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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가 희망하는 감리교회

작성자
김규태
작성일
2019-04-19 17:37
조회
1182
안녕하십니까? 저는 호남선교연회 익산지방 영생교회를 섬기는 김규태 장로입니다. 선배님들과 함께 영생교회를 개척하여 섬기어 오고 있으며 조금 일찍 장로가 되어 지금 만 33년 2개월 장로로 섬기는 좀 그을린 장로입니다. 연회 장로연합회장, 연회 남선교회 연합회장을 거치며 연회를 섬기어 왔다고 인정해 주셔서인지, 이번 우리 호남선교연회가 큰 뜻을 품고 진행하는 목적을 위한 공청회 시간에 관리자님께서 '평신도가 희망하는 호남 선교연회'라는 주제로 발제를 해주시라기에 제가 평소 평신도로써 가졌던 생각을 짧은 시간이지만 나름대로 모아서 발제를 하였습니다. 제가 발제를 한 이 생각은 비단 우리 연회 뿐 아니라 우리 감리회, 더 나아가서는 '한국의 모든 교회가 이렇게 변하여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염원이 있기에 가감없이 여기에 올려봅니다. 생각에 따라서는 지역성이 있고, 듣기 거북한 면도 있을 줄 압니다만 헤량하시고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족한 종의 글을 읽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1. 주님의 현존하심을 느끼며 사는 호남선교연회
1) 기독교는 학문도, 철학도 사상도 지식도 아니고 예수의 말씀을 믿고 예수의 말씀대로, 성경 말씀대로 사는 삶이 기독교라고 믿습니다. 삶이 없으면 아무리 달콤하고 은혜스러운 말씀이라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리더들인 목사와 장로가 먼저 말씀대로 사는 삶에 앞장서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과 한국 초기 선교사들과 성도들은 오직 말씀대로 살려는데 온 힘을 다했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았으며 박해에는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가슴 아프고, 슬픈 현실이지만 현재 우리 한국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칭찬은 커녕,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2) 우리의 목적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온전케하여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것입니다. 그러므로 감리교회 내 모든 조직의 모든 회의와 행정은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이 말씀하시는 것이 목적이 되고 우리의 논의는 그 뜻을 실현하는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논의의 목적과 방법이 어떤 개인의 의도를 이루는 것이나 비위맞추기가 되거나 일부 몇 사람의 이익 집단의 권위 부림과 누림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이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심을 믿는다면 절대 그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문밖으로 내몰고 우리끼리 우리의 목적을 위해 논의 할 때가 많다고 느껴집니다.


2. 누리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는 호남선교연회.

1) 교회의 목사와 장로는 예수님의 세상 구원 사역과 교회와 성도를 위해 주님께서 자기 대신 세워 주신 섬김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리더는 특권 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목사가 교회를 내 소유인양 마음대로 좌우지 하려고 해서도 안되고, 장로가 교회를 좌우지 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교회가 가야할 방향의 키는 오직 성경이 쥐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와 장로가 말씀에 인위적인 가치관과 단편적인 말씀을 갖다 붙이며 교회를 목사와 장로의 입맛대로 움직이려하고 누리려고만 한다면 있을 수없는 일입니다.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을 섬기러 오셨다 하셨으며,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교리적 말씀을 마친 후 12장부터 시작되는 생활실천적 말씀에 첫 번째로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항상 분별하여 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말씀입니까? 세상적 가치관입니까? 우리 스스로 우리의 괴리된 삶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2) 교회는 리더가 총을 들고 앞장서야합니다. 뒤에서 총으로 병사들을 위협하며 병사들을 희생 제물로 내모는 군대의 장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생활을 상기해보아야 합니다. 그 분은 두벌 옷도 없으셨고,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팔짱끼고 입으로만 말하는 리더가 아니라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작업복에 성도들과 이웃의 아픈 곳과 힘든 곳을 만져주는 리더가 되어야 하며, 내 것은 물질이고, 시간이고, 노동이고 희생하지 않으면서 대접 받으려하고, 누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헌금과 시설과 물건은 모든 평신도 특히 초신자가 감동 할 수 있는 사역에 쓰이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외모를 너무 중시하고 행사와 건물과 형식과 의식과 조직의 유지, 친교에 너무 많은 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모든 물질은 예수님이 목적 하신 선교와 교육과 소외당한자, 병든 자와 연약한 교회와 형제들의 돌봄에 집중되어져야 합니다. 외모 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일해야 합니다. 우리 연회는 그런 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분수를 지키며 살면 좋겠습니다. 우리 연회는 돈 많은 남의 연회 하는 대로 따라 하려면 가랑이 찢어지고 할 일 못합니다. 형식과 의식과 특정인들의 친목에 쓰이는 돈은 줄이고 선교와 교육, 봉사에 헌신해야 합니다. 한 가지 제안을 한다면,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하던 감리사와 단체장의 이·취임식을 연회 후 한날을 택하여 연회에서 합동으로 이취임 축하예배로 드려 축하드리고, 그 날 필요한 접대나 행사비는 취임 단체장들이 공동 부담하여, 성도의 귀한 헌금이 교회의 본질을 이루어 나가는데 더 쓰이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4) 목회자는 평신도를 세워주고 평신도는 목회자를 세워주는 풍토를 갖추었으면 합니다. 교회는 패권다툼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자 주님의 것이지 목회자의 점유물도 아니고, 장로의 점유물도 아닙니다. 성도 또한 예수님의 자녀들이고,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지 목회자나 장로가 권위를 부리는 대상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의 병폐중 하나는 목회자와 장로가 견제와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고생한 장로를 꺾으려하고, 장로는 그러한 목회자를 박해하고, 내쫓으려하고 그 과정에서 실망한 교인과 목회자와 장로의 자녀들이 신앙에서 떠나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모습이 한국 교회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고 높여주고 섬기는 모습을 평신도들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께 충성하면 나도 삶의 가치를 느기고 저런 존중을 받는구나 하고 헌신하는 분위기가 고조될 것입니다.


3. 오늘 이 순간의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호남선교연회.

1) 무관심의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호남선교연회는 한 사람이나 어떤 한 집단의 소유물이 아니라 이 지역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조직된 하나님의 몸입니다. 따라서 우리와 개교회는 연회라는 몸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지체입니다. 그런데 가끔 느끼는 것은 몇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처럼 보이고 나머지는 무관심하게 그저 방관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특히 젊은 목회자에게서 느끼는 것은 ‘호남연회는 징검다리이다. 그래서 여길 건너 내 목적지를 향하여 가면되니 굳이 이 곳에 내 열정을 쏟을 필요가 있나?’ 하는 소속감과 관심이 결여된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또한 평신도들도 연회가 어떻게 되든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내 교회나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좋겠다. 하고 무관심한 평신도들이 많이 있음을 봅니다. 무관심은 죄입니다. 그러나 무관심의 타성이 생기게 된 데에는 여러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후에 그 부분은 면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지금 이 순간 이곳 (Here and now and This place)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열정을 가져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호남선교연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 들입니다. 충성된 청지기는 내가 일하고 싶은 장소를 골라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현재 서있는 그 자리에서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남 연회의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연회가 바로 서 갈수 있도록 기도와 아울러 내가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해 일을 하고 또한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는 소리를 내어 연회를 바로 세워가야 하며 이곳에 주님께서 이루려고 하신 일을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4. 감리교회의 공식 조직들이 활성화 되는 호남선교연회
1) 공과 사를 구분하며 일해야 합니다. 개인들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이 연회의 행정과 연회의 기관들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학교, 지역, 친교의 단체들이 연회나 지방의 행정이나 사역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준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는 예수의 말씀을 명심해야합니다.

2) 연회의 모든 사역과 활동은 공식 단체가 활성화 되어 일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참여의 길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고 제약이 없어야 합니다. 형식적으로는 개방되어 있다 하지만 내적으로 압력과 힘이 작용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몇몇 사람의 사적인 이익과 권력을 위해, 공적 조직을 장악하며, 승계하여 공적 조직에 영향력을 주며, 사적인 조직의 결정이 공적인 조직의 방향을 좌우지해서는 안 됩니다.

3) 회원들의 분포를 감안하여 안배하는 조직과 행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지방은 장로 숫자가 10명 미만인 지방이 있고, 어떤 지방은 장로 수가 50명인 지방이 있는데 모든 행정적 인원을 지방별 균등 수로 분배하면 어떤 지방은 몇몇 인물들이 매년 계속 돌려가며 하고, 어떤 지방은 일 할 수 있는 인재들이 있어도 세우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부분은 참고하여 고려가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5) 후대를 집중 육성하는 호남선교연회
1) 지금 한국교회의 젊은이들의 복음화 율은 미전도 종족에 가까운 5% 미만입니다. 기성세대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이 땅에서 예수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2) 후세대들의 육성을 위하여 특별 대책을 세워야합니다. 그리고 비전교회나, 소규모 교회에서 경험 할 수없는 교육이나 선교활동, 예를 들어 해외선교나 성경학교, 봉사활동, 비전 트립 등을 지방 단위나 연회 단위로 계획하여 실행을 해야합니다.
3) 후세대들에게 뚜렷한 가치관을 심어주기 위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지금 젊은이들이 교회에 오지 않는 것은 교회가 잘못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삶의 순서를 기억 해보십시다. 예수는 세상에서 소외되고, 억압당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고 위로 자가 되면서 천국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힘들다 하면 들어주고, 아프면 고쳐주고, 먹을 것이 없다면 기적을 베풀어서라도 먹을 것을 주면서 당신은 힘들고 잘 곳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위로와 소망을 주면서 천국의 가치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리더들의 생활을 보자. 종교적 권위와 종교적 권력과 종교적 사치에 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교회의 힘들게 살면서 헌신하는 차상위계층, 과부와 홀아비 평신도들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우리 리더들의 지향점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지향점이 이 세상과 똑 같다면 그것이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생각한다면, 지각 있는 젊은이들이 이 힘든 세상에 뭣 하러 시간 들여, 물질 들여, 힘들여 교회에 오겠습니까? 만약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가도 볼 것도, 배울 것도, 나에게 도움 될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입니까? 지금 한국 교회가 율법에서 해방시키는 예수를 역행하여 율법화 되고 있지 않는지 자성 할 때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감리교회의 창시국인 영국과 유럽의 전처를 밟지 않으려면 예수를 믿음으로써 참된 삶과 진정한 행복이 있고, 그 곳이 교회라는 신념을 젊은이들에게 심어 주지 않으면 앞으로 교회는 쇠퇴할 수 밖에 없습니다. 후세대를 위해 기도하며 그들에게 투자해야 합니다. 우리 연회는 후대를 준비하는 연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전체 3

  • 2019-04-20 09:32

    감리회는 정회원제도를 두고 있으니...
    정회원이 권한도 책임도 많다고 할 것이다.
    감리회 장로는 교회공동체를 섬기며 다만 협력할 뿐이다.


  • 2019-04-20 09:38

    감리(監理)

    산돌 함창석 장로

    <들음>

    웨슬레 신학은 그 출발과 형성에서부터 특징을 지니고 있다. 웨슬레는 본인이 어떻게 하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느냐 하는 심각한 실존적인 탐구에서 마침내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신앙 체험'을 하고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신학은 이런 선교의 광장에서 개진되었다.

    웨슬레는 신학이 실제의 신앙생활과 체험으로 옮겨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웨슬레의 신학은 추상적인 논리에 빠지는 과오를 범치 않을 뿐 아니라, 어떤 학자가 말했듯이, 전통적으로 이어 내려온 신학과 교리에 피와 살을 붙여서 인간의 삶 속에서 말하는 산 신학(living theology)을 만든 것이다.

    웨슬레의 표준 설교집의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는 설교를 통하여 '성서에서 발견한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려는 것이 그의 주요한 관심이었다. 그의 설교와 구원론의 전제가 되는 '하나님의 은총 곧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 그리스도의 대속'과 구원론 그 자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웨슬레는 인류의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 곧 구속의 은총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 사람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웨슬레가 '세계가 나의 교구'라고 위치며 전도하게 됨에는 바로 이 구원의 은총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확신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웨슬레는 성화를 더 강조하였다. 사실 웨슬레의 구원론은 성화론 중심의 구원론이다. 윌리암 홀돈이 지적한대로 웨슬레야말로 성화의 교리를 어느 신학자보다 강조하고 괌 범위하게 개진한 학자일 뿐 아니라, 이 성결의 복음을 통하여 18세기 영국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한 전도자이다.

    <본말>

    1.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총

    신학자 스케빙톤 우드가 지적한대로 웨슬레의 설교에서 종교 개혁자들이 내세웠던 ‘은총으로만과 믿음으로만’의 표어가 메아리 쳤다. 웨슬레는 복음을 말함에 있어 먼저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자기구원을 위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라는 것을 전제하였기 때문이다.

    2.1.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

    웨슬레는 인간의 죄를 심각히 인지하였다. 웨슬레에 의하면 아담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상실했고 영적인 생명의 관계를 상실했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과 의지와 자유의 기능은 부패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사랑과 순종은 자기사랑과 자기의지로 대치되었다.

    아담은 인류를 대표하는 시조임으로, 범죄 하였을 때 그 영향은 온 인류에게 미쳤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고, 진노의 자식이 되었다고 보았다. ‘진노의 자식’이란 원죄의 죄책을 함축하는 말이다. 아담의 죄로 인하여 죄책이 모든 사람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웨슬레는 변론하기를, 지금까지 어느 시대 어느 사람이든지 심지어 영아들까지도 죽음을 맛보았다는 사실은 이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왜냐하면, 죄로 인하지 않고서는 죽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영아가 죄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주가 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웨슬레는 인간의 죄를 강조하는 면에서 어느 학파 못지않게 강하다. 만약 우리가 영아의 원죄를 부정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순전하고 죄책도 없는 피조물을 형벌 한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영아도 원죄를 물려받은 죄인이며, 따라서, 결국 그리스도가 없다면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는 ‘이것이 이방종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첫 근거라고 한다. 그러기에 웨슬레는 ‘은총 만이요’를 주장하는 정통 신학자이다. 일부에서 웨슬레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한다 하여 그가 마치 자유주의 신학자이니, 인본주의 신학자이니 하는 말은 웨슬레를 올바로 이해 못한 데서 나오는 주장이다.

    2.2.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

    그러면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어떻게 보았는가? 위에서도 말했거니와, 웨슬레는 그의 신학을 설교의 광장에서 개진했다. 설교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가르침(the whole council of God)’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련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의 은총’을 강조한다. 듣는 자의 호응(회개와 믿음)을 호소하곤 하였다. 웨슬레의 인간론은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 언급되어야 되는 실존적인 상황이었다. 웨슬레는 인간의 죄 문제를 구속론적 구조에서 본 것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인간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원죄의 죄책은 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제거되었으며, 모든 사람에게는 초자연적으로 약간의 자유의지가 회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웨슬레가 말하는 인간의 복음에 대한 호응(곧 자유의지와 책임)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서, 곧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기안한 것이다.

    은총은 선행적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이다. 웨슬레의 은총관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전도로 연결된다. 또한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책임을 올바르게 찾게 해준다. 즉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에 근거하여 낙관적인 소망을 갖는 동시에 교회는 선교하여야 할 책임이 있다.

    2.3. 모든 인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 곧 은혜는 그의 그리스도의 대속관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선행적 은총은 회개케 하는 은혜로 연결된다. 따라서 선행적 은혜는 구원의 은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리스도의 대속)과 연관시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강조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모든 믿는 자에게''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웨슬레는 그리스도의 대속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제한하는 것은 실제 전도 생활에 큰 지장과 모순을 초래한다고 지적하였다. 이 땅에 모든 사람은 구원의 대상이다.

    그의 설교 "값없이 주시는 은혜" 에서 지적한대로, 만약에 그런 제한된 대속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 헛수고가 아니겠는가? 모든 사람에게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설교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 기독교가 모든 사람의 종교가 될 수 없지 않은가?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킨다.

    예수님 자신만큼은 그 예정을 아실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누구든지 자신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시며 초청을 하시니 말이다. 그러면서 웨슬레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들을 열거하면서 이중 예정론과 제한된 대속설을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웨슬레의 주장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응답할 책임이 있다는 주장과 함께 전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한다. 그의 가슴의 뜨거운 구령 열은 바로 이런 신학에 뒷받침되어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치며 만민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로 옮겨졌다.

    3.1. 성화는 점진적이요. 또한 순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이 성화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사람의 행위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은 그가 인간이 거듭난 후에도 아직 내재적인 죄가 남아있다고 보며, 또한 성화에는 단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그는 점진적인 성장과정에 순간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있음을 말하였다. 점진적으로 죽음에 이르지만 죽는 순간이 있듯이 신자가 이 체험에 도달하는 한 순간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웨슬레는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서 보다 고차적으로 끌어올려지는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웨슬레에 의하면, 성화는 회개와 믿음으로 신생함과 함께 시작되며(이를 그는 초기의 성화, Initial sanctification라고 부른다.), 그 과정에서 신자의 회개와 믿음으로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이를 흔히 성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에 이르고, 마침내는 영화(glorification)의 순간에 완결된다고 보았다.

    웨슬레가 성화의 과정에 순간적인 단계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성화가 인간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능하며 또한 신자가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현재 여기(here and now)에서도 가능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은혜의 낙관론자였다.

    3.2. 온전한 성화(성결)는 동기와 사랑에서의 완전이다.

    웨슬레는 신자가 온전한 성화의 단계에서 모든 내재적인 죄에서 씻음을 받으며 하나님의 불으심에 종사하기에 합당한 능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를 기독자의 완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는 웨슬레가 말하는 '온전한 성화 또는 기독자 완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똑똑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웨슬레는 온전한 성화를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방이 밝아졌다 하면, 이는 빛이 밝게 한 것이지만 동시에 어두움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베드로도 초기교회 신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마음의 청결함을 받았다는 면도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 웨슬레가 의미하는 온전한 성화는 어떤 상태인가? 웨슬레가 죄에서의 씻음을 말할 때에, 그는 신자가 인간의 한계성 또는 연약성(infirmities)에서 벗어나, 실수, 무지, 타락의 가능성에서의 완전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완전은 영화의 순간에서 이루어지는 '절대적 완전'이다.

    웨슬레는 목회적 측면에서 이 '완전'을 '상대적인 완전'과 '절대적 완전'으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신자는 이 상대적인 완전 곧 온전한 성화의 은혜를 죽기 전에도 추구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서가 약속을 하고, 권고하고 있으며, 주님과 사도는 신자가 이 은혜에 이르도록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웨슬레가 말하는 '기독자의 완전'이란 신자가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으로서의 완전이다. 웨슬레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것들, 곧 무지, 실수의 가능성 등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이 죄를 짓는 계기를 마련하지만 그 자체를 죄라고 볼 수 없다고 믿었다.

    웨슬레는 기독자 완전은 곧 의도의 순수성 (purity of the intention), 마음의 할례요,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이는 온전한 성별(full consecration), 그리고 또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이는 완전한 사랑(perfect love)이라고 했다. 그 본질을 '순전한 사랑' 또는 '완전한 사랑'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보았다.

    사랑은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바로 죄적인 것을 모두 추방하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채워 사람의 모든 말과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서가 말하는 기독자 완전의 전부는 바로 완전한 사랑(perfect love), 곧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웨슬레는 기독자 완전을 하나님과의 신앙의 관계, 또는 동기에서 이해한 것이다. 행동의 결과에서의 완전을 말한 것이 아니다. 곧은 나무 막대기가 물속에 비치 우는 것을 보면 굽어보이듯이, 사람의 동기가 아무리 순수하더라도 그가 인간의 연약성을 지니고 있는 한 그 행동의 결과가 완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자의 완전' 또는 '성결'을 이해할 때, 이 교리에 대한 많은 오해를 제거할 수 있다. 곧 사랑이라는 것은, 정적(static)인 것이 아니고 동적인 인격적 관계에서 이해되는 것이다. 사랑의 실재는 인격적인 결단과 관계에서만 이해된다. 은혜나 죄를 물건처럼 생각하여(thing-thinking approach) 이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과의 동적인 관계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에서의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그리고 완전하지만 동시에 더 성장하여야 되는 성결의 성격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곧 사랑은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무한히 성장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윤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랑으로 표현되는 성결 또는 기독자 완전은 윤리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은 마음과 생활에서의 성결이지 신비적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웨슬레가 강조하는 성결론은 전도와 봉사 곧 호리시틱한 전도(Holistic Evangelism)의 원동력이 되었다.

    3.3. 전도와 사회봉사의 원동력이 된 성결론

    웨슬레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단순히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종교 (social Religion)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단순한 성결은 없고 사회적 성결 (social holiness)이 있을 뿐이다. 기독자 완전의 길이와 넓이 그리고 깊이와 높이는 바로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 이다.

    사실에 있어, 자기 형제를 사랑하되, 말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듯이 사랑하는 자는 그 누구나 '선한 일'에 열심을 아니 낼 수가 없다. 그의 영혼에는 형제들을 위하여 사역하고 함께 있어 주기를 열망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회가 있을 때에는, 주님이 그랬듯이, 선한 일을 하려고 할 것이다.

    웨슬레에 의하면 사랑의 행동은 곧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 것이다. 행동으로 이어지는 사랑을 떠나서의 성결은 그 내용이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행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사랑은 폭 넓은 사랑( comprehensive love)이다.

    메도디스트는 첫째로 복음을 전파하여야 하며 또한 사랑의 봉사를 하여야 한다고 웨슬레는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메도디스트는 전도와 아울러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며 병원을 통하여 치유의 역사를 이루어가며 공장 사역과 교육을 통하여 어두운 사회를 밝게 변화 시키는 일을 하였다.

    웨슬레는 당시의 노예문제, 감옥의 상태 또는 산업에서 가진 자들의 착취행위에 대하여 항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메도디스트는 교회와 사회를 변화 시키는 성결의 누룩의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 성결에 대한 이와 같은 웨슬레의 강조는 그의 전도와 사회참여를 통하여 18세기 영국 전역에 크나 큰 영향을 끼쳤다.

    3.4. 성결은 믿음으로 순간순간 주를 의지함으로써 유지되는 완전이다.

    하나 더 고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웨슬레가 성결한 신자도 무지, 실수의 가능성 등 인간의 연약성(infirmities)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성결(정결)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문제이다. 이면에서 많은 학자들이 웨슬레는 불가능한 가능(impossible possibility)을 말한다고 비판한다.

    웨슬레는 주장하기를, 성결한 신자는 무지, 실수의 가능성 등 인간의 연약성을 지닌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정죄함 없이 거룩한자(성도)로 설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사람이 그런 연약성을 지니고 죄악 세상에서 살려면 범죄하지 않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사실상, 범죄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하기를, 웨슬레의 성결론은 하나의 이상(ideal)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떤 성급한 성결론 자들은 이런 반론에 응수하기를, '실수(mistake)는 죄가 아니라고 변명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알 것은, 양자 모두 웨슬레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변론이다.

    웨슬레는 그의 설교에서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짓는 죄 곧 유의적 죄(자범죄)를 주로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웨슬레는 신자가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죄도 죄라고 인정한다. 이를 전자와 구분하여 '무의적 죄)'라고 불렀다. 이 죄는 자신이 알았던 몰랐던 간에 하나님의 법을 범한 죄다.

    이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험 없이는 하나님의 형벌을 면할 수가 없다고 웨슬레는 말한다. 웨슬레에 의하면 성결의 은혜를 받은, 완전한 기독자도 그들의 연약성으로 인하여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완전한 자라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웨슬레는 말한다.

    웨슬레는 성결한 자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순간순간 의존하는 순간 그가 무의식중에 범하는 죄는 우리 죄를 씻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성결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빛 가운데 거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죄에서 계속 씻으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의 중보의 기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간순간 새로워져서 아주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 리에게는 지금 정죄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깨끗하게 씻으시므로 전에 있었던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지금은 없기 때 문입니다.

    웨슬레는 무의적으로 범죄 하는 신자의 고백과 믿는 자에게 효험 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험과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함을 강조한 것이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종교개혁자들보다는 보다 더 깊이 그리고 다이내믹하게(dynamic)보는 은총의 낙관주의자였다.

    사람의 눈이 정결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먼지가 눈에 안 들어와서가 아니라, 이 눈에는 눈물이 항상 흘러 먼지를 씻기 때문이다. 성결한 자가 자신의 연약성 때문에 무의식적인 죄를 범할지 몰라도 그가 그리스도를 계속 의지함으로 주의 보혈의 효험으로 계속 씻음을 받아 성결함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웨슬레가 말하는 성결한 삶은 신자가 자기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내재적인 죄와 자기 무능을 회개하며 예수를 믿음으로 온전히 성결 해 질 뿐 아니라, 바로 그 믿음으로 순간순간 주를 (회개와 믿음으로) 의지하고 걸어감으로 유지되는 성결이다. 따라서 성결은 헌신과 사랑인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다.

    3.5. 교회 갱신과 부흥의 원동력이 된 성결론

    웨슬레가 주장한 온전한 성화(성결) 또는 기독자의 완전은 신자를 향한 도전이었다. 신자는 모름지기 초보의 믿음에 머무르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 깨끗할 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랑의 생활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설교의 메시지는 18세기 영국 교회와 사회를 부흥케 하였다.

    이런 운동은 19세기 미국에서의 성결 오순절운동에서 다시 꽃을 피웠다. 이런 성결의 메시지와 강조는 명목상의 신자 (nominal Christians)들이 성령 충만의 생활을 추구하게 하였다. 이 성결의 메시지는 명목적인 신자들로 가득 차있는 오늘의 교회에 큰 도전과 호소가 될 것이다.

    <맺음>

    웨슬레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웨슬레는 '세계를 나의 교구로 여긴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전도할 것을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의 선행적이요 계속적인 역사로 인하여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아 들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외치되, 사람과 교회 및 사회를 변화 시키는 성결론을 중심 하는 구원을 외쳤다. 그가 강조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이었다. 삶과 사회를 변화 시키는 성결의 복음이었다. 우리 죄인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 안에 마련하신 구원은 온전한 구원, 온전한 복음이다.

    모든 교회는 온 세계에게 복음을 전하데, 온전한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이렇게 새로이 재발견된 복음운동에서 우리는 웨슬레의 메시지가 메아리치고 있음을 본다. 이런 메아리는 오늘의 강단에서 다시 울려 18세기, 19세기에서 보았던 뜨거운 부흥과 교회와 사회의 갱신을 보게 되기를 기원한다.
    <퍼와서 일부정리>


  • 2019-04-21 02:09

    우선 장로님같은 믿음의 사람이 감리교단에 계심을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래도 감리교단에 믿음의 희망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부디 변질되지 마시고 끝까지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 안에서 감리교단을 위해서 한 알의 썩어지는 밀의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장로님을 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들이 맺히기를 소망합니다. 강우택 목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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