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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중요 성구 15회(마 5:9) 화평케 하는 자…하나님의 아들…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6-08-03 11:22
조회
1024
일곱 번째 복에 대해, 마태는 【9】[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였다.
[화평케 하는 자](에이로노포이오이, εἰρηνοποιοί: 복수형)는 신약성경에서는 이 곳에만 나오는 독특한 낱말이다.
이상근 님은 “단순히 자기의 마음속에 화평을 가진 자(Augustine), 평화로운 자(Wyc. V), 또는 화평을 사랑하는 자(Grotius)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조성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화평]은 에이레네(εἰρήνη)로서 히브리의 인사말이며, “고전 헬라어에서는 적대적인 무리 사이의 휴전 혹은 적의의 해소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서 그 낱말은 전쟁과 다툼에 반대되는 것,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회복된 올바른 관계, 마음의 평안 또는 고요 등을 의미한다”(C. L. Mitton).
이 평강(화평)이 내적인 의미의 것이든 외적인 의미의 것이든 간에 근본적으로 “먼저 죄를 용서받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그 까닭은 율법이 죄 때문에 양심을 비난하고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다”(M. Luther). 그러므로 인간이 참된 내‧외적 평화를 얻으려면,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평강은 은혜의 결과이다”(M. Henry, R. T. Stamm, R. C. H. Lenski). 따라서, 은혜의 결과로서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예수께서 주시는 하늘의 평화이다(요 14:27).(갈 1:3의 주석).
진정한 의미에서 [화평케 하는 자]란 하나님과 죄로 인해 하나님의 원수가 된 인간 사이의 화평을 위해(롬 5:10), 또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평을 위해(엡 2:15-18) 화목 제물(롬 3:25, 요일 2:2)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에 대해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υἱοὶ θεού: 복수형)이란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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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 즉 믿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마태의 사상은 예수님이나 사도 요한이나 바울이나 베드로나 마가나 누가 등과 다를 바 없다.
이 사상은 구약성경에도 나타나긴 하나(출 4:22, 시 68:5, 89:26, 사 9:6, 63:16, 64:8, 렘 3:4, 9, 말 2:10) 미미한 것이었는데, 예수님에게서 본격적으로 개인화 내지 신령화 되었다. 그러므로 아버지로서의 신관은 신약성경, 특히 예수님과 바울의 주류가 되었다.
메이첸(J. G. Machen)은 “하나님의 부성의 교리는 예수님과 바울이 똑같다.”①라고 하며, 케네디(H. A. A. Kennedy)는 더욱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교훈의 근본 취지인 하나님의 부성의 계시는 바울의 종교적 개념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배했다.”②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바울이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살전 1:1, 살후 1:2, 골 1:2, 몬 3 등).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의 의미에 대해서 바르트(K. Barth)가 자신의 「교의학 개요」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아버지란 인간관계에서 하나님께 적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인간관계에 적용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 안에서, 또 자신의 본성에서도 영원히 아버지이시다.······당신의 피조물인 우리를 위한 아버지이시다.······참되고 정당한 부성은 하나님 안에 있고, 바로 이 하나님의 부성으로부터 우리 자신의 부성이 생기는 것이다. 신적 부성은 모든 자연적 부성의 근원이다.”③
하나님 아버지의 주도적이며 자유로운 은혜에 의해서만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 즉 하나님의 양자(빌 2:15)가 될 수 있다. 양자란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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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J. G. Machen, The Origin of Paul's Religion(Michigan: Eerdmans, 1973), p. 161.
2) H. A. A. Kennedy, The Theology of The Epistles(London: Duckworth, 1959), p. 105.
3) K. Barth, Dogmatics in Outline, trans. by G. T. Thomson.(SCM Press Ltd, 1966), p.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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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을 표현하는 하나의 개념이다.
고대 세계에서 가족이 양자를 삼는 것은 매우 평범한 일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양자 결연 의식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양자 결연 의식은 대단히 인상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동전과 저울을 사용한 상징적인 매매 행위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아들의 친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한 번 팔았다가 다시 사고, 두 번째 팔았다가 또다시 산다. 그리고 세 번째 팔고는 다시 되사지 않는다. 그런 다음에 양아버지가 로마의 행정 장관인 집정관에게 가서 양자 결연의 건을 신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일단 양자가 되면, 양자의 과거의 모든 빚과 계약은 무효가 된다. 양자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사는 새사람으로 간주된다. 미래의 모든 면에서도 양자는 다른 아들과 똑같은 근거를 갖는다.”④
바울은 양자의 개념을 구속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롬 8: 23).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데,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것이다(엡 1 :4). 이 아들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 대신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양자의 영을 받았다(롬 8:15, 갈 4:6). 이 영은 곧 하나님의 영이며, 양자의 모든 삶을 지배한다(롬 8:14). 따라서, 케네디(H. A. A. Kennedy)는 “양자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모든 환경들, 즉 세상과 생명과 죽음과 현재적인 것들과 다가올 것들의 주인이다. 바울은 항상 이 승리적 조건들을 성령의 선물과 결합시킨다.”⑤라고 하였다. 이러한 양자의 삶은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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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W. Barclay, Ambassador for Christ(The Saint Andrew Press, 1973), p. 170.
5) H. A. A. Kennedy, op. cit., p.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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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 특징지어진다(요 11: 52, 롬 8:21, 고후 3:17).
양자란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로서, 그분과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롬 8:17). 이 고난은 죄악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고난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다(고전 4:10-13, 9:19, 고후 1:5, 4:8-10, 11:23-32, 빌 1:29, 3:10, 골 1:24, 살후 1:5, 딤전 4:10, 딤후 1:8).
한 마디로 말해, 양자란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를 당신의 영광의 상속자로 삼으신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죄로 인해 마귀에게 끌려가던 우리가, 창조주요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양자가 되었다는 것보다 더한 사랑의 신비가 있을 수 없으며, 이보다 더 놀라운 은혜가 있을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로서의 신관은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과 베드로와 바울이 다를 바 없고, 또한 예수님의 교훈과도 일치한다고 하면, 결국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과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님의 교훈이나, 혹은 그것에 근거된 초대 교회의 전승을 공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그들의 아버지로서의 신관의 깊이는 약간 다르다.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년), pp. 181-185.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4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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