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께.
현재 ‘감리회소식’이 ‘자유게시판’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표명이나 감리회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의 글은 ‘자유게시판’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충신 고영근

작성자
도현종
작성일
2020-04-24 08:05
조회
851
"오! 주여 당신만이 나의 구주시오니 주외에 달리 무엇을 구하오리까? 주님 한분을 얻어서 나의 모든것을 얻었사오니 주님은 곧 나의 총 재산이며 모든 것이 모든 것이로소이다. 아멘 " (이용도 목사님 글중에서)

철저한 사랑의 대상과 목적은 주님이시다. 주님 사랑만이 단 하나의 고백이다. 주님 사랑은 주님 사랑으로 남는다. 주님외에는 더이상없다. 예수없는 정의는없다.

“왜 조직에서 역적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가?”
역사와 함께한 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역적은 만들어지는것이다. “조직에서 역적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힘을지닌 1인자와 2인자가 만들어내는 위작이다.

명성황후 시해자 역적 우범선 그의 아들 씨없는 수박 거짓 유포자 역적 우장춘 충신 고영근을 생각한다.

1. 역적 우범선

1895년 10월 8일 새벽을미사변이 발생하고 그사건에는 조선훈련원 대대장 역적 우범선이 큰 역활을 담당한다.명성황후를 시해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인들이 결정적으로 왕비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구술한 내용을 기초로 만들어진 "우범선최후사"라는 파수를 보다가 사건 직후, 명성황후의 시신을 보고 왕비가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역활을 맡았던것이다. 그 후 시신을 불태우라는 명령도 역시 우범선이 내린 명령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조국의 국모를 시해하는 사건에 깊이 관여하게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사자인 민족의 반역자 우범선은 이 사건으로 1896년 1월 일본으로 망명한다.‘요시찰한국인거동(要視察韓國人擧動)’ 자료에 따르면 미우라 등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 일본인사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계속 이어간다. 일본 최고의 국빈 대접과 권력 부귀등을 제공받는다.

1898년 4월 장남 우장춘이 태어난 후, 우범선은 1898년 11월 가족을 데리고 처의 언니 부부가 사는 히로시마현 구레시 와쇼마치로 이사했다.

2. 충신 고영근

1903년 10월28일, 고영근이 구레시에 있는 우범선의 집에 나타났다. 고영근은 은밀히 오카야마에 있는 노윤명에게 연락했고 11월13일 노윤명이 구레에 도착했다. 

1903년 11월24일 저녁 6시경, 고영근과 노윤명은 숨겨둔 단도를 꺼내 우범선의 오른쪽 목을 찌르고 몸으로 우범선을 덮쳐 턱과 목 등을 수차례 더 찔렀다. 우범선은 즉사하게된다. 민족의 원수를 갚는날이다.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만 8년1개월, 일본으로 망명한 지 7년 10개월 되던 시점이다. 고영근은 49세였고 노윤명은 30세였다. 둘은 우범선을 살해한 뒤 곧바로 인근 와쇼마치파출소로 자진하여 자수한다. 

고영근은 조사과정에서 “우범선은 왕비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자이므로 한국의 신하로서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죽였다”고 진술한다.

12월24일 히로시마지방재판소에서 열린 공판에서 고영근은 이렇게 주장했다. “예심결정서를 읽어본즉, 그대로 해도 좋으나, 단지 ‘모살죄’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 ‘적괴참살복국모수(賊魁斬殺復國母讐·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의 여덟 자를 넣어야만 본뜻이 되며, 또 노윤명을 공모자라고 그러는데 그는 전적으로 종범으로 단지 방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노윤명을 변호하게된다

우범선 살해 소식이 알려진 뒤 고종은 직접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를 불러 고영근의 선처를 부탁했다.

3. 거짓 과학자 우장춘

씨 없는 수박’은 허구이다. 조선총독부는 우범선 사후 20여 년간, 그의 두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상당한 액수의 학비를 지급했고 일본인 처 나카에게도 최고의 지원금을 보낸다. 대다수 한국인은 우장춘을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이 아니라, 일본 교토(京都)대학의 기하라 히토시가 세계 최초로 만든 것이다. 역사의 허구이다. 거짓이다. 일본과의 타협을 위한 조작이다. 역적과 그의 자손이 동일한 역적으로 취급함이 정당하다. 역적은 역적 가문을 만든다.

고종이 이토에게 고영근의 선처를 부탁한 것이 주효하게되었고 고영근은 감형되어 귀국하게된다. 고종 승하 후 4년 가까이 홍릉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황제 능비’를 닷새간 야밤에 인부들을 동원해 ‘高宗太皇帝’ 등 여덟 자를 충정으로 더 새겨 넣은 뒤 비각 안에 세운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일본내각의 궁내성과 협의한 끝에 다음해인 1923년 1월, 고영근이 세운 비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조선인을 자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금곡 숲속에 초가집을 짓고, 무관(無冠)의 참봉으로 만년을 보냈는데, 병으로 죽자 뼈를 태왕(고종)의 능 밑에 묻었다.” 그의 외침이다.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그 발밑에 뼈를 묻었다는 충신 고영근. 그는 이렇게 고종, 그리고 명성황후와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끈질긴 인연을 이어갔다.



전체 3

  • 2020-04-24 15:24

    유익한 역사교육을 받았습니다
    말만 무성한 감리교인들(다는 아니지만)에게,
    이런 결기가 아니면 정의를 말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들립니다


  • 2020-04-24 15:59

    감사드립니다.


  • 2020-04-25 18:22

    잘 읽고 감사합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4.10.22 72845
공지사항 관리자 2010.12.29 71213
13727 홍일기 2024.01.21 414
13726 홍일기 2024.01.21 482
13725 박영규 2024.01.20 369
13724 박영규 2024.01.18 357
13723 홍일기 2024.01.18 382
13722 박영규 2024.01.12 378
13721 박영규 2024.01.12 348
13720 함창석 2024.01.10 328
13719 최세창 2024.01.10 396
13718 홍일기 2024.01.10 398
13717 안신범 2024.01.09 521
13716 홍일기 2024.01.07 405
13715 함창석 2024.01.06 299
13714 박영규 2024.01.06 279
13713 함창석 2024.01.04 263
13712 홍일기 2024.01.04 476
13711 최세창 2024.01.03 338
13710 홍일기 2024.01.01 388
13709 함창석 2023.12.31 296
13708 홍일기 2023.12.30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