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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을 상실한 인간들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6-10-31 08:32
조회
1654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성경은 40여명의 기자들이, 1500여년에 걸쳐서 기록한 책들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직책과 교육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한 가지의 목적을 위해서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 구약의 두 책을 합해서 66권의 책으로 되어있으며, 하나의 성경으로 결합된 책인데, 성경에는 역사서도 있고 시도 있고 서신도 있고 교훈도 있고 책망도 있고 권면도 있지만, 어느 책 어느 부분을 읽을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께 순종이요 하나님께 헌신이요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더욱 간략하게 집대성한다면, 성경은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이요, 복음에 대한 기록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로마서도 그 외에의 책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우리가 듣고자하는 내용과는 너무도 생소하게 여겨지는 내용으로 되어있음을 봅니다.
마치 도덕교과서나 형사법의 일부분을 읽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가져서는 안 될 인간관계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일들로서 경계해야할 죄목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정당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도 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도덕적인 타락은 결국 인간성까지도 상실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성을 상실하면 여러 가지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읽으며 취해야할 것은 역시 하나님의 복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깊이 심취하고 복음의 넓이와 깊이도 이해하려고할 때, 은혜가 충만한 하나님의 역사가 눈앞에 나타나 보여 질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본연의 자세를 갖춘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본연의 자세를 상실한 삶은, 하나님 앞에서 합당치 못한 삶을 살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1. 인간성을 상실한 성품의 죄를 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죄의 목록가운데,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차있는 자들의 죄는 거꾸로 된 상태에 있는 인간들의 생활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광명의 빛에 비쳐진 인간들의 모습은, 우리의 비행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들입니다.
인간성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합당치 못한 일들을 하게 내어버려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성,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모습입니다.
사탄 마귀가 가져다준 가장 추악한 죄악으로 근본적인 상실된 마음의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합당치 못한 일이란 것은 의무적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반대로 하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지 아니한 그들을 하나님이 버려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반대의 일들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는 일들이 선하다든지?
악하다든지?
좋은 것이라든가? 나쁜 것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하에 있는 인간들의 모습은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불경건한 그들은 온갖 해로운 악으로 가득해서 항상 악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핵심은,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가는 인간들의 죄악 된 모습들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악을 도모하는 사람들의 죄에 대한 이름들을 찾아서, 그 뜻을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불의”(아디키아 ἀδικία)는, 하나님과 인간들의 올바른 규범을 어기고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의”라고 할 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마땅히 행해야할 것으로 정의하지만 “불의”라고 한다면,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말합니다.
악인이라는 사람과 하나님께로부터 그 권리를 박탈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 중심에다가 자기 자신에게 제단을 쌓아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제거하는데 까지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추 악”(포내리야 πονηρία)은 적극적인 부패로, 악을 높이세우는 것을 뜻하는 사악한 행동입니다.
악이란 대체로 그 관계된 사람들에게만 해를 끼치는 행위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고의적인 것이 아니고 무의식적으로 잔인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의 추 악은 해를 끼치고자하는 욕구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자기처럼 악한자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수준에까지 악하게 끌어내린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추 악”함은, 파괴적인 악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탐욕”(폴레오넥시아 πλεονεξία)은 더 갖는 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속한 것들을 욕심을 내는 저주 받은 소유욕입니다.
이것은 침략적인 악행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권리는 물론 심지어 값싼 인정마저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자하는 마음을 말하는 탐욕입니다.
이런 탐욕이 일어나면 불의한 일을 해서라도 욕심을 채우려고 명예나 정직 같은 것들을 무시하고, 돈과 물질들을 취하려는 욕망이 됩니다.
이런 탐욕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에 매여서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에 마음을 둘 수 없게 함으로,(시 119:36) 마치 우상숭배와 같이 물질에 욕심을 갖게 하는 죄악입니다(골 3:5).

탐심을 품은 자는 성공을 하려고 해도 결국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잠언 10:2,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다”
잠언 21: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악의”(카키아 κακία)는 비열함 천함 불량함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선하게 할 품성은 하나도 없는 마음이 구부러진 패역 성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선한권면이나 교훈에 대하여서도, 하나도 까닭 없이 반역하며 자기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남의 자선까지도 방해하는 잔인성의 성품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성품은 선에 대한 까닭 없는 반역의 행위입니다.

무식해서 이런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연약해서 이런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의적인 악한 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죄악들은 하나님을 두지 않은 사람들의 심층 속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죄의 요소들입니다.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간들의 마음은, 곧 남을 해치고 기뻐하며 남을 해치는 것으로 낙을 삼고 사는 것입니다.
남을 해치면서 더욱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이웃에 대한 표현의 죄를 보겠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자기 자신의 더러움을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밝은 빛이 비추어야 비로소 자기 자신의 더러움도 알 수 있고, 남의 더러움도 바라볼 수가 있게 됩니다.

검은 바탕의 천에는 검정색이 묻어도 알 수 없지만, 흰 천에는 작은 티가 묻어도 즉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않고 사는 자는, 죄를 범하면서도 죄에 대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죄를 더욱 크게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롬 6: 23).
그러나 빛 가운데 사는 자, 빛을 따라 사는 자는 죄의 생활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만이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 값이 사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짓는 것을 그치지 않고 계속 죄를 범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죄짓는 것이 옳다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하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도와주거나 죄를 짓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는 죄를 지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지은 죄에 대하여서는 관용하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 눈에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티끌을 빼려고 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먼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남의 죄를 논해야 할 것입니다.
죄는 물 위에서 파문이 번져 나가듯이 확대되어 가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에게 저지른 범죄는 이렇게 죄의 성장이 과격해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악해지면 남의 선한 것까지도 악하게 보고 악으로 갚으려고 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사울 왕은, 다윗의 선함을 오히려 악으로 갚으려고 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임으로 나라 안의 근심이 사라졌고, 온 나라의 백성들은 사울 왕보다 다윗을 높이며 환영했습니다.
사울은 그것을 보고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웃에게 대한 악독한 죄악에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의 죄악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기(포토노스 φθόνος)는 남의 잘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통감을 가지고 해할 수만 있으면 해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잠언 14: 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잠언 27 :4,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클락(Clake)이라는 사람은 이런 예화를 소개합니다.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탐심이 있는 자요 다른 한 사람은 시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누가 말하기를 “너희는 무엇이든지 내게 청구하여라. 그런데 먼저 청구한 사람에게는 그 청구한 것을 주고 다음에 청구하는 사람에게는 그 갑절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그 탐심 있는 사람은 많이 받을 야심으로 먼저 청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 있는 사람은 그 탐심 있는 사람이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을 싫어하여 역시 잠잠하고 있다가 하는 말이, “내 눈을 하나 뽑아 주시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탐심 있는 사람의 눈이 둘 다 뽑히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이와 같이 남과 나를 해하는 악독한 마음으로,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인하여 잡혀가서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살인(포노스 φόνος)은 남의 생명을 해치는 아주 무서운 범죄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죄악인데, 이방인들 가운데 흔히 있었던 죄악입니다.
로마에서는 특히 심하게 일어났든 죄악입니다.
로마인들은 암살과 독살로 노예들을 죽이는 일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살인이 이렇게 극악하게 여겨졌던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남을 미워하여 생명을 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미워하는 것이 벌써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쟁(에리도스 ἕριδος)은 단체생활의 생명을 끊는 죄악으로, 시기, 질투, 분노, 탐욕에서 나오는 죄악입니다.
잠언 17: 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25:8, “너는 급거히 나아가서 다투지 말라”
잠언 17:14,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과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잠언 18 :19,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 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문빗장과 같으니라.”

사기(돌로스 δόλος)는 귀금속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나, 포도주에 다른 불순물을 섞는 것과 같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르지 못한 마음과 삐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성품과 똑바로 행동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악하고 음흉한 방법에 굴복하는 사람, 어떤 이면적 동기가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의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음모를 잘하는 모사꾼들의 재치 있는 간교한 성품들을 두고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사기는 남을 속여가면서 죄를 범하게 하지만, 또 자기를 속여서 자멸의 길을 밟게 하는 행동입니다.
이것은 곧 사탄의 마음으로 해롭게 하는 성품입니다.

악독(카고에 테이아 κακοη θεία)은 모든 것을 가장 나쁘게 해석하는 마음으로 악한성격 간악한 악의를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항상 나쁜 것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이런 사람은 외모로는 남에게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는 체 하지만, 이면과 실제로는 남을 해하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남을 해치려는 사람보다,
더 간악하고 비열한 사람으로 경계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죄악들은 더욱 남에게 해를 끼치는 악으로 발전하기 쉬운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늘 경계하고 주의해야 합니다.

3. 사람에 대한 악평의 죄를 보겠습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남을 훼방하는 악평의 죄입니다.
이것은 독사의 독보다도 악독한 죄악입니다.
독사는 접근하는 사람들만 물어서 해를 끼치지만, 수군수군하는 자들은 남을 악평함으로 수만리 떨어져있는 사람을 해치는 독을 쏟아냅니다.
이런 자들의 악평은 단점만을 악평하는 것이 아니라, 장점까지도 악평합니다.
어떤 일이나 무슨 일이나 악하게만 보고 악평을 합니다.

차라리 독사는 자기를 해치는 사람을 물고 해치지 않으면 물지를 않는데, 이런 사람은 자기를 해치지 않아도 해치는 독을 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의 독은 독사의 독보다도 더 무서운 독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이 잘 되는 것을 파괴함으로 희열을 느끼며 기뻐하는 악독한 사람입니다.

지도자의 소집령이 없는데도 수하의 사람들끼리 모여서 숙덕거리는 것은 악을 도모하는 행위입니다.
가룟인 유다는 예수님을 모르게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악을 도모하는 숙덕공론으로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겼습니다.
수군수군하는 자들의 주동자는 사탄의 간계에 빠지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사꾼들이 되는 사람들은 대개가 성장과정이 좋지 못했거나 원한관계가 있었거나 어리석은 욕심이나 교만에 빠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무식한 사람들에게 중직을 맡기거나 어떤 일에 깊이 참여케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훈련이 없이 갑자기 중직을 맡기면, 교만해질 뿐만이 아니라 정도를 지나치게 행동을 하기 쉬운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시하는 패역한 성품의 사람들이 갖게 되는 죄악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이러한 패역한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이렇게 무서운 죄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발 양심을 지키고 정직하고 공의를 행하며 사시기 비랍니다.



전체 2

  • 2016-10-31 09:08

    귀한말씀 감사합니다!


  • 2016-10-31 22:24

    어떤 사람은 자기는 죄를 지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지은 죄에 대하여서는 관용하지 아니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 눈에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티끌을 빼려고 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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