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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어두움에 비취다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2-05-31 11:18
조회
2828
빛이 어두움에 비취다
             창세기 1:1-5, 요한복음 1:1-18.



  우리는 빛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일반적으로 불빛을 생각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불빛을 비취기 위하여 복잡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대개는 감람유 등잔불이었는데 감람나무 열매의 씨를 땋아 볶아서 찧어 기름을 짜내어 등불을 켰습니다.
  감람유는 여러 가지로 이용되었습니다.
  식용유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의약품으로 사용되었고, 화장품이나 번제물의 일부로 사용되거나,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의 머리에 부어 선별된 사람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성소에 언제나 등불을 밝혀 하나님의 계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든 것입니다.

  빛은, 창세기 1: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을 가지고 보는 가운데 활동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사건은 빛을 가지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활동하신 창조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기위한 것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은 태양이 처음부터 완전한 발광체로 만들어졌다고 말을 합니다. 빛을 분석하여 그 속에서 7가지의 무지개 빛깔도 찾아냈습니다.
  빛의 전달과 학적이론을 세웠고 빛의 속도와 분산법칙도 설명하고 신비적인 광선속의 기이한 잠재력도 이용하게 하였습니다.
  가까운 일본에서만 해도 빛을 지하실에 까지 끌어들여 식물의 수경 재배법을 획기적으로 개발해 내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도 그 빛을 만들 수도 없으며 생성과정을 설명하지도 못합니다.

빛은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물입니다.
  빛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순결함과 능력과 광명과 선행을 닮은 빛 되신 하나님과 가장 유사한 것입니다.
  아무리 근대 과학이 발달하고 빛의 연구가 부단히 계속된다 할지라도 두 가지의 질문은 영원히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그 한 가지는 욥기 38:19절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하는 것과, 욥기 38:24절의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하는 것입니다. 빛은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상하시고 원하시고 명하시사 곧장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빛은 모양으로만 지어진 것도 아니고 일순간만 있어진 것이 아니라 영구히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시고 싶으신 일은 하시는 분이시며 기뻐하시고 바라시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신속하게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근원적인 참 빛이시며 그 안에 지음 받은 빛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 빛은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황금의 태양에서 직접 나오는 찬란한 빛과 창백한 달에게서 은은하게 나오는 은빛과 같은 것이 비칩니다.
  장미 빛의 동녘의 아침 햇살과 영광의 바다 서쪽에 비치는 그 빛은 금방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태울 것 같이 붉습니다.
  한여름 대지위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와 더불어 흰 빛이 아른거리고 비가 쏟아진 뒤에 서산에 피어난 7색깔의 무지개는 꿈을 꾸게 합니다.
   이 모든 빚의 들을 보면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빛은 깨끗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창조하신 하나님의 빛이며 하늘의 소산이기에 순수성에는 흠이 없습니다. 그래서 빛이 역사하는 곳에는 언제나 깨끗하고 깨끗하게 받아야합니다.
  빛이 비추는 곳은 더러움을 없게 하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대기도 오염되고 땅도 더러워지고 물도 더러워질 수 있으나, 그러나 빛은 전혀 다른 것과 섞이지 아니하고 불결해지지 아니합니다.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점도 흠도 없으십니다.
  베드로는 그의 책, 베드로전서 1:19절에서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예수님의 순결성을 증거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점이나 흠이 있으면 안 됩니다.
  출애굽기 12:5, “너희 어린양은 흠 없는 1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죄인을 대신하여 드려지는 제물이심을 요한복음 1:29절에서 증거 합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제물이 깨끗해야 하듯이 우리 예수님은 깨끗한 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빛이 깨끗하듯이 어두운 죄악 세상에 추한 죄와 허물을 제어하기 위하여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깨끗한 몸으로 오셨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타협할 수 없듯이 예수님과 죄는 타협할 수 없는 순결성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어두움에 쌓였을 때는 두려움과 공포가 있으나 빛 가운데 있을 때에는 두려움도 공포도 사라집니다.
  빛에 거하면 어두움의 해를 당하지 아니합니다.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죄의 두려움, 사망의 공포가 사라지게 됩니다. 빛은 어두움 사라지게 하고 숨은 것을 들어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빛에 거하게 되면 죄와 허물을 깨닫고 속마음까지 회개하게 됩니다.

빛은 값없이 주시는 우주적인 은사입니다.
  빛은 한 개인이나 민족이나 나라나 계급이나 신분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민족 누구에게나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나 미련한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하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감사하거나 감사하지 않거나 누구나 다 같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빛입니다(마 5:45).
  또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무제한으로 비쳐지고 대가가 없어도 무한정 제공되어 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돈 없이 값없이” 받는 은사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은 이 빛의 덕택에 세상에 있는 것들을 알게 되었고 사물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빛이 없으면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사물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총명한 사람이라도 세상을 분간하지 못합니다.
  시력이 아무리 밝아도  이 빛이 있으므로 형태와 윤곽을 보고 구분하게 됩니다. 이 빛으로 길을 찾아 가고 빛의 인도를 받습니다.

  빛은 세상을 밝게 하고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는 것의 의미는 인간이 대상에 대해서 알게 하는 것뿐입니다. 빛으로 말미암아 어두움에서 더듬지 아니하고 “길”을 보고 사물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 빛 때문에 우리는 올바로 설 수 있게 하고 “나고 드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생명을 위한 활동을 자유롭게 하게 합니다.

  생명의 빛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스스로의 위치를 알게 하고 죄와 사망의 두려움에서 생명의 기쁨과 구원의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구약의 시대에 사고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국한된 민족의 특징이냐 좁은 범위의 혈통에 제한된 구세주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 모든 민족 누구에게나 구원을 이루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은 국적과 혈통과 가문과 인물 중심이 아닌 전 세계 모든 민족 전 인류를 상대하여 오신 빛의 본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빛을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게 합니다.”(마 5:15).

  예수님은 빛을 숨기거나 감추지 아니하고 온 세상의 비추셨습니다.
  그늘진 구석에서 멸시를 당하는 창기나 세리나 죄인까지 찾아 가셔서 소망의 빛을 비추어 주셨고 소외당한 병자들과 버림받은 부랑자들에게도 생명의 빛을 발하셨습니다.
  은혜는 십자가의 등경 위에 높이 못 박혀 인류구원의 생명의 빛을 비추시어 자신을 제물로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빛 때문에 살게 된 것입니다.
  인류는 그 빛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빛으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빛은 조용하게 유익을 주는 반가운 은사입니다.
  빛이 비쳐지는 소리는 결코 요란하지 않습니다. 소리가 없습니다.
  빛의 속도는 가장 빠른 속도로 우주의 깊숙이 은밀한 곳까지 고루고루 찾아 비쳐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서두르거나 서툴거나 혼란스럽지 않게 소리 없이 비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아마 요란한 소리나 진동이 필요 없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필요의 의사에 따라 빛이 조용하게 나타났을 것이 분명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나타낼 때 소란하고 진동하며 나타내려 합니다.
  널리 소문내고 광고하여 자기를 들어내고 결과를 자랑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광고 내는 구제와 소문내는 선행을 제일 미워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와 거룩함과 경건은 결코 참된 빛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참 빛의 비췸입니다.
  또 빛이 비추어 지는 것은 신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는 것 중에 빛보다 빠른 것이 아직은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합니다.
  빛의 속도는 1초에 지구의 7바퀴 반이나 도는 속도입니다.
  빛의 생활은 언제나 신속해야 합니다.

  “옛 사람에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료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 5:21-25).

  무슨 일에나 선후가 있는 것입니다.
  선후를 분간하여 일의 처리를 하는 것이 빛에 거하는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문간에 거지 나사로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호의호식 하는 데만 정신 빼앗긴 부자는 빛에 거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든 나쁘든 원하든 원치 않던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나님의 은혜와 빛에 의존하여 살고 있습니다.
  빛은 모든 사람의 생성과 보존과 생의 즐거움의 필수적인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자연학자나 과학자나 예술인이나 농부나 기술자나 선원이나 여행자나 빛에 도움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욥기 25:3, 수아 사람 빌닷은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또 “그 광명의 비췸을 이용치 않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어볼 만도 합니다.
  전도서 11:7-8.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 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이 많으리니 그날을 생각할 지로다 장래일은 다 헛되도다.”라고 빛을 기뻐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편 130:6,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하도다”라고 빛을 기다리고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의 빛을 찾는 마음을 어디에 비교하겠습니까?

빛은 신적 상징입니다.
  빛은 하나님의 상징입니다.
  요일 1:5, “하나님은 빛이 시라”고 하였고, 시편 27:1, 이사야 2:5, 미가 7:8, 에도 말씀했습니다.
  빛의 근원 이시요 빛의 본질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빛이 생성되었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우주 만물 뿐 아니라 그 어떤 것들 중에서도 빛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어두움과 공허와 혼란 속에 “빛이 있으라” 하실 때 나타난 것은 빛 되시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술가들이 아름다운 것을 그리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운 것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아름다운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좋은 요리를 만들어 내려면 좋은 요리를 아는 요리사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많이 빛을 창조해 내심은 하나님만이 빛을 가지고 계시며 빛을 아시고 빛을 소유하시고 빛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탄 마귀가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두움밖에는 없을 것이며 절망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태양을 똑바로 볼 수 없습니다.
  태양에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습니다.
  태양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이란 불가능합니다.
  하물며 태양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육안으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우리의 죄 된 모습으로 감히 하나님이 위엄하신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주의 사자만 보아도 죽을까봐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죄 된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도 육신을 가지고는 가지 못합니다. 육신을 벗고 신령한 몸이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위엄과 영광스러운 외모와 순수한 본질은 감히 그 거룩하심 앞에 소멸하고 말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기 위하여 빛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요한복음 9: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이 된 것이 자기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 로라”(요 9:5).
  예수님은 하나님의 빛을 이 땅에 조명하는 빛이시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치유하심도 죄에서 사함 받게 하심도 빛을 나타내심입니다. 예수님의 길과 진리와 생명은 이 빛의 근원을 찾아 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성령님도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에게 빛을 발견하게 도와주고 찾게 하고 따르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어서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고 협력하십니다. 우리의 대변자가 되시고 지혜와 은유로 인도하십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빛과 생명 어두움과 죽음은 동속적인 것입니다.
  “생명의 빛”에 대해서는 그리스어에 자주 나오는 개념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는 “산다”를 의미합니다.
  “살아 있다”는 의미는 “빛을 본다”는 것은 동속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빛은” 행복과 구원의 표지이며 신의 영역전체의 표시임으로 종말론적인 “생명”과 똑같은 의미로 또는 결합하여 사용합니다.
  빛이 있으므로 삶의 길로 또는 영생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이 빛으로 신의 계시를 나타내셔서 생명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생명은 인간을 위한 빛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빛 안에 거하시고 소망을 가지셔서 생명과 영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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