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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작성자
함창석
작성일
2024-05-06 19:58
조회
138
성경: 로마서 3장 21-24절
설교: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1-24)

<믿음으로>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말씀대로 인간이 죄를 범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수 없는 이유는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할 존재이기 때문에, 오류와 실수를 완벽하게 피할 수 없는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 성경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신화도 이 점을 강조한다. 인간이 구원을 받는 길은 자기가 누군가를 알고 하나님을 믿는데서 출발한다. 그리스의 파르나소스 산 중턱에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계의 배꼽(옴팔로스)으로 믿었던 델포이가 있었고, 그곳에 아폴론 신이 인간들의 운명을 맡긴 신전이 있었다. 그 신전 상인방에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서 “너 자신을 알라”는 “너 자신의 운명을 알라”이고, 운명은 죽음을 뜻하였다. 신(神)은 죽지 않지만,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운명이다. 이것을 알고 신 앞에서 겸손하라는 뜻이다. 이것을 망각하고 신에게 도전하면 반드시 응보(네메시스)가 따른다는 것이 그리스 신화의 교훈이다. 신의 영광에 도전했던 벨레로폰은 천마 페가수스에서 떨어져절름발이와 장님이 되었고, 여신으로 착각한 니오베는 남편과 열네 명의 자녀를 모두 잃고, 분노와 슬픔에 찬 모습으로 돌이 되고 말았다. 고대로부터 유럽인들은 지상낙원 아르카디아(Arcadia)를 동경하였다.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 은 17세기에 <아르카디아의 목동들>을 남겼는데, 그림의 내용은 이렇다. 지상낙원 아르카디아에서 세 명의 목동들이 무덤 한 개를 발견하였다. 묘비에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아르카디아에도 있다”(Et in Arcadia Ego). 이 말은 지상낙원 아르카디아에도 죽음이 있다는 뜻이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한 목동은 묘비에 기대 선채 사색에 잠겼고, 다른 목동은 한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손가락으로 묘비명을 되짚어본다. 또 다른 목동은 우수에 잠긴 눈으로 뒤에 선 여인(역사의 알레고리)을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묘비를 가리킨다. “이게 사실인가?” 목동의 어깨에 손을 얹은 엄숙한 여인(역사)이 주는 답은 간단명료하다. 부와 명예와 권세가 아무리 많고, 일평생 누린 쾌락이 아무리 클지라도,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것이다”(히 9:27)는 것이다. 믿음만이 인간의 미래를 보장한다. 인간의 이성도 과학도 율법도 아니다. 율법들을 완벽하게 지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고자 했던 유대인들의 잘못은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율법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율법의 행위를 의지한데 있다. 또 율법주의자들뿐 아니라 합리주의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의로움보다는 자신들의 의로움을 신뢰한데 잘못이 있다. 하나님은 과거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신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식무식에 가치를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값을 쳐주는 것은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믿는 것이다(롬 10:9).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보다는 회개하는 마음을 보신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과 죽어 있는 것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보신다.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보신다.

<차별 없이>

하나님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식무식을 차별하지 않으신다. 천국행 통행증에는 그 어떤 말도 적혀 있지 않다. 오직 ‘그리스도인’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다. 국적도 신분도 피부색도 나이도 학력도 적혀있지 않다. 하나님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묻지 않으신다. 이 사실을 깨닫고 18세기말이후 기독교복음을 받아드린 조선천주교인들은 신분차별을 철폐하였다. 교인들은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이니 상놈이니 하는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황일광이란 백정출신의 기독교인이 있었다. 그는 청소년 시절을 모든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보냈다. 그런 그가 기독교인이 되자, 교인들은 그를 친형제처럼 대우하였다. 그는 농담조로 “사람들이 너무 점잖게 대해 주기 때문에 내게는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 두 개가 있다.”고 하였다. 1800년에 정조 대왕이 승하하자마자 정순왕후와 홍낙안이 이끄는 북인 벽파들이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 시파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할 당시, 그 죄목들 가운데 한 가지가 천국신앙으로 사회개혁을 꾀하고,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며, 양반과 상놈의 신분타파로 반상체제를 위협하는 국가의 원수 집단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첩의 자식을 서자라 하여 좌족(左族), 반사(半士), 사점박이 등으로 천대받고 과거도 보지 못하고 제사와 상속에서도 소외 받기가 다반사였다. 19세기 초엽 신자가 비신자를 전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컸던 고충이 다름 아닌 양반 상놈, 적자 서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같은 계급으로 인식하는 기독교의 평등사상이었다. 천당은 좁고 입구도 바늘구멍 같다던데 어떻게 상놈이나 서자가 또 미천한 계집이 들어갈 틈이 있겠느냐는 것이 믿음을 외면하는 이유였다. 이 난관을 극복하는데 동원된 선교 도구가 프랑스 신부들이 신고 들어온 양말이었다. “믿음이란 지극히 공평한 것으로 그 앞에서는 양반도 상놈도 지아비도 지어미도 또 어른도 아이도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 양말이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 어느 누구의 발에도 신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라고 말하고 양말을 신겨만 보이면 손쉽게 깨닫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 1839년에 순교한 신대보(神大輔)가 샤스탕 신부에게 부친 편지 가운데 적혀 있다. 바울서신 빌레몬서에 보면 오네시모라는 노예출신의 그리스도인이 나온다.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에게 상당한 손해를 입히고 로마로 도망친 죄수였다. 법대로 하자면, 오네시모는 불에 달군 쇠로 이마에 F자를 새기고 채찍을 맞은 후에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영접한 오네시모를 동역자로 삼기를 원했고,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노예가 아닌, 사랑받는 형제로서 영접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신분의 차별이나 남녀노소의 차별이 없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일 뿐이다. 로마서 3장 21-24절뿐 아니라, 로마서 전체의 주제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는 데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는 데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민족 신분 색깔의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값을 쳐주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믿음뿐이라는 것이다. 복음의 특징은 평등이다.

차별은 기본적으로 평등한 지위의 집단을 자의적(恣意的)인 기준에 의해 불평등하게 대우함으로써, 특정집단을 사회적으로 격리시키는 통제 형태이다. 차별은 차등을 두어 구별함이다. 성경에서는 각 개인에 대한 인격적 차별을 금하고 있는데 특히 재판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에 외모를 보지 말고 차별 없이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신 1:17). 또 하나님의 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에게 결코 차별이 없으며(행 15:9; 롬 3:2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도 차별이 없다고 선언한다(롬 10:12).(가스펠서브, 차별, 교회용어사전 : 교회 일상, 2013. 9. 16.)

일반적으로 차별 받는 사람들의 실제행동과는 거의 무관하거나 전혀 관계 없는 생각에 근거하여 열등성을 부여하는 제도화된 관행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회적 차별이 문제가 되는 것은, 구별 그 자체가 아니라 선지배적인 요소에 의해 규정되는 내집단에 대한 입회승인의 기준이 보편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별이 차별적인 것으로 간주되는가의 여부는 특정사회 안에서 계층구분이 부인되느냐 승인되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 사회적 차별은 평등의 기본원리를 표방하는 사회에도 명백히 존재한다. 이 불일치는 의도적인 기만 또는 무지에 기인하기도 하고, 제멋대로의 감정적인 반응 또는 전통적 편견의 잔여물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차별,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값 없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과 천국행 통행증에는 값이 없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곳이지 돈이나 행위로 가는 곳이 아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로마서 3장 24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은 법정용어이다. 재판장이 법정에서 “무죄”라고 선고하는 것과 같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침례를 받은 사람에게 죄를 용서하시고 무죄를 선언하신다. 무죄선언에서 그치지 않고, “의인”으로 대우하신다. 여기서 ‘무죄선언’과 ‘의인대우’는 신자(信者)의 죄나 죄지을 성질이 실질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뜻하지 않고, 말 그대로 대우받고 간주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것을 ‘간주된 의’ 혹은 ‘전가된 의’라고 말한다.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의(義)와 그 아들 예수님의 순종의 의(義)가 믿는 자에게 온라인송금처럼 인간의 의로 옮겨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의와 예수님의 순종의 의가 값없이 신자에게 옮겨지고 신자의 의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것을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된 의(義)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란 죄 사함과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을 뜻한다.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유대교 율법을 지키는 개종자들에 국한시켰다.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인들은 시민권을 양가 부모가 모두 아테네인의 혈통을 가진 자들에 국한시켰다. 고대 로마인들은 시민권을 제국의 정신을 공유한 자들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게 하였지만, 그 자체가 대단한 특권이었고, 212년 카라칼라 황제의 ‘안토니아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ana)이 발표되기 전까지 속주민들의 대부분은 로마시민권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은 종족 언어 혈통 신분에 상관없이 오직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에 믿기만 하면 은혜로 값없이 받는다는 것이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내용이었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시민과 속주민과의 차별을 없애고, 제국내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을 준 카라칼라 황제의 212년 ‘안토니아누스 칙령’을 로마제국이 붕괴되는 원인으로 보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인류가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자매라는 박애정신과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값없이 차별 없이 은혜로 준다는 기독교복음의 선포는 2천년이 넘도록 세계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민인 것을 자랑삼고, 할례와 개종침례를 받으며, 613개의 계명과 랍비들이 만든 수많은 울타리법들과 관습법들을 지키는 유대교 신자는 오늘날 전 세계에 5백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조차도 유대인들의 3-40퍼센트만이 믿는 민족종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값진 구원을 은혜로 믿음으로 값없이 차별 없이 선물로 받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잊지 말아야할 것 한 가지가 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주인이나 노예나 양반이나 상놈의 구별 없이 누구나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가 되는 특권을, 복음의 무한한 가치를, 자칫 값싼 은혜로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없도록 바른 믿음과 실천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려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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