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9-26 감신대 개교기념일 예배 설교
희망을 투자하라
마 13:45-46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개교 119주년을 맞은 감리교신학대학교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감신의 역사는 곧 121주년을 맞은 한국감리교회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많은 감리교 목회자들은 감신을 모교로 삼았고, 신학의 고향이요, 삶의 자랑으로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과거 선배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 감리교회의 자화상이 되었고,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우리 감리교회의 청사진이 될 것입니다.
저 역시 평생 감신의 구성원이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목회하면서 감신성(監神性)이 가르쳐준 ‘신학 하는 길’과 ‘목사다움’을 의식하면서 지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요즘 동문들 중에 감신의 정체성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왜 감신 동문들은 모래알 같이 응집력이 약하냐는 소리를 합니다. 사실 이해관계에 둘러싸여 서로 편을 가르고, 학연을 들먹이는 일은 부끄러운 구시대적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감신 출신이란 명예를 편가름이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모교를 욕되게 하는 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찢는 일입니다.
바라기는 보다 선한 일을 위해서, 또 의로운 일을 위하여 어깨를 겨루고, 연대하십시오. 협력하고 사랑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답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더욱 충성을 다하기 위해, 또 한국감리교회를 새롭게 하고, 더 나아가 한국 사회를 보다 평화롭게 하기 위해 기도와 지혜와 사람을 모으는 일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런 희망의 사람이 되길 기원합니다.
121년 전 한국 땅에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은 27세의 미국인 아펜젤러 목사였습니다. 그가 전해 준 복음은 우리 민족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또 그가 복음을 전한 모든 과정은 하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펜젤러, 그 자신이 우리 민족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는 왕과 지배 권력인 노론이 지배하던 봉건국가였습니다. 사람들은 유학을 신봉하였고, 타문화에 대해 폐쇄적이었으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유교의 전통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인 극소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투자해 말씀을 받아들였고, 인생을 바꾸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랐습니다. 그 가운데 보물 중의 보물, 진주중의 진주를 소유한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의 선배였고, 우리 한국감리교회의 역사가 된 분들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투자의 기법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사업하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잘한 것 여러 가지 사고, 파는 것보다 큰 것 하나 제대로 만나야 이익이 괜찮은 법이라고 합니다. 물론 아무나 값진 것, 귀한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나 사업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지혜로운 상인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투자할 만큼 지혜롭고, 과감하며, 투자의 우선순위를 아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물과 함께 값진 진주의 비유는 천국을 빗대어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천국을 소유하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자신을 전부 투자하여 그 나라에 속하려고 결심하는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전적인 투신에 앞서서 그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그 투자를 결단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느끼는 예지가 필요하고, 그 나라에 참여해야 함을 몸으로 결단하는 의지가 요구됩니다.
사실 이 일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수지타산에 맞추어 하나님의 은혜를 계산해온 사람들은 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농부에게 좋은 암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암소가 새끼 두 마리를 낳았는데, 붉은 송아지와 흰 송아지였습니다. 농부는 아내에게 다짐하며 “이 두 마리를 잘 길러서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립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아내가 “어떤 붉은 것과 흰 것 중 어떤 송아지를 드리려고 해요?”라고 물었으나, 농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아도 돼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몇 달 후에 농부가 걱정스런 얼굴로 집에 돌아와서 이렇게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쁜 소식이요.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송아지가 죽었소.” 그러자 아내는 의아해 하면서 “당신은 어떤 송아지를 드릴 지 아직 결정하지 않았잖아요”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농부는 말하기를 “나는 마음속으로 흰 놈을 결정했었소. 그런데 흰 놈이 죽었다니까. 바로 하나님께 드리려던 그 소가 죽어버렸소.”
비록 우화일지라도 우리 내면의 적나라한 모습을 잘 풍자하고 있습니다.
진주에 대한 비유는 더 나아가 진정한 제자됨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적당히 투자한 진주장사는 적당한 수지에 만족하고 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주장사에게는 ‘적당히’가 없습니다. 비록 진주의 가치를 비록 산술적으로 계량화 할 수는 없지만, 성경은 ‘전부’와 ‘전무’라는 양 극단을 표현함으로써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따르려던 서기관에게 예수께서 하신 대답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작정한 사람은 전적으로 자신을 투자해야합니다. 그 제자됨은 예수처럼 고향도 없고 보호막도 없는 처지에 동참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투자가는 빈털터리가 될 각오도 할 수 잇어야 합니다.
이러한 투자를 통해 나를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고, 죽음에서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는 그 계산할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소유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듯이 값진 진주를 소유하는 것은 더 큰 포기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에서 예수님은 주님을 쫒으려던 부자 청년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쫒으라”(마 19:21). 부유함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불의가 될 수 있으며, 그것 자체 때문에 그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차지하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복음교회 운동을 전개한 최태용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한 가지 자랑을 가졌다. 바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자랑이다. 우리의 자랑이 주의 영광이 되는 의미에서 자랑이 많은 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지난 선교 120년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는 큰 부흥과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교회는 사회로부터 많은 불신을 받고 있습니다. 선교 초기에는 민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면서 신뢰를 받았지만, 오늘에 와서는 분열주의, 세속주의, 기복주의가 판을 치고 있어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감독회장이 되면서부터 ‘희망의 전도사’ 노릇을 자처한 까닭은 바로 교회가 다시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복음의 기본으로 돌아와야만 교회가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한 마디로 오늘 우리 교회가, 목회자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예수!” 입으로만 “주여!”를 외칠 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영접했지만, 내 삶의 중심에 모시지 않고 가장자리에 방치해 두었습니다. 자기 것도 움켜 쥔 채, 하늘의 것도 차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았지만 청지기의 노릇보다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나타난 가장 큰 특색은 겸손과 복종과 헌신이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지배하기를 원치 않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봉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길을 원치 않았고, 다만 하나님의 길을 원했습니다. 주님은 높임을 받기보다, 인간을 위해 자신을 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당신을 모두 버리셨습니다.
2007년도는 영적대각성운동이 시작되고 난 후 평양에서 폭발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평양대부흥의 출발은 1903년 8월, 원산에서 시작되었고, 특별히 우리 감리교회의 하디 선교사를 비롯하여 감리교인들이 부흥운동의 주역들이었습니다. 이번에 감신의 교수님들이 앞장서서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와 영성집회를 개최하는 일은 매우 감사하고, 뜻 깊은 일입니다. 여러분도 많이 참석하여 위대한 영적부흥의 전통을 되새기고, 오늘 우리 시대에서 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섬길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디 선교사가 본부에 보낸 선교보고서에 따르면, 영적각성운동 이전의 문서에는 한국인들에 대한 실망과 정죄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적각성운동 이후에는 성령의 임재로 이루어진 내적 변화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즉 실망이 희망으로, 좌절이 감사로 변하는 감격의 생활을 가능케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1903년 여름, 원산에서 일어난 회개와 중생의 체험 때문입니다. 당시 회개의 내용을 보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것은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또 은총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처럼 편안하게 자복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충격과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우리 감리교회가 희망을 이루어 가기 위해 먼저 영적각성이 선행되어야 함을 굳게 믿습니다. 철저하게 감리교인다운 감리교인으로 변화되는 경험을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그것은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던 처음 메도디스트들의 마음과 행함을 닮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이고,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웨슬리는 예배당을 크게 짓고, 교세를 확장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바로 서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초창기 감리교인들은 겨우 1%에 불과했지만 영국 사회에서 불쏘시개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무기는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 감리교회는 정체성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책을 세우고, 영적각성운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웨슬리 영성입니다.
웨슬리영성은 무엇입니까? 우리 감리교와 장로교는 서로 어떤 차이가 있느냐라는 이야기를 나눈 일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장로교는 ‘지키는’ 교회이고, 감리교는 ‘바꾸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 칼뱅과 존 웨슬리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교리를 지키고, 제도를 지키고, 질서를 지키는 교회가 바로 장로교회입니다. 따라서 변화를 싫어하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감리교회는 늘 새로워지는 교회입니다. 존 웨슬리는 영적으로 회심을 하였고, 성공회가 금지하는 옥외집회를 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 낮아졌으며,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생명력이 있는 교회요, 가슴이 뜨거운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희망의 공동체였고, 이제 이러한 웨슬리의 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이러한 위대한 영적인 복음의 유산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전에는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상태였으나 복음이 힘 있게 증거 되는 그런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 진주장사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는 가장 희망이 있는 투자에 대해 가르친 분입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경제생활에 대해 ‘세 가지 간단한 규칙’을 정하였는데, 아주 유명한 명언이 되었습니다.
“가능한 한 많이 벌어라.”
“가능한 한 많이 저축하라.”
“가능한 한 많이 나누라.”
이것은 1748년에 하신 설교에 있는 내용입니다. 웨슬리는 경제적인 소득추구와 함께 사유재산의 사회적 의무를 주장하였습니다. 웨슬리는 ‘불의한 맘몬’이지만 신실하게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벌고’, ‘많이 저축하는’ 두 가지 규칙은 지키면서, ‘많이 나누는’ 세 번째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무신론적’ 이라고 단정하였습니다.
즉 인간의 사유권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소유권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투자입니까? 그것은 희망을 만들어가는 투자방식일 것입니다. 값비싼 진주를 구하고 투자할 줄 아는 진주장사의 방식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신학수업 기간을 희망에 투자하십시오.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구구절절 희망의 책입니다. 하나님께 투자한 사람들의 생애로 가득합니다. 고난을 이겨낸 진정한 승리의 비결,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선 성공담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믿음을 갖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하신 희망이 되십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시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바라기는 여러분께서는 “희망을 주는 감리교회”를 위해 앞장서 주시고,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투자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러분과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이 땅에서 참된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희망을 만들어 나가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