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김기범(金基範, 1869. 8. 13∼1920. 3. 27)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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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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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6
한국인 최초의 목사

황해도 연안군 해룡면 금천리에서 태어남. 연안이 고향인 그가 인천에 언제, 어떤 이유로 왔는지 밝혀지지 않지만 인천에서 살다가 서울에서 내려온 감리교 전도인 노병일(盧丙日)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노병일은 올링거 선교사의 파송을 받아 인천에 왔던 것인데 처음엔 ‘미친 놈’ 취급을 받으며 어려움을 겪었으나 5∼6년 전도한 결과 김기범·이명숙(李明淑) 2인의 첫 교인을 얻은 것이다. 1890년에 노병일이 서울로 귀환함에 따라 인천교회 일은 김기범·이명숙 2인이 맡아보게 되었다. 2년 후 다시 서울에서 여자 전도인 백헬렌이 내려와 합류했고 존스(G.H. Jones) 선교사가 인천에 사택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선교에 착수하였으나 교인 얻기가 쉽지 않았다.

인천 제물포교회(내리교회)가 발전한 계기는 1894년 청일전쟁이었다. 전쟁중 피난 가는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교회에 맡기고 갔다가 돌아왔는데 교회는 그것들을 고스란히 되돌려주었다. 십자가를 내건 교회는 청·일 양국 군대의 공격과 파괴에서 제외되는 ‘치외법권적’ 구역이었던 것이다. 이때를 계기로 주일에 4, 50명이 모여 예배하게 되었다. 교인들이 늘어남에 따라 우각동과 용동에 남녀 예배당도 마련하였고 교인 자녀를 위한 남녀 학교도 시작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서 김기범은 존스 선교사를 도와 일을 훌륭하게 처리해 나갔다. 그 결과 1896년 8월 21일 스크랜턴에게 정식으로 전도사 직첩을 받게 되었다.

존스 선교사는 1897년 엡윗청년회를 설립하였다. 1년 사이에 인천의 제물포교회, 평양교회, 서울의 상동, 정동교회(남녀 2개 청년회) 4곳에 5개 청년회가 설립되었다. 인천의 엡윗청년회는 미국 감리교 감독 나인드(W.X. Ninde)의 이름을 따 ‘나인데지파’라 불렀다. 김기범은 이 나인데지파 학문국장으로 교육을 담당하는 한편 전체 한국 엡윗청년회의 총찰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민족의 역량 개발을 위한 교육을 강조하였다. 여성에게만이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한글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기범은 교회 안에 학교를 세우고 그곳에다 한글로 된 각종 책들을 비치해 놓고 가난하고 기회가 없었던 민중들에게 읽히고 가르쳤다.

엡윗청년회의 이러한 민중계몽 및 교육운동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상동교회를 중심한 엡윗청년회의 을사보호조약 무효 상소운동이나 독립군 양성운동 등이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었던 것이다.

김기범은 1898년 원산 전도사로 파송받았다. 원산에는 1893년 파송되어 간 미감리회 의료선교사 맥길(W.B. McGill)이 병원선교를 하고 있었다. 그도 이 병원에 머물면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원산에서 50리 떨어진 안변군 학익골에는 전쟁을 피해와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 집중적으로 전도한 결과 1898년 9월에 그곳 교인 19명에게 세례를 줄 수 있었다. 같은 해에 원산에서도 세례교인 4명이 늘어났다. 김기범의 헌신적인 전도로 1896년에 1백 67명에서 1898년에 2백 20명, 1899년에 3백 9명으로 급속히 늘어났다.

전도하면서 단기 목회자 양성과정인 신학회를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미감리회는 이 과정을 마친 전도사들 가운데 자격이 갖추어진 사람들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1901년 5월 14일 상동교회에서 김기범은 김창식과 함께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황해도 연안으로 파송을 받아 고향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케이블(E.M. Cable)·크리켓(C. Critchett) 등 선교사들과 함께 연안뿐 아니라 해주, 신천 등 황해도지역을 순회하며 전도하고 교인을 돌보았다. 1903년 존스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비게 된 인천으로 파송받았다. 일찍이 교육에 관심을 두었던 그는 강해원, 장내흥 등과 교육회를 조직하고 정식 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1903년에 설립 인가를 받으니 영화학교였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오히려 교회는 발전하여 1904년 말 제물포교회 교인 수는 4백 84명에 이르렀다. 김기범은 건강이 좋지 못했다. 결국 1905년 휴직했다가 1908년 복직했으나 1910년 5월 목사직을 사직하고 진남포에 내려가 휴양하였다. 이후 인천에 돌아와 영화학교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가 1920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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