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구연영(具然英, 1865. 6. 20∼1907. 8. 24)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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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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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5
민족운동가

구연영은 교회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분이다. 그는 민족 위기의 상황 한가운데서 몸으로 부딪치며 예수의 삶을 살았고, 결국에는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순교했다. 민족을 위한 이러한 활동은 이후 감리교의 전통으로 자리잡아 오늘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구춘경(具春景)으로도 불렸던 구연영은 서울에서 구철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유교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20여 세 때 선향인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궁평리에 정착하여 가업에 정진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명성 황후가 일본인의 칼에 살해당하고, 11월 단발령이 공포되어 강제로 상투를 자르기 시작하자 이를 계기로 유생들이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무력 항쟁하였다. 이때 구연영도 이천에서 김하락·김태원·조성학·신용희 등과 함께 의병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양근(양평)과 지평에서 군사 3백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이천 의병대의 중군장(中軍將)으로 활약하였다.

이천에 의병이 일어난 소식을 들은 일본 수비대 1백여 명이 파견되어 1896년 1월 18일 이천 의병의 첫 전투가 치러졌다. 의병들은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을 습격하여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2월에는 인원을 증강하여 재차 투입된 일본군에 패하였다. 이후 의병들은 남한산성으로 진지를 옮기고 전열을 정비하여 싸움을 시작했으나 동료의 변절로 또 패퇴하였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세 불리를 절감한 구연영은 무력 투쟁으로 항일민족운동이 성과를 얻을 수 없다는 나름대로의 판단 하에 1896년 5월 자기를 따르던 경기도 출신 의병 30여 명을 거느리고 고향인 광주로 귀향하였다. 곧 의병을 일으킨 지 6개월 만에 의병대를 해산하고, 의병운동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게 된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구연영은 1897년 2월 서울 상동교회의 스크랜턴 선교사를 찾아가 자진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처음에는 기독교 신자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힘 있는 종교인 기독교를 이용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그러나 상동교회에서 전덕기와 함께 엡윗청년회를 조직하고 교회 조직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 있는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셔서 죄를 깨닫게 하셨고, 그의 삶을 변화시키신 것이다.

그 후 그는 노곡리 집으로 내려가 자기 집을 예배처로 정하고 집 앞에 십자가를 달아 세워 놓고 예배드리면서 미신 타파와 도박 근절에 힘을 다하였다. 또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상인과 노복들에게도 존칭을 쓰는 등 당시 양반으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을 하였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집안에서 쫓겨났다.

1899년 3월 덕들교회에서 세례받은 후에는 복음을 전하는 매서인이 되어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부패한 지방 관리와 다투어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전도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과거에 의병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악령에 걸린 한 여인도 그의 기도로 회복되었다. 1902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는 지난 1년 동안 1천 5백 마일을 여행하며 성경만 6백 권 팔았고, 그 외에도 상당한 분량의 교리서와 전도문서를 팔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전도활동으로 이천, 광주지역에 복음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고, 곳곳에 교회들이 설립되었다.

1902년에는 권사 직분을 받았다. 권사는 당시의 평신도 지도자로 기도회를 인도하는 등 지역 교회를 관리하는 직분이다. 이 무렵 구연영은 매년 2회 서울, 인천, 강화, 평양 등에서 개최된 신학회에 참석하여 신학교육을 받았다. 신학회는 한국인 목회자 양성을 위한 단기 신학교육제도로, 이것이 발전하여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인 협성신학교가 되었다. 신학회를 통해 목회자 자격을 갖춘 그는 1905년부터는 정식 전도사로 임명되어 이천읍교회를 비롯한 광주, 장호원, 여주, 음죽, 용인, 안성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며 돌보았다.

그러나 구연영은 복음 사역에만 전념하지 않았다. 그는 민중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구국회’를 조직하고, 이천 장호원 여주 광주를 돌아다니며 철시토록 하여 을사조약 철폐를 주장하였다. 동시에 친일 단체인 일진회의 정체를 폭로하는 강연을 하였으며, 일제의 경제 침략에 대항하는 국채보상운동도 추진하였다. 그 대표적인 집회가 이천 장터에서 열린 예수교인 대회였다. 1907년 8월에 열린 이 대회에는 약 2천 명의 인원이 모여들었다 한다.

이와 같은 구연영의 활동은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어질 것이요, 배일자도 근절될 것이다”라는 말이 돌았다. 그의 전도 집회에 참석했다가 은혜 받은 일본인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 피신할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품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니 하나도 두렵지 않다. 나라 없는 백성의 욕된 몸이 되어 벌레처럼 살아간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하며 피하지 않고 계속 전도사업에 매진했다.

예수교인 대회를 마치고 며칠 후 일본군은 구연영의 집을 급습하여 그를 체포하였다. 마침 예수교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내려왔던 맏아들 정서(당시 동대문교회 전도사)도 함께 끌려갔다. 이들은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대항하다가 1907년 8월 24일(음력 7월 16일) 오후 1시경 이천 장터에서 미루나무에 묶인 채 눈을 감고 기도하던 중 총탄에 맞아 순교하였다. 이렇게 “천성이 관후인자하고 활발용감하며 정의감이 강하여, 옳은 일이면 백절불굴하고 실행”한 구연영은 민족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 〈대한매일신보〉(1907. 8. 29)는 이 사실을 “부자구몰­일병 오십여 명이 리천읍 안에 들어와서 예수교 전도인 구연영 구정서 부자를 포살하고 그 근처 오륙 동리를 몰수히 충화하엿다더라”고 보도하고 있다.

구연영 부자가 총살당한 날, 맑게 갠 하늘이 별안간 뇌성벽력과 함께 한 시간 동안 폭우가 쏟아지다가 다시 개어 사람들은 의인이 억울하게 총살당하였기에 하늘이 진노한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고 한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추서하였으며, 1978년 8월 6일에는 이천중앙교회 뜰에 그의 추모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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