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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저주와 악독"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2-06-06 00:00
조회
2249
저주와 악독
                       로마서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사람의 지체 가운데 하나를 가지고, 여러 가지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입 밖에 없습니다. 눈은 보는 것뿐이고, 귀는 소리를 듣는 것뿐이며, 코는 숨 쉬고 냄새 맡는 것뿐이고, 손은 일 하는 기능으로 열심이 일하고. 발은 땅을 딛고 서있는 기능이며, 다리는 걷는 일만 합니다. 그러나 입은 음식의 맛을 감지하고, 먹으며, 말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에 인간 창조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조물주가 인간을 처음 창조한 때는, 아무것도 다니지 않은 고기 덩어리를 만들었으나, 그 고기 덩어리가 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다가 보니까 눈이 뜨였고, 듣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다 보니까 귀가 뚫렸고, 냄새를 맡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다 보니까 코가 생겼고,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다 보니까 입이 뻥하고 뚫렸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입은 먹는 욕구보다 말하고자 하는 욕구가 앞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최고 40일 까지는 금식을 할 수 있어도, 입을 다물고 말하는 것을 참는 것은, 4시간도 말하지 않고 참고 있기에 매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입술입니다.

  여자의 입은 너무 나불거리고 잔말이 많아서 수염이 나지 못하고, 남자의 입은 너무 거칠게 말해서 수염이 거칠게 나오는 모양 갔습니다.
  눈도 열렸다 닫혔다 하지만 한번 열어보면 오래도록 참고 견디며 보므로, 눈꺼풀은 얇아도 오래도록 평생을 쓸 수 있으나, 입술만은 잠시도 쉬지 않고 나불거리고 재잘거리니 만약에 입술을 얇게 만들었더라면 금방 닳아지고 없어 질까봐, 하나님은 입술을 두껍게 만드셨나 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람의 입술은 쉬지 않고 옳은 말도 지껄이고 그릇된 말도 지껄이며, 칭찬의 말, 책망의 말, 아첨의 말, 멸시의 말, 사랑의 말, 미움의 말, 축복의 말, 저주의 말, 존경의 말, 멸시의 말, 진노의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입은 사람의 인격을 대표하는 기관입니다.

  초면에 사람들끼리 만나면, 그 사람의 첫인상이 아름답게 보이거나 추하게 보이거나, 그것으로 인격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써, 그의 인격을 알 수 있고, 그의 내면적인 아름다움과 추함이 나타나게 되어, 오랜 친분을 갖고 싶기도 하고, 친분을 갖기에 거리끼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이 아무리 밝고 아름다우며, 코가 크고, 귀가 잘 생기고, 얼굴이 미인일지라도, 그 사람의 입이 추하면, 그의 아름다움은 곧 싫증이 나고, 추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잠 11:22)고 했습니다.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로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잠 12:4)고 했습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9)고 했습니다.
  이런 말씀들이 성경에서 지혜를 주는 것은, 사람의 입이 얼마나 삶에 큰 영향을 주는 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라고 말한 것은, 부패하고 추한 자의 입을 두고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입으로만 선을 베풀고, 입으로만 덕을 세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느 사람이 천국에 가서 구경을 하는데, 천국에 온 것은 몸이 온 것이 아니라 모두 입만 오고 귀만 왔더랍니다. 그래서 웬일인가? 살펴보면서 안내하는 천사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들이 말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입술로만 봉사하고, 혀로만 충성하고, 덕을 세우며 선을 행하였는데, 실천함이 없으므로, 천국에 들어갈 자격은 입 밖에 없으므로, 입만 천국에 왔고, 귀는 하나님의 말씀만 듣기는 해도, 행동과 실천이 없으니, 귀만 천국에 왔더라는 것입니다.

  입술로 범죄 하는 것을 막기도 힘들고, 입술로 말하는 것을 지키기도 힘 드는 것이, 우리 인간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그 입에는
  바울의 지적하는 입의 주인공들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입과는 달리 신앙적이고 종교적이고 지도자적인 입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기대했던 입이 아니라는 데서 크게 실망을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진실하고 의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에게 꼬임을 받아 범죄 한 이후로, 인간은 자기의 생각만을 더 하고, 사탄의 속삭임에 순종하면서부터, 입은 창조 때의 입으로서 기능을 잃어버리고, 거짓말과 악담과 욕과 저주와 불평과 추함이 더하여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입이 눈 위에 달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입이 지체의 맨 아래쪽에 달렸더라면, 좀 더 겸손했을는지 모릅니다. 얼굴 중에서 제일 아래에 달려 있는데도, 그렇게 겸손하지 못하고 쉴 새 없이 재잘거리고 떠드는 것을 보면, 만약 눈 위에 달렸더라면 그나마도 시끄럽게 떠들고 교만한 입이 참을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 시끄럽고, 더 떠들고, 소란하여, 입으로 입는 피해가 얼마나 더 많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런 입이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다를 바가 없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실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입이 그렇게 덕스럽지 못하고 부패해진 이유는, 다른 지체들과는 달리 증거를 남기지 않고, 책임감이 없이 지껄일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일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은 모두 행동한 것에 대한 증거가 있어서, 책임을 면하지 못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얼마든지 부인하여도 증거가 남지 않으니 책임감이 희박한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도 부인하고, 악담하고 저주를 퍼부어도 입술로 지은 죄들을 거짓말과 부인함으로 사실을 바꾸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10:7, “그 입에는 저주와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한 것처럼, 지은 죄와 실수를 숨기고 감추려는 것입니다.
  입으로 지은 죄만 숨기는 입이 아니라, 몸으로 지은 분명한 증거들까지도 감히 하나님 앞에서 숨기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동생을 때려 죽였으나 숨기려 하였는데, 하나님은 아벨의 핏 소리를 들으시고,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가인은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나이까?”라고 대답하여 자기의 죄를 숨기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인죄를, 작은 입으로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의 입으로 자기의 죄를 속일 것처럼 행동합니다.

  가룟인 유다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랍비여 안녕하십니까?”라고 입을 맞추며 은 30에 팔아넘깁니다.
  지식층에 있는 종교의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고 말장난을 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까?”(마 22:16-17).
  자기들이 잘 아는 지식으로, 예수님의 대답에서 올무를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 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7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셋째도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7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마 22:24-28).

  자기들의 지식으로, 예수님을 돌로 칠 기회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고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4-5).
  그러나 그들은, 작은 입술로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꾀를 부릴 줄만 알았지, 자기들의 입을 지으신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정한 입술을 열어서 범죄 함은, 자신에게 진노의 화를 자초하는 어리석음 일 뿐입니다.

  신앙도, 종교적인 지식도, 지도적인 교양도 팽개쳐진 헛된 입놀림은, 사람들에게는 증거가 남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기억되며, “네 입으로 말한 대로 너를 심판하겠다.”하시는 경고와 진노가 있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 입에 저주와
  저주는 축복과 반대로 남이 망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잠시 압살롬의 칼을 피하여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맨발로 감람산을 넘을 때, 시므이가 다윗과 신복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저주하기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하고 비난하며 무례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화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시므이의 저주는, 사사로운 감정과 오해로 저주한 것이지만, 공의로우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은, 자신들의 본분과 사명을 모르고 죄를 범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내리신 저주입니다.

  예수님은 저주 받을 수밖에 없는 무리들에게 공의로 내리신 저주였으나, 시므이의 저주는 스스로 자신이 받을 저주를 퍼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저주는, 받을 복은 모두 받고, 은혜가운데 지내면서도, 시기와 살기의 마음으로 지내는 자들에게 내리신 저주이시지만, 시므이의 저주는 자신에게 임해야 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예수님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셨으나, 시므이는 오히려 영혼을 해하는 자의 소행일 뿐이었습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무책임하며, 간단히 퍼부어지는 말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의 12아들들에게 하는 말들이, 그대로 축복과 저주로 임하였으며, 에서가 야곱에게 한 말들이, 그대로 임하였던 것을 보면, 사람의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저주를 받은 자가, 하나님께 진실과 전심으로 살면,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고, 저주를 퍼부은 자에게 그 저주가 임하지만, 저주 받은 자나 저주를 퍼부은 자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을 살면, 자신들에게 그 저주가 임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이 격할수록 무책임하게 쏟아지는 저주를 퍼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 자식들에게까지도 저주의 말이 쏟아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화가 난다고 아무렇게나 화풀이로 욕하고 저주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노아가 홍수 후에 포도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담았을 때, 포도주에 취하여 벌거벗고 잠이 들었을 때였습니다. 함이 아버지의 벌거벗은 몸으로 포도주에 취하여 잠이든 것을 보고 형제들에게 흉보며 비웃었습니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 쳐서 홑이불을 덮어 드렸습니다. 얼마 후에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함에게 저주하고,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하였는데, 그것이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함의 후손은, 셈과 야벳의 노예로 지내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폭발적인 진노와 저주는, 그대로 다른 불신의 사람들에게 임하는 저주가 됩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성도들과 교회를 모함하고 저주하면, 하나님이 대신 그들에게 갚아 주시고 보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어떤 누구와도 사사로운 분노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사로운 분노와 감정으로 대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해치는 일이나 영혼을 해하는 일이 아니면 화를 내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나 불신자들이 그런 약점을 가지고,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어떻게 하든지 무례하게 행동하고, 요구하면서도 오히려 모함까지 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 성도들은 순교의 각오로 참아야 합니다.
  자신들은 화를 내고 악담을 해도, 성도들이 조금만 대항하면, 오히려 모함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참아야 합니다.
  자신들은 무뢰한 행동을 저지르며, 성도가 그에 대한 항의를 하면 오히려 세상에 악담으로 광포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참아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우리가 손해를 당해도, 하나님이 대신 갚으십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런 양심을 가진 자들의 입을 말하기를,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 하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고난과 억울함을 아시고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애급에서 노예로 보낸 고통을 보시고, 구출하실 때, 애급에 갚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보상 받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복수는 하나님께 맡겨라”(롬 12:19).
  그리고 까닭 없는 저주는, 남에게 이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잠언 26:2,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 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 했습니다.

그 입에 악독이 가득 하고
  저주가 남이 망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악독은 그것이 나타나는 모양입니다. 소위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는 말입니다.

  시편에는 속임 수로 되어있는데, 혹독함과 무자비함으로 비난하며, 악의적인 말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악독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생명을 해치는 것입니다.
  농촌에서 농부들이 농약을 잘못 다루어 중독되어 죽기도하고, 중병에 고통당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악독은 농약의 독물보다도 무서운 것으로,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해치는 것으로, 가장 무서운 독입니다. 독사의 독보다도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악과 선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만 보아도 차이가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악독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얼굴 표정부터 다르고 눈동자의 모습부터도 다릅니다. 심지어 악을 저지르는 상습자들을 다루는 검경들의 표정과 눈빛들부터가 무섭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다루며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표정이 부드럽고 눈빛도 부드럽게 보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얼굴표정과 모습이 다릅니다.

  자! 우리 성도들과 세상에서 악을 쫓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교하여 보십시오.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은 언제나 평화가 넘치고 온유하고 겸손함이 가득하지만, 악을 자행하는 상습적인 사람들은 매사에 살기와 적의로 가득하여 무서운 얼굴들입니다.
  마음속에 악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건강을 해치고 악독으로 정신과 사상을 썩게 합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악담뿐이고, 인격과 생활에까지 피해를 줍니다.
  애급의 바로 왕은, 악독을 언제나 품고 있더니, 홍해 바다에서 600승의 병거들과 함께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에게 악독을 품고 추격하더니, 끝내는 하나님의 버린 바가 되고, 길보아 산에서 할례 없는 백성들의 손에, 칼로 목이 잘림으로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 왕후는, 악독을 품고 살더니, 그의 시체는 개들이 뜯어 먹었고, 피는 창녀들이 목욕하는 호수에서 씻김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길을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며, 정오의 태양과 같이 길을 이끌어주셨습니다.

  결국 선이 악보다 강하고, 위대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먼저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에서, 악독으로 물들지 않도록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악독은 벌써 자신의 마음에 독으로 물들게 하고, 정신에 물들게 하고, 행동에 물들게 하여, 자신의 삶과 행동에까지 물들게 하여 죽이는 것입니다.

  잠언 24:8,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특한 자라 하느니라.”
  잠언 24:10, “대저 의인은 7번 넘어 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시기를 기뻐하시고 도우시지만, 악을 행하는 사람들과는 멀리하시고, 미워하십니다.
  우리 모두 선을 행하고, 선한 심령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한 삶이되시기를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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