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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역자입니다.

작성자
노재신
작성일
2016-01-25 13:43
조회
2563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세례 요한 또한 옥중에서 예수님에 대한 표적을 보고 싶었기에 사람들을 보내어 직접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원하는 세례 요한에겐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곤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알리라.' 하셨습니다.
듣고 보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로 부터 임하는 표적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것을 듣고 보며 경험을 합니다.
그러나 그 듣고 보는 것을 믿지 아니하고 표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세대를 향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하셨습니다. (마12:39)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긴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세대, 바로 악하고 음란 한 세대입니다.

왜 사람들은 표적을 믿지 않는 것일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은 표적을 보여 주어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악하고 음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 사람들이 표적을 믿지 아니하는 것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며 그에 상당한 합리적인 것 같아 보이는 합당함도 있습니다.
그것을 이성적이라 할지도 모르고 그것을 합리적이라 할지도 모르며 그것을 현실적이라 하고 똑똑함이라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표적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을 가르쳐 깨닫게 하십니다.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인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하려하심일까?
누가 진짜 배신자인지 누가 진짜 거짓의 사람인지를 가르쳐 깨닫게 하심일까?
그렇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과 같이 직시하여 깨닫게 하여도 사람들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돌이키려 하지도 않습니다.
제자들의 흩어짐이 그러했고 베드로의 부인이 그러했으며 가룟인 유다의 배신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모든 직시적 주님의 가르침을 스스로 부인하며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 가룟인 유다로 부터 배신을 당하던 그 밤에 수없이 많은 표적들은 가룟인 유다의 배신을 암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 한 분 뿐이었으니 자칫 이러한 표적들은 예수님을 스트레스에 의한 강박관념에 쌓인 사람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 하셨지만 그들은 잠시도 함께 깨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그 밤에 배신의 그림자가 그 동산을 찾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깨어 기도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그 밤은 가룟인 유다의 배신 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의 배신의 그림자가 예수님을 뒤덮으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룟인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된 제자들의 배신은 단지 시간 차이였을 뿐이었습니다.

이화 - 가르쳐 깨닫게 하다.
그 동산엔 예수님의 이화가 피어 있었으며 가룟인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의 배신의 꽃이 만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배신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깨닫게 하려 하셨을까?

1. 우선 베드로에겐 검으로 일어선자 검으로 망할 것을 가르쳐 깨닫게 하셨습니다.(마26:52)
베드로의 검은 바로 율법의 검입니다. 즉 율법으로 일어선자 율법으로 망할 것을 가르쳐 깨닫게 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감리교회 또한 장정의 법으로 일어서려 한다면 장정의 법으로 망하게 될 것을 가르쳐 깨닫게 하심일지도 모릅니다.

2. 제자들에겐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면 천사를 보내어 세상의 칼과 뭉치로 무장한 이들을 물리칠 수 있음을 가르쳐 깨닫게 하셨습니다. (마26:53) 세상의 칼은 세상의 힘(법)이며 세상의 뭉치는 돈입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세상의 힘(법)과 돈 문제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돈이 많은 목회자는 돈이 많음 때문에 허우적 거리고, 돈이 없는 목회자는 돈이 없는 것 때문에 허우적 거립니다. 주님이 가난하여 돈이 없는 목회자들을 돕지 않음이 아니며 주님이 돈 뭉치를 의지하는 거짓된 자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돈 뭉치를 의지하는 이들을 가만 두어 허우적 거리게 함이 아닙니다.
이 모든 허우적 거림들은 이미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하심입니다.(딤전 6:10)

3. 예수님은 배반하는 제자 가룟 유다를 배신자라 하지 않으시고 친구라 하심으로 가룟 유다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으로부터 가르쳐 깨닫게 하려하심입니다. (마26:50)
사람이 살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어 있으며 사람은 반드시 편을 가르게 되어 있습니다.
내편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주 훌륭하고 똑똑한 사람이라 할 것이지만 상대 편의 입장으로 본다면 편협적인 시각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서로 편을 가름으로 으르렁 거리며 싸우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나라를 위함이며 다 교회를 위함이며 다 의를 위함이라 말을 하며 나름대로 옳음의 정당성도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배신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함입니다.

누가 누구를 배신함일까?
중재자가 나그네를 위하여 중재하는 것도 배신을 수 있으며 나그네가 중재자의 뜻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음 가운데 중재를 따름 또한 배신일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다고 상대방과 싸우는 것이 나라에 대한 배신이며 교회를 위한다고 말하며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 교회에 대한 배신이며 의를 위한다 하며 다툼과 싸움을 마땅하게 여김 또한 의에 대한 배신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위하는 것이 배신이며 교단을 위한다고 하면서 분쟁과 파당과 무시와 조롱을 일삼는 것들이 그 또한 교단에 대한 배신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 하며 돈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며 돈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다 하는 것 또한 배신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배신자인 가룟인 유다를 친구라 하심과 같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하늘의 선을 이루어 가십니다.

서로의 주장과 의견이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적대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친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들 또한 친구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감동을 쫓는 이들이라면 그들 또한 분명 친구들입니다.
중재자와 나그네, 이들은 서로를 배신자라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주님은 그들을 가르쳐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서로가 상대방의 원수가 아닌 친구임을 말입니다.

그래서 중재자와 나그네는 서로를 배신자처럼 말할 진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역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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