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김세지(金世智, 1865. 10. 17∼?)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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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조회
844
전도부인

평남 평원군 영유읍에서 딸만 넷 있는 집안의 막내로 출생. 열두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열여섯 되던 해 정씨 성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남편은 2년 만에 자식 없이 사망하였고, ‘청상 과부’로 지내던 그는 1888년 어머니의 주선으로 평양에 사는 김종겸(金宗謙)과 재혼하였다. 김종겸은 본래 강서군 사람이었으나 평양에 나와 살던 홀아비로 재산과 학문을 겸비한 선비였고, 관청에도 출입하는 평양의 유력자며 어느 정도 개화된 인물이었다.

김세지가 기독교를 접한 것은 1893년의 일이었다. 그 당시 감리교 선교사 홀(W.J. Hall)이 평양에 정착하면서 병원·학교·교회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남편은 전처 소생의 두 아이를 예수교학교(후의 광성학교)에 보냈다. 홀은 한국인 조사 김창식과 함께 평양 사람을 대상으로 전도하기 시작하여 강서 출신의 노름꾼 오석형을 동역자로 삼게 되었는데, 오석형이 바로 김종겸의 8촌 아우 되는 친척이었다. 오석형은 김종겸을 찾아가 교회에 나갈 것을 권유했지만 그가 “관청에 출입함을 빙자하고 믿기를 거절”하자 대신 그 부인인 김세지에게 전도하였다. 김세지는 “만일 예수를 믿으면 집안이 평안할 것이요, 남자는 주색잡기를 버리고 살림을 힘써 하여 내외간 화순하게 되리이다”라는 말을 듣고 당시 외도(外道)에 빠져 있던 남편의 마음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오석형을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부인이 교회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교회에서 돌아오던 부인을 구타하고 감금했으며 못된 외도 습관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박해가 심할수록 김세지의 교회에 대한 열정은 더해만 갔다. 그러던 중 1894년 청일전쟁이 터져 평양이 청·일 양국 군대의 격전장이 됨에 따라 김세지의 가족은 남천으로 피난을 갔다가 1년 후에 평양으로 돌아왔다. 피난에서 돌아온 후 남편은 1895년 가을, 주일 아침에 이상한 환상(교회에서 보낸 아이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열었으나 아무도 없었다. 똑같은 내용의 환상을 김세지도 동시에 경험했다)을 본 후 김세지와 함께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김세지의 본격적인 신앙생활은 1896년 노블 부인(M.W. Noble)이 평양에 오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노블 부인은 평양에 내려오던 해부터 ‘오일회’(五日會)를 조직하여 여자들에게 언문과 세례문답, 미이미교(감리교)문답, 묘문답, 신약대지 1, 2, 3권과 4복음 중에서 몇 가지를 뽑아서 가르쳐주었다. 김세지는 집안 일이 바쁜 중에도 언문 쓰기와 읽는 것을 연습하며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여 1896년 10월 노블에게 세례를 받고 세지(Sadie)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 사건에 대해 김세지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오래동안 일홈이 업시 살던 나는 쥬의 은혜를 힘닙어 세례밧던 날노부터 녀자된 권리 에 한가지를 찻게 되엿다. 이로보면 죠션녀자에 해방은 우리 그리스도교로부터 시쟉되엿다고 할만하다.”(《승리의 생활》, 40쪽)

그리스도를 통해 이름을 얻고, 인간 된 권리를 되찾은 그는 1897년 11월 노블 부인이 조선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여자사경회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열리는 대사경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으며 이 사경회가 나중에 ‘여자성경학원’으로 발전함에 따라 그는 학생이 되어 1908년 졸업장을 받았다. 1899년부터 김세지는 노블 부인의 추천으로 미감리회 여선교회에서 월급을 받는 전도부인(Bible Woman)이 되었다. 김다비다, 이이사벨, 김서커스, 강도르가 등이 평안도·황해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부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김세지는 김다비다와 짝이 되어 평양 시내와 대동강 건너 복룡동·칠산리·왜성 등 아홉 고을을 돌며 전도하고 교리·전도서를 팔았다. 그러던 중 1902년 남편 김종겸이 콜레라로 사망하였고, 김세지는 이를 신앙으로 극복하고 이전보다 더 적극적이고 활발한 전도생활을 하였다. 그는 과부·기생·판수·무당·고아 등과 같은 소외된 계층의 여성들을 주요 전도대상으로 삼았는데, 1903∼1915년의 선교사 보고에 의하면 그는 매년 2, 3천 회의 가정방문을 실시했고 해마다 30여 명의 새 신자를 얻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세지는 또한 교회 안에서 여성 조직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1903년 교회 여성들로만 ‘보호여회’(保護女會, Ladies Aid Society)를 조직하였으며, 이 모임을 통해 여성들의 자기 능력 계발과 조직적인 구제활동을 펼쳐나가 평양지역 여성운동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이 보호여회는 1911년부터는 시상리에 전도부인 1명을 파송할 수 있었고, 1912년에는 만주에 선교사 1명을 파송하였다. 또한 그는 1916년 교회 안의 과부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과부회’(Widows Relief Association)까지 조직하여 과부들의 자립과 봉사를 꾀했다. 이처럼 여성 조직을 창설하고 지도해 가면서 김세지는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그는 1919년 11월 감·장 연합으로 조직된 ‘대한애국부인회’에 적극 가담하여, 부재무부장의 직책을 가지고 감리교회 여성들의 모금의 실질적인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애국부인회는 1920년 10월경에 일경에게 조직이 탄로났으며 이로 인해 김세지도 검거되어 비인간적인 고문과 악형을 받은 후 불기소로 풀려났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1921년 석방된 후 그는 일경의 감시와 방해 속에 와해된 보호여회를 70명의 회원으로 재건하고 여전히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하였다. 평양의 보호여회는 1923년 미감리회 조선여선교회에 흡수 병합되었고, 김세지는 그때까지 모아놓은 기금으로 칠성문 밖에 교회 하나를 개척하였다.

1925년 60세가 되던 해 그는 전도부인직에서 은퇴한 후 광성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는 아들 김득수, 양주삼 목사의 부인이 된 딸 김매륜, 변홍규 목사의 부인이 된 김반석을 위해 기도하며 말년을 조용히 보냈다. 1933년 제3회 감리교 종교교육대회에서 종교교육 공로자 표창을 받았고, 해방 후 월남하여 막내 사위인 변홍규 목사 댁에 머물다가 별세한 것으로 전해진다.

논문:“나의 과거생활”, 《승리의 생활》, 조선야소교서회,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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