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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과 설교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0-06-13 11:35
조회
322
Ⅰ. 시작하는 말

대부분의 일들은 하면 할수록 익숙해지고 쉬워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설교는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청중의 상황을 알고 선포하는 일이 어렵지만, 그 보다 더 어려운 일은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것이다. 그 까닭은 아무리 하나님이 세운 종이라 하나, 역시 유한한 인간으로서 무한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이 있고, 또한 그들에게 역사하신 성령께서 지금도 설교자들에게 말씀을 바로 듣고 깨닫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혜택은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하는 생활과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의 생활을 병행해 나가는 설교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기도는 스스로 할 수 있지만, 전문적인 성경 연구를 위해서는 진보와 보수를 망라한 좋은 주석서들이 필수이고, 그 밖에 신학서들과 성경 사전들이 필요한 것이다.

Ⅱ. 설교

제목 설교이든, 주제 설교이든, 시사 설교이든, 강해 설교이든, 주석 설교이든 간에, 설교란 하나님께 부름받아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교역자가 세상에 들려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전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집약된 성경, 즉 영원불변하신 사랑의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은혜와 복, 구원과 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기본 교재로 삼아야만 한다.
성경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핵심 내용이자 주된 내용으로 하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과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기록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과 감동을 받은 사람들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의 사실을 지시해 준다. 하나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고;또 하나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성경 저자들에게 기록하도록 하실 때, 그들을 단순한 기계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인격체로서 쓰셨다.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저자들의 언어와 개성과 신앙과 경험과 지식과 정보와 문학적인 특성과 신학적 관점 등을 가지고 기록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저자의 언어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을 파악하여, 청중들에게 설교하거나 강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성경에 대한 철저한 주석 작업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표현된 성경 본문 자체만 가지고 해석할 때에는 해석자의 주관에 따른 많은 왜곡과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 또, 청중(상황) 위주의 설교도, 말씀을 왜곡하거나 변질시키기 쉽다. 이러한 잘못은 그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청중들에게 대변해야만 할 설교자가 흔히 저지르기 쉬운 죄인 것이다.

Ⅲ. 주석

성경을 주석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첫째, 저자 문제를 연구해야 한다. 같은 낱말 또는 문장이라도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생은 재미있다.”라는 말을 바울 사도가 한 경우의 해석과 바람둥이가 한 경우의 해석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바울의 “재미있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그의 복음을 위해 일하는 삶의 신령한 기쁨이요 영적 즐거움을 의미하지만, 바람둥이의 “재미있다”라는 말은 방탕한 성적 쾌락이요 육적 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사본 비평을 해야 한다. 아직까지는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사본들만 남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본에는 있는 낱말이나 문장이, 다른 사본에는 생략되었거나 다른 낱말이나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모든 사본들이 다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대체로 표현이 간략하게 된 것을 오래 된 사본으로 인정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 취사선택하거나 상호 보완을 해야 한다.
셋째, 원어 해석을 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헬라어 낱말 풀이가 아니라, 어원 및 언어의 변천 과정, 그리고 저자가 그 언어 속에 부여하고 있는 신앙적 의미, 또는 신학적 의미를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 원어 이해는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 그 원어의 개념 파악을 해야 한다
넷째, 문법적 해석을 해야 한다. 여기서는 문장에 대한 기본적인 문법적 해석은 물로, 저자의 문체와 애용어 그리고 표현 양식 등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역사적 해석을 해야 한다. 여기서는 주로 저자의 삶의 정황과 본문이 지닌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신학적 해석을 해야 한다. 이 말은 저자의 신학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흐르는 복음의 내용에 근거한 신학을 정립하여 각 본문을 일관성 있게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할 때에, 성경은 성경에 의해 해석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 본문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을 보수와 진보를 망라하여 연구해야 한다. 이것은 해석자의 편견을 막고, 보다 깊고 넓은 본문 이해를 가능케 한다.
여덟째, 끊임없는 기도로 성령의 영감을 구해야 한다. 모든 성경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영의 산물이므로, 해석자와 설교자는 앞서 열거한 모든 과정을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앞선 모든 과정을 바탕으로 하는 영해가 가능해진다. 실상, 성경의 모든 문장이나 문단은 성경 기자가 그 문장이나 문단의 내용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이신 사랑의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과 기적적인 권능 등을 알리기 위해서 자기 식의 글이나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장이나 문단의 의미 파악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가진 문장이나 문단을 기록한 취지를 주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시간과 장소에 따라 옳고 그름,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다르거나 상반되거나 뒤바뀌는 인간의 도덕적 교훈이나 철학적 교훈이나 종교적 교리나 삶의 교훈이나 법조문 등등과 달리, 영원한 진리요 영원한 현재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한 예들 들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의 의미는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고 쉬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 일에 대한 잡다한 해석이 따르게 마련이다. 안식일에 넘어져서 피를 많이 흘리는데, 치료하는 것은 안식일 계명 위반인가 아닌가, 지혈하는 것은 일인가 아닌가 하는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 두 가지 다 일로 해석해서 안식일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그냥 두었다가 출혈 과다로 죽으면, 그냥 둔 것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킨 것인가 하는 문제가 따르는 것이다. 침략해 온 적군이 안식일에 공격하면, 무기를 들고 안 싸우고 죽고, 민간인들까지 죽게 하는 것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것인가 하는 문제도 따른다.
예수님은 일하지 말고 쉬라는 안식일 계명의 의미가 아니라, 그런 의미를 지닌 안식일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근본 취지를 이해하셨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지, 안식일이 인자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인간을 위하는 일인 치유와 축귀를 행하신 것이다.
설교자가 매번 성경 본문에 대해 그와 같이 철저한 주석 작업을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으므로, 좋은 주석서들을 많이 참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하면, 설교의 성경 본문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설교나, 성경 본문의 의미와 상이한 설교나, 성경 본문의 의미와 상반되는 설교를 하는 잘못을 하지 않을 것이다. 올바른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올바르고, 깊이 있는 성경 주석 작업이 필수적이다.

Ⅳ. 설교자의 자세

설교자들 중에는 그릇된 자세를 가진 이들과 올바른 자세를 가진 이들이 있다.
전자는 청중들에게 그리스도 예수가 어떻게 이해될까에 대해서는 아랑곳없이, 오직 설교하는 자신이 어떻게 이해될까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명백히 드러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청중의 공감과 인기와 존경과 충성을 의식하여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고자 애를 쓴다. 그들은 영원토록 계속될 십자가의 도를 깊이 깨닫고 전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청중의 상황과 기호를 파악하여 청중이 듣기 좋아하거나 듣고 싶어하는 청중 위주의 설교를 한다. 그러나 실상 이러한 설교는 청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처지와 상황과 기호가 각양각색이므로, 의도한 결과를 제대로 얻지도 못한다.
후자는 주 하나님의 종으로서 청중을 섬기는 청중의 목자임을 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설교를 통해 어떻게 해서라도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만을 전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설교 말씀이 청중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양각색의 처지와 상황과 기호와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라고 하였고, 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 4:12)라고 하였다.
설교 말씀이 청중에 의해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청중이 설교 말씀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 빛이 어둠을 비추는 것이지, 어둠이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속성과 상태를 알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죄의 속성과 멸망 상태와 지옥행 삶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쳐 회개하고 믿어 구원받도록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각양각색인 청중의 처지와 기호 등을 파악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효과적으로 깨우치기 위한 방편으로서만 가치가 있을 뿐이다. 설교자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류가 아직도 못 다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못 다할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인 십자가의 도를 깊이 깨닫고 전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는, 표절을 하거나, 남들(설교 제작팀)이 만들어 준 설교를 대독해서는 안 된다. 설교를 작성할 때에 인용한 것은 출처를 밝혀야 하고, 이해 정도가 아닌 소화를 해서 자기 설교로 만들어서 선포해야 한다. 설교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설교자 자신의 인격과 삶의 한 결정체이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설교는 무한하신 절대자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설교자가 설교대로 다 살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설교대로 살거나, 살려는 노력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Ⅴ. 맺음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설교를 바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끊임없는 기도와 설교의 성경 본문에 대한 정확하고 깊이 있는 주석 작업이 필수이다. 저자 문제와 사본 비평, 원어 연구를 해야 하고, 문법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과 기존의 진보와 보수 양쪽의 주석 또는 해석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비평하고 종합해야 한다. 이러한 주석 작업의 궁극적 목적은 성경 기자들의 근본 취지인 하나님의 계시인 영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 영의 소리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이다.
청중의 내적 특성과 외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십자가의 도를 효과적으로 깨우쳐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방편으로서만 가치가 있을 뿐이다.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전체 주석/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전체 4

  • 2020-06-14 09:05

    올리신 내용에 퍽 공감합니다. 최 목사님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깨닫는 분들이 더 많아야 교단이 튼튼해 질 것으로 사료됩니다.

    성경에서 “또한 그들에게 역사하신 성령께서 지금도 설교자들에게 말씀을 바로 듣고 깨닫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혜택은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에 착념하고, 순종하는 생활과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의 생활을 병행해 나가는 설교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제 생각과 같습니다. 반대로 자기 철학이나 사상을 관철하는 분이 있는데 이는 자기 혼에 의해 성령의 역사를 거스른다고 봐야 합니다.

    주석에서, 어떤 분이 성경 본문보다는 주로 배경주석을 중심으로 설명을 하는데, 백과사전에는 사탄의 누룩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고, 주변에서 변죽을 올리면서 본문이 뒤쳐지게 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의 본문을 설교할 때 마다, “이사야서의 저자는 2명이고 제1이사야와 제2이사야 설이 있다.”는 식으로 설교를 도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2명인가요? 이사야서가 2개가 발견되었나요? 이사야와 당시대를 살았던 유대인들이 2개의 이사야서가 있다고 했나요? 예수님이 이를 인정했나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게 문헌 비평이나 사본학의 약점은 아닌지요? 언급하신 바처럼 성경은 원전이 발견된 적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 시대의 언어이고, 파피루스, 진흙, 그리고 양피지 두루마리에 원문이 기록되었고 히브리어와 아람어 그리고 일부는 당시 지배 제국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후세의 누군가가 이를 쉽게 들고 다닐 수도 후세인들이 쉽게 읽을 수도 없을 겁니다. 원본 성경과 관련하여 예수님도, 신약에서 구약의 인용자들도, 이사야서를 읽던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원본 성경을 읽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는, 표절을 하거나, 남들(설교 제작팀)이 만들어 준 설교를 대독해서는 안 된다.”에 적극 공감합니다.


    • 2020-06-14 19:33

      필자의 글에 공감하시고, 관련하여 의견을 표하셔서 감사합니다.
      성경보다 상황을 더 중시하는 성서 해석학도 해야 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바 성경 자체를 깊이 캐 들어가는 주경신학을 필수적으로 해야 합니다. 주경 신학의 구체적 결정체인 주석서들도 각각 다른 특징이 있고, 장단점이 있고, 어느 성구나 어느 문장에 대한 잘못된 주석들이 있으므로 할 수 있는 한 진보와 보수는 물론, 다양한 주석서들을 많이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주석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설교가 본의 아니게 사견이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나 곡해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매우 많은 도움이 되는 대백과 사전들인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1-5권)과 Th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aedia(1-5권)와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1-10권)에 있는 구원, 천국, 지옥, 영, 성령, 안식일 등등의 해설은 각 주제마다 어느 한 학자의 견해이지,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는 연구 결과인 견해는 아닙니다.


      • 2020-06-14 20:43

        댓글과 좋은 책을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Dictionary와 Bible Encyclopaedia를 마련하게 된다면 조언을 꼭 고려하겠습니다.

        제가 잘은 모르기에 오랜 기간에 걸쳐서 깊이 있게 연구하신 분께 제 의견을 피력하는 게 좀 주제넘을 수 있습니다. KJV를 기준으로 된 Young's Analytical Concordance to the Bible와 스트롱 비교성구사전 등을 가끔 활용하고 있습니다. 요즘 성경의 본문을 유의하면서 읽고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와 'The fear to God' ‘영원한 forever’ ‘거룩하다 거룩하다’ 같은 표현 등에 유의해서 색연필로 표기도 합니다. 제가 알게 된 것은 말씀을 주신 대상과 시대와 예언을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히브리어 성경을 읽는 것을 목표로 히브리어 단어를 외우면서 조금씩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긴하지만

        다만,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와 많은 책이 부담이 되고, 백과사전 식의 지식을 다 모은 나열 형은 진리와 사탄의 누룩이 같이 있기에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사실 어느게 올바른 의견이고 이를 취사하는 게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최종권위라고 생각합니다.


        • 2020-06-15 10:32

          # “올리신 내용에 퍽 공감합니다. 최 목사님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들'을 깨닫는 분들이 더 많아야 교단이 튼튼해 질 것으로 사료됩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필자의 본 글은 오래 전에 교계 잡지의 청탁으로 쓴 ‘주석과 설교’를 약간 보완한 것이고, 그 후에 매년 진급 과정에 있는 교역자들과 기타 교역자 세미나와 신학교에서 강의한 것입니다. 보다 더 깊고 넓은 성경 이해를 한 설교를 하고 싶어하는 교역자들이 매우 많아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 감리교신대학교 시절 김용옥 교수님의 강의 시간에, 인문학의 연구 방법 중에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이 다자 대조 연구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학파나 노선에 치우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학자들의 견해를 섭렵하면서 종합적인 자기 견해를 도출하는 것이므로 가장 권위 있는 연구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다자 대조 연구의 결과인 자기 견해는 다양한 많은 견해 중에서 취사선택한 견해이거나, 종합한 새 견해이거나,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전혀 새로운 견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다자 대조 연구 방법과 비슷한 것 같으나, 전혀 다른 것이 각 견해에 대한 비판(옳음과 그름, 장점과 단점, 공과 화 등등) 없이 그냥 나열하는 짜깁기입니다.(염려하여 말씀하신 대로 진리와 사단의 누룩이 같이 있는 위험성이 다분함.) 이 짜깁기는 학문적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흔한 연구 방법인 공감되는 학파나 교파나 당파나 정파나 사상이나 노선의 학자들의 견해 중에서 공감되는 부분을 인용하면서 자기 견해를 도출하는 것은, 여전히 그 학파나 교파나 당파나 정파나 사상이나 노선에 치우치는 편견에 빠지기 쉽고, 게다가 편견을 조장하는 위험성이 다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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