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김세진(金世鎭, 1965. 2. 2∼1986. 5. 3)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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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조회
801
민주화 열사

충북 충주시 교현동에서 부친 김재훈과 모친 김순정의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80년 청운중학교, 1983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 해 3월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자연 4계열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서울대학교 자연대학 미생물학과에 진입하였다. 1985년 자연대학생회 부학생회장 및 미생물학과 학회장, 1986년 자연대학생회 학생회장 및 서울대학교 단과대학 학생회장단 대표로 선출되었다.

한편 모태신앙인으로 줄곧 자교교회에 다닌 그는 교회의 영향을 크게 입었다. 그가 교회 선생님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자신의 삶과 고민들까지 솔직히 나누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라 생각해 왔던 그는 1984년 7월 자교교회 청년회장을 맡아 한국 역사 속에서 민중의 생활과 농촌의 현실 등을 동료들과 논의하면서, 종교개혁·해방신학 등을 주제로 세미나와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고 농촌활동도 추진하였다.

1986년 4월 28일 아침 관악구 신림동 4거리 가야쇼핑센터 앞에서는, 서울대 총학생회 주관으로 4백여 명의 2학년 학생들이 “반전반핵 양키고홈”,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치며 가두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당시 각 대학에서는 대학생 전방입소 기간을 맞아 대학생 병영 훈련(1981년부터 실시)을 “미제에 의한 용병교육”이라 규정하고 거부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때 반전반핵 투쟁위원장 이재호와 자연대 학생회장 김세진은 전방입소 거부투쟁을 지도하던 중, 예식장 옆 3층 건물 옥상에서 온몸에 신나를 붓고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려는 경찰에게 경고했다. “저 시위대에 덤벼들지 말라. 우리에게 오지 말라. 그러면 우리는 분신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무시한 경찰이 강제로 진압하자 두 사람은 분신으로써 항거하다 추락하였고 10분간이나 방치되었다. 당시 분신현장에서 함께 투쟁했던 손용후의 글이다.

“세진이 형은 불꽃에 휩싸인 채 구호를 외쳤고, 재호 형도 외쳤고, 우리들도 더불어 외쳤고 …… 세진이 형이 구호를 외치다 앞으로 쓰러졌고, 형의 살이 그을려 떨어져 나오며 당구장 옥외 간판을 녹여댔다. 우리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고 끌고 가는 전경들과 맞서 싸우며 아예 한 길에 누워버렸다. 점점 늘어가는 전경들, 소방차가 출동했다. 싸이렌을 울리며 구급차가 오고 우리 모두 전경차에 끌려 들어가고, 구급차가 두 학형을 싣고 떠나고, 전경차도 떠나가고, 모였던 시민들도 하나 둘 젖은 눈으로 떠나갔다.”

몇몇 병원을 전전하다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진 두 사람의 상태는 절망적이었으며, 병원 주변은 삼엄한 경비로 학생들의 출입을 막았다. 병원으로 달려온 세진의 부모님조차 “진짜 내 자식인지 아닌지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못 믿겠다”고 간절히 매달린 끝에 가까스로 아들을 면회할 수 있었다. 약간 의식이 있던 그가 부모님을 알아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죄송해요.”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 이제는 꼭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 “내가 죽나요?” “네가 왜 죽겠니?” “나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아요.” 이후 김세진은 5월 3일, 이재호는 5월 26일 운명하였다. 당시 나이 21세였다.

다음은 분신 이틀 전인 4월 26일 그가 부모님께 보낸 마지막 편지다.

“대학에 들어와 저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눈앞에서 개 패듯이 끌려나가는 선배와 동료를 바라보며 저는 우리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고민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알았습니다. 이 땅 가난의 원흉은, 뼈아픈 분단의 창출자는, 압살되는 자유의 원인은 바로 이 땅을 억압하고 자신의 대소 군사기지화, 신식민지화시킨 외세이며, 그 대리통치 세력인 군사파쇼라는 것을. 저의 대학생활은 인간의 해방과 민중의 해방, 그리고 민족의 해방을 위한 끊임없는 고민의 과정이었으며, 그것의 쟁취를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습니다. …… 저의 행위는 한 순간의 영웅심이나, 학생회장이라는 것 때문에 억지로 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읽은 수백 권의 책과 객관적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고뇌하며 오랜 시간 고민하여 얻은 결론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저를 믿어주십시오. ……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해방된 조국의 땅에서 자랑스러운 아들임을 가슴 뿌듯하게 느낄 때가 반드시 올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저의 투쟁 속에서 그날을 앞당길 것입니다.”

그의 분신은 우리 민족의 생존권이 결코 우리 민족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절박한 상황에 대한 고발이었으며 미국에 대한 경고였다. 그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전개된 반미자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자교교회 청년회는 교인들에게 그의 죽음이 “예수님의 삶을 추종하는 기독교 청년으로서의 의연한 신앙적 결단”임을 알리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문건을 만들어 배포하였으며,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또한 그 해 여름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열고 경찰과 대치중 김수일 회장이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입원하고 회원들이 다수 부상당하는 불상사를 빚기도 했다.

이후 그의 부모님은 유가협, 민가협 회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어머니 김순정 여사는 수기(“우리 모두의 비극이다”)를 통해 이제 기성세대들이 눈을 뜨고 참 민주주의를 향해 싸워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을 다음과 같이 떠올렸다.

“세진이 4학년에 올라가던 때였다. 우리 부부는 세진이를 불러 앉혀놓고 ‘이제 1년 남았으니까 1년만 잘 보내자’고 당부했었다. 전공과목이 미생물학이기 때문에 유학을 다녀오면 앞길이 밝다고 교수들도 누누이 말했던 것이다. 그랬더니 세진이는 덜컥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는 예수 믿는 분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세요? 예수님께선 이 세상에 대접받으러 오셨나요? 지금 고생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머니 자식만 안일하게 출세해서 편히 살기를 바라십니까?’ 그때 나는 이해 못하는 척하면서, 무작정 야단쳤다. 그러나 이 일을 당하고 생각해보니, 그때 야단만 쳤던 내 행동이 한스럽기 그지없다.”

진정 김세진은 80년대 억압과 종속의 역사에 대항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던 시대의 예언자이며 행동하는 감리교회의 청년이었다. 그의 시신은 광주군 노포면 판교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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