 평신도 심성민 형제도 있다.



2007년 7월 19일 목요일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봉사를 떠났던 23명이 이동중 피랍됐다.
배형규 목사와 심성민 형제가 순교를 당하고, 스물 한 명이 온갖 위협과 고통을 당하다 40일만에 풀려났다. 피랍사태는 큰 충격을 주었고 여러 가지로 논란을 일으켰다. 한국 기독교계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사회로부터 호된 비판과 질책을 받았고 교계 내부에서조차 공격적인 선교로 교회의 이미지를 흐린 사건이라며 일부 비판이 나왔다.
이 일로 인하여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해야만 했던 선교사들도 있었고, 많은 선교사들의 사역이 위축되기도 했다. 돌아온 봉사단원들은 고개를 숙였고 침묵했다. 그때는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그들이 왜 가야만 했는지 질문하지 않았다.
복음이 있었고 희생이 있었고 순교가 있었던 그 때 우리는 질문하지 못했다.

“왜 가야만 했는가?” 라는 질문은 왜 우리가 선교를 해야만 하는지 묻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던 순수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무장된 선교봉사대원들을 통해 이 시대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가 무엇인지 알아야 될 필요가 있을것이다.


순교, 순교란 무엇일까?
죽음의 위협과 배교를 강요당하는 억압속에서도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순교이다.

우리는 순교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그러한 삶을 매일 살아낼 수 있을까? 기독교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희생을 소유할 수 있을까? 피를 흘리는 순교가 없다하지만 여전히 이 땅 어디에선가 적색순교가 이어지고 있다.

매일 매일 백색 순교의 삶을 살았던 김영학, 배형규, 심성민, 복음을 들어야 할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당연히 가야만 했던 그리스도의 군사들

그들에게 다시, 왜 가야만 했는지 질문하면 무엇이라 답할까?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질 때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학은 누구인가?

김영학 목사 (1877-1933 감리교 목사,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에서 순교한 파송 선교사)

1. 방탕한 젊은 시절과 전도대와의 시비

김영학 목사는 황해도 금천군 금천읍 조포리 양반가문을 배경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향리 한문사숙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여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현실앞에서 절망하며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토산장에서 전도대를 만나게 되고 복음을 듣게 된다.

2. 전도집회에서 회개하고 권서인이 됨.

그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그곳은 전도집회 장소로 갔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게 되었다. 이후 권서인이 되어 성서공회에서 공급하는 성경, 찬송가, 쪽복음을 등에 지고 전도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김영학은 권서인을 하면서 민족의 고통을 더욱 더 절실히 확인하게 되었고 반드시 복음이 필요하게 됨을 알게 되었다.

3. 독립운동으로 체포 옥고를 치름.

1911년 해에 정식으로 전도사의 직분을 맡아서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다. 1914년에서 감리교 연회에서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19년까지 그 동안에 평산,금천,장연,철원,서울종교,수표교,양양교회를 담임 목회하였다. 양양에서 1919년 3.1운동을 맞았다. 김영학은 양양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그가 순회하던 교회의 대부분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서 일본 관헌들은 그를 체포했고 그는 4년간이나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것만 보아도 그의 애국 운동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극비문서에 그에 대하여 '민족절대독립주의,배일사상 포지자"로 규정하고 있듯이 그는 민족독립운동가였다.

4. 시베리아선교 활동, 공산당에 체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

1922년 5월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여 가평읍교회를 시무하면서 당시 남감리회가 펼친 선교백년기념사업에 가담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교제확장과 선교사명과 전력을 경주하였다. 1921년 감리교연회는 양주삼 목사를 중심으로 만주 및 시베리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시베리아의 한 도시 블라디보스톡은 우리나라 두만강 바로 건너, 동해에 면한 항구로서 러시아의 동양 진출을 위한 중요 요지이다.시베리아는 당시 러시아 공산혁명이 일어난 지 6년 밖에 안된 때였다. 과격파들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괴롭히던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따라서 시베리아 선교를 지원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시피하던 때였다. 그러나 김목사는 혹심한 옥고를 치렀던 뒤라서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자원하여 그는 이곳에 왔고 나라 없이 외롭게 사는 교포들을 위로하는 한편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교포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때문에 교회는 곤경중에서도 견고히 발전하였다. 9년간을 목회에 전념했으나 ,1930년 공산당들은 소위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김목사를 구금하였고 근 1년간을 공갈, 협박 또는 회유책을 써가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단연코 거절하자 1931년 3월에 가장 악질적인 반동이라는 죄목으로 10년 중노동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 되었다. 이곳은 보통 영하 40-50도 오르내리는 추운 지대였다. 그곳에서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굴복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

배형규는 누구인가?

샘물교회 부목사와 청년회 담임목사였던 배형규(1965년 7월 25일 ~ 2007년 7월 25일)는 제주도 출신으로 제주일고와 한양대학교, 서강대 대학원을 졸업한 뒤 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2001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사역을 시작했는데 순교 당시 초등학교 3학년된 딸을 자녀로 두고 있었다.. 2007년 7월 19일 한민족복지재단 아프간 단기선교 팀장으로 19명의 샘물교회 아프간 단기선교 팀원을 이끌고 아프간으로 선교활동을 떠났다가 아프간 가즈니 주에서 탈레반에 피랍되어 2007년 7월 25일 7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배목사의 피살과 시신 수습 소식은 알 자지라 방송 등에서 보도하였으며, 2007년 7월 26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사실로 확인되었다. 배형규 목사의 삶은 그가 떠난 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의 유산이 어떻게 아름답게 결실 맺는 가를 말해주는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특별히 배형규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통합교단에서 선교사로 추서되었으며 6.25이후 현재까지 가장 마지막에 순교한 목사이다.


심성민은 누구인가?

심성민(1978년 ~ 2007년 7월 30일)은 경상남도 고성 출신으로 진주고등학교와 경상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후 학군사관(ROTC)로 군복무를 마치고 정보통신 관련 기업에서 근무하다가 농촌 문제에 관심을 두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중, 2007년 여름 샘물교회의 아프가니스탄 단기선교 활동에 참가했다.
아프간 내에서 이동하던 중 7월 19일에 가즈니 주에서 탈레반 무장세력에 의해 일행과 함께 납치되었다.7월 29일 일본 NHK 방송과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건강에 별 이상 없이 피랍 여성 세명과 함께 민가에 갇혀 있다고 말했으나, 하루 뒤인 7월 30일 저녁 탈레반에 의해 피살되었다. 신앙을 가진지는 얼마되지 않았으나 매우 신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며 피랍당시 한국 교회에 대하여 매우 적대적인 감정을 감추지 않았던 그의 부친 심진표 님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이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다. 그의 순교로 말미암아 기도제목이었던 가족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영화관련 문의 파이오니아21 070-7886-3691 김윤희 팀장 / 김상철 목사 연락처 010-3433-6691



전체 7

  • 2015-10-08 12:54

    근데요. 중요한게 잇어요. 이기풍 목사는 선교사가 아닙니다.
    그냥 제주로 파송된거에요.
    최초라는 붙이기 좋아하는 장로교회. 참 한심하다 느낍니다.
    과장하면 유식해지는줄 압니다.


  • 2015-10-08 12:56

    1903년 감리교회는 이미 미주 하와이로 목회자들을 파송햇어요.


  • 2015-10-08 12:57

    그리고 무슨 1907년 최초의 목사입니까.
    감리교회는 1902년 이미 목사안수를 주엇는데..
    몰 좀 알고 일을 하세요.


  • 2015-10-09 22:32

    반론을 얘기햇는데도 답이 없음은 추진체가 내용을 정확히 모르고 잇다는 일 증거입니다.


  • 2015-10-09 22:42

    자신이 없으신가요?


  • 2015-10-10 16:55

    민목사님~
    잘 몰라서 미안합니다.
    구리지방에서 교육부총무인 저에게 지역 상영관에 영화를 걸도록 맡긴 일이라서,
    영화를 보고는 감동이 되고, 우리 뿐만이 아니라 타교단 기독교인들이 많이 보면 볼 수록
    좋겠다고하여 추진하게 된 겁니다.

    바라기는 감리교 독립운동사에 밝은 민 목사님이
    김영학 목사님에 대하여,
    또 당시 감리교 독립운동사에 대하여,
    자세히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2015-10-10 17:35

    유목사님.
    답을 주셔서 넘 감사드립니다.
    김목사님은 선한 목자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4.10.22 72195
공지사항 관리자 2010.12.29 70575
2785 이종선 2015.10.14 677
2784 김순태 2015.10.14 560
2783 주병환 2015.10.14 926
2782 함창석 2015.10.14 504
2781 이충섭 2015.10.13 733
2780 고병국 2015.10.12 909
2779 김성기 2015.10.12 1240
2778 함창석 2015.10.12 890
2777 민관기 2015.10.11 806
민관기 2015.10.13 674
2776 박상연 2015.10.11 1114
2775 현종서 2015.10.10 997
2774 김형국 2015.10.10 1000
2773 함창석 2015.10.09 626
2772 박영규 2015.10.09 844
2771 장병선 2015.10.09 1037
2770 유삼봉 2015.10.08 720
2769 장병선 2015.10.08 1253
2768 함창석 2015.10.08 621
2767 유충일 2015.10.08 788
2766 유충일 2015.10.08 7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