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채플 설교(고난주간)(2006.4.13)
십자가의 은총
누가복음 23:33-43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연세대학교 루스 채플에서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이 자리에는 기독교인도 있지만 아직 교회의 문턱에도 가보지 않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신앙적 풍토의 연세대학교 분위기에 익숙한 분도 있지만, 여전히 낯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신 고난주간입니다. 교회의 달력으로는 고난주간 목요일인 오늘 12제자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시고, 내일 금요일 정오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번 성주간이라고 부르며, 가장 엄숙하고 경건하게 지냅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할 때 주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될 줄 믿고, 소망합니다.
여러분은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를 잘 알 것입니다. 그는 자화상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렘브란트는 이삭의 희생이나, 돌아온 탕자와 같이 성경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그가 여러 작품 속에 자신의 얼굴을 삽입해 그려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순교자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성난 군중 가운데 한사람으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의 한사람으로 자신을 그려 넣었으며, 또 돌아온 탕자의 모습 속에 자신을 닮은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도 거기에 있었어요.” 렘브란트는 자기 그림을 통해 자신의 죄를 변명하고, 자신의 악역을 부끄러워하고, 자신을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렘브란트와 함께 그 악역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는 대단히 모순적입니다. 십자가에는 가장 무거운 고난과 함께 또한 영광이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드러난 고난과 영광이란 모순과 역설은 바로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하게 되길 바랍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가장 몸서리치는 잔혹한 처형방식이었습니다. 로마 통치자들은 로마시민 아닌 사람과 노예에 대한 처형방법으로 십자가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후 십자가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십자가가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에게는 자랑이요, 찬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전도자였던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골 1:20).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은 실토하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갈 6:14)라고 하였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도대체 십자가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이신 분이 멸시와 천대 끝에 두 강도의 십자가 사이에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강도와 똑같은 모습으로 십자가형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강도 같은 죄인으로 십자가에 처형한 사건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잘못된 판결이요, 가장 큰 인간의 오류였습니다.
강도들의 십자가 사이에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강도들보다 더 무거운 온 인류의 죄가 처형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저주 받은 나무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모든 죄를 처리하는 저주받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악을 불태우는 쓰레기장과 같은 곳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만큼은 인류의 모든 죄를 함께 끌어안고, 그 죄 값을 치루는 가장 저주받은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강도들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었던 어떤 악질적인 죄수보다 더 중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감상적인 눈으로 보면서 눈물을 흘릴 것이 아니라, 거기서 소멸되어가는 인간의 죄를 직시하면서 떨림과 두려움으로 그것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강도들 사이에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내 죄가 얼마나 무겁고 중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에 예수의 십자가를 진정으로 감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한 두려움과 깊은 자각이 앞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강도들의 십자가 가운데 서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큰 구원의 능력이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믿겠다고 조롱을 하였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구원하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생각한대로 그리스도 됨이 그런 작은 능력을 나타내는데 있는 것이 아님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됨은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포기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로만 생각해서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로 그 능력의 근원이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는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달린 다른 한 강도는 자기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에게 간구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당장, 여기에서 구원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죽음은 자기의 죄 값으로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강도인 그도 자신의 죄 값을 치루지 않은 채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구원을 간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강도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였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
이 약속을 받은 강도는 그 즉시 자신의 고통을 덜거나, 아니면 기적적인 방법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구원은 이 땅에서 어떤 놀라운 기적을 동반하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희생의 역사임을 알게 됩니다.
초대 교회인 2세기 무렵, 십자가의 효험에 대한 소문이 커졌습니다. 십자가 조각을 갖고 있으면 몸에 병도 낫고, 부자도 되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낭설이 급격히 퍼졌습니다. 이런 만사형통 소문 때문에 가짜 십자가 조각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수집되고, 장삿속으로 매매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런 우려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가 매달리셨다고 주장하는 십자가를 다 모으면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재건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아픔이나 대속의 신비는 사라진 채, 십자가가 값싼 부적이나 금붙이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어리석은 기도를 들어주려고 거기서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보잘 것 없는 인간의 이기적인 욕구를 이루어 주기 위해서 그 언덕에 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여학생이 이렇게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저를 날씬하게 해 주세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무리 하나님이어도 자기 몸을 날씬하게 만드시기 어려워 보였나 봅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날씬하게 해주시기 어렵거든, 제 친구를 뚱뚱하게 해주세요.”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지난 해 사순절 기간에 우리 감리교회에서는 선교 120주년을 맞아 ‘세계의 십자가 전’을 연 일이 있습니다. 그 때 주최했던 우리는 깜짝 놀랐습니다. 첫째는 신문과 방송을 막론하고 모든 언론기관이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둘째는 열흘 동안 만 명이 넘는 관람객에 놀랐습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전시된 십자가가 얼마나 다양한지, 민족과 나라에 따라 십자가 형태가 얼마나 고유한지, 십자가를 빚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는 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십자가는 저마다 다른 고난의 질감을 갖고 있습니다. 아픔이 얼마나 위대한 노래를 만들 수 있는지, 고난으로 가득한 슬픔조차 얼마나 진정한 기쁨의 노래를 담고 있는지 십자가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에 있는 떼제 공동체는 “아픔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창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마음이 찢어질 때, 곧 상한심령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비로소 최선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를 가리켜 해체의 시대라고 합니다. 중심의 해체가 선언되어 버린 탈중심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삶의 심장부에다 튼튼한 중심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모시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스스로 중심을 해체하고, 변두리로, 낮은 곳으로, 그 소외와 곤궁과 비참의 자리로 자신을 이동해 온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영원한 희망이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에로스는 올라가는 사랑이지만, 아가페는 내려오는 사랑입니다.
에로스는 자신을 격상시키려는 욕망이지만, 아가페는 자신을 내어 던지려는 의지입니다.
예수를 아가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가 내려오는 사랑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던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있다는 약속을 이루기 때문에 큰 능력입니다. 그 십자가는 강도같이 완악한 자라도 즉각적으로 그를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빛나는 것입니다.
저 유명한 시인 박두진 선생은 시‘갈보리’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두움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 있었는가?
또 물 같은 치욕을, 분노 같은 분노를, 에워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당신은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가?
꽝꽝 못을 박고 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 해 때리고
입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
그 원수들을 어떻게 사랑 할 수 있었는가?”
박두진의 외침 ‘어떻게’는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
테레사 수녀는 “가장 큰 병은 결핵이나 문둥병이 아니라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빵이 배고픔을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빵 속에 담긴 사랑이 배고픔을 멈추게 하는 법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는 여러분!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좌 우 편에는 두 강도가 있었지만, 오늘 우리가 십자가를 향할 때에도 두 가지 방향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있고, 다른 하나는 세상 앞에 바로 서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두 방향의 회개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25시>로 유명한 작가 게오르규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루마니아 정교회의 신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는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게오르규는 잠수함을 타는 해군이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잠수함에는 토끼장을 필수적으로 싣고 다녔는데, 토끼는 잠수함 안의 산소를 측정하는 일종의 계기 역할을 하였습니다. 게오르규의 임무는 바로 토끼를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방교회의 사제로서, 또 문학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잠수함의 토끼처럼 시대와 역사의 흐름 앞에 민감하여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잠수함 안에서 토끼를 감시하는 병사처럼,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름지기 지식인이라면 이 역사의 파수꾼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우리 시대의 나침반이요, 영원한 구원의 표지판인 십자가로 초대하시길 원합니다. 특히 우리 민족의 미래를 짊어지고, 내일을 열어갈 여러분을 통해 고난 받는 이 민족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길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구원의 세상을 이루어 가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