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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작성자
장병선
작성일
2023-11-26 01:13
조회
321
길 위의 목자/마9:35-36,

앞에서 저를 바라보고 계신 목사님, 사모님들이 다 저 보다 연배가 높으신, 목회선배요, 인생선배들이 분명할 것인데, 까만 후배가 하얀 백발로 선배님들 앞에 서게 되어 송구한 마음입니다.
제 마음은 아직도 18세이지만, 가는 세월 잡을 수 없고, 오는 백발 막을 수 없었습니다.
경륜에 의한 백발도 있고, 잔 머리 많이 굴려 온 백발도 있다는데,제 머리는 어찌해서 온 것인지 여러분이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한 때는 염색을 해 보기도 하였지만, 애써 염색을 하고 나면, 며칠만에 백발이 삐죽이 솟아 나오는 게 귀찮아서 ‘주어진 대로 살자’하고, 포기하였습니다.
제가 백발상태인 것은 게으른 탓도 있지만, 나름 그럴싸한 이유도 있습니다. 세상은 다양성으로 가득한 데 , 머리털 색깔이 모두 다 까만머리일 필요는 없겠다 싶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염색을 한다면 노랑머리나 핑크머리는 아니겠지만 까만 머리도 아닐 듯 싶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특징은 무한한 다양성과 정밀성과 조화입니다.
모든 존재 안에는 제각기의 개성과 신비와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나뭇 이파리 하나에도 우주가 담겨있습니다.
한 여름에는 싱싱한 푸르름으로 생명의 역동성을, 가을에는 화려한 단풍으로 원숙함을, 늦가을에는 메마른 잎이 되어 미련없이 삭풍에 자신을 맡겨 땅에 떨어져, 다음 세대의 밑거름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잎이 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화음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은 각기 다른 음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칼라풀한 것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칼라풀한 하나님입니다.
은목교회가 칼라풀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제가 은목교회에 나오게 된 것은 초교파로 은퇴한 목사님들이 모인다는 점에 마음이 끌려서 입니다.
그동안은 교단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목회하였다면, 이제는 그 울타리 밖의 타 교단 목사님들과 색 다른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영성과 지성의 깊이를 더 해가며 한국교회의 일치와 갱신을 위해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미 30여년의 종군 경험을 통해 기독교의 다양한 교파는 물론, 카톨릭의 신부, 불교의 법사들과도 함께 협력하며 군종활동을 하고, 친교를 나누었기 때문에 초교파, 초종파적인 활동이 낯선 것은 아닙니다.

저는 평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교파를 떠나 한 마음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예배하는 군인교회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교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은목교회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와 교회를 위해 은퇴목사들이 무언가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곳 만나교회피스홀에 은목교회를 세우셨다고 믿고 싶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교리적 배경과 신학적 탐구여정과 목회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게 되면 비빔밥처럼 맛있고, 영양가 있는 영적 자산을 만들어 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함께 섞이기 위해서는 때로는 나를 포기하고 한 발 물러서는 겸허함도 필요합니다.
내가 그동안 지켜왔던 신앙, 나의 주장, 성경말씀에 대한 나의 지식과 믿음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던가 돌이켜 볼 필요도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한국기독교 연구소에 나온 ‘조너선색스’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혐오하지 말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두 사람 모두 밤낮으로 성서를 읽었지만, 당신이 검정이라고 읽은 것을 나는 하양이라고 읽었다 ‘ (월리엄 블레이크)

같은 하나님, 같은 성경, 같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면서도 같은 것을 전혀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사실 수많은 교파가 생겨 난 배경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성경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분열의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 예로, 모세오경에는 ‘피를 흘리지 말 것’ ,’피를 먹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쪽에서는 ‘피를 먹지 말라’했으니, 순대를 먹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수혈을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는 피를 먹지 말라 한 것은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존엄한 생명을 지키라는 뜻이므로 교통사고 환자나, 산모가 출혈이 심해서 생명이 위태할 때는 수혈을 해야 한다고 이해합니다.

이는 한 예일 뿐 입니다. 문자 그대로 실행하면 큰 일 날 경우가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한계가 있고, 부족함과 약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알고 믿는 것만 고집하지 말고, 더불어 함께 배우며 하나님의 말씀의 참 뜻을 찾아 가야 합니다.

진보는 보수에, 보수는 진보에 열린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며,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절적인 것에는 다양성을 인정할 때, 진리의 참 길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제목을 ‘길위의 목자’라고 정한 것은 우리의 처지가 그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은퇴목사로서 그 동안은 안정된 목장이 있었고, 매 주일 서야 할 강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은목교회 외에는 매주 편안하게 갈 수 있는 교회도, 매주 보장된 강단도 없습니다.
그런데 , 예수님의 삶이 바로 그러한 삶이셨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시기는 하였지만, 회당장의 요청이 있어야만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객일 뿐이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 (머8:20)없다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유대교라는 좁은 울타리를 넘어
온 세상을 무대로, 세상의 진정한 주인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온 세상이 교회이셨고, 만인이 형제요, 자매이셨으며 만물이 당신 것이었습니다.

건축물로서의 교회, 제도로서의 교회는 정해진 공간과 규범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길 위로 나서면 모든 벽, 모든 경계가 사라집니다.
하늘이 지붕이 되며, 가는곳이 길이 됩니다.

‘한 간의 내 집 갖기를 원치 않음은 온 우주를 내집으로 삼기위함이요, 한 사람의 애인 갖기를 원치 않음은 모든 사람을 애인삼기 위함이라’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온 세계, 온 우주가 그의 교구였으며, 온 인류, 만물이 그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때는 길을 가시며, 어떤 때는 평지에서, 어떤 때는 산 위에서,어떤 때는 배 위에서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 동안 뭔가 제약이 따르는 목회여정이었다면, 이제 부터야 말로 예수님 처럼 진정한 자유인으로 마음 껏 살아볼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이야말로 은퇴목사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은퇴는 retire, 즉 타이어 갈아끼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노인은 사회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노인 한 사람이 오는 것은 거대한 도서관 하나가 오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은퇴목사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축적해온 신앙과 지적 자산과 경험을 세상에 아낌없이흩어 뿌릴 때가 왔습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은퇴목사나 사모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멈추지 말고,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며, 자기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활 쏘기, 즉 국궁을 합니다. 세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몸을 위해서입니다.
몸이 굳어지면 산송장이 되는 것임으로 몸이 굳어지지 않도록 많이 움직이려 합니다.

둘째는, 재미있게 살고 싶어서입니다. ‘핑’ 하고 시위를 떠난 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145미터를 날아가 과녁에 ‘쿵’하고 맞으며, 반짝하고 감지등에 불이 들어올 때의 쾌감은 궁사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듯이’ 세상 모든 것은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압니다.
세상은 무궁 무진한 모험과 체험의 장입니다.

셋째로, 세상으로 나아가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자기들 끼리만의 복음에 도취해 있을 때, 하나님은 대박해를 통해 뿔뿔이 흩어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모여,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 것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믿는 사람들 끼리만 모여 있는 데서 그친다면 그것은 사교모임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 나라의 빨치산이 되어 세상속으로 침투하여야 합니다.
활터는 저에게 새로운 의미의 선교적 터전이며, 거기 모이는 이들은 나의 형제이자 신도들입니다.
그들 앞에서 정기적으로 속 시원하게 설교할 수 없는 것이 때로 답답합니다.
평생 가르치는 일을 해 와서인지 은연중에 뭔가 가르치려고 훈수를 두려는 투로 말하는 못 된 병이 생겨서 조심하려고 합니다.
젊은이들 앞에서 ‘나 때는 말이야’하고 끼어들면 꼰대소리 듣습니다.

꼭 설교를 해야만 목사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복음은 꼭 말로만 선포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화)오직 영성훈련에만 전념하는 어느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답답하게 생각한 한 수도자가 원장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제자가 ‘스승님, 수도원에서 기도만 하지 말고, 마을에 내려가 사람들을 만나 전도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스승은 흔쾌히 대답을 하고, 제자들과 함께 마을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한 마디 말도 없이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수도원에 돌아왔습나다.
제자가 물었습니다.
‘아니, 마을에 내려갔으면 사람들에게 다가가 전도를 해야지, 한 마다 말도 없이 그냥 오면 어떡합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
‘우리의 모습을 보고도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말’로 전도하던 시대는 지났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위대한 것은 말씀을 육화하신 데 있습니다.
‘말씀’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몸으로 ‘말씀’을 살아 내셨습니다.
많은 말은 사람을 피곤케 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빛나는 것은 말씀을 육화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시나무 새는 한 번 울기 위하여 평생을 산다고 합니다. 가시에 찔려, 평생에 한 번 우는 그 울음이 가장 아름다운 소리랍나다.
그런데 목사인 우리는 평생 얼마나 많이 울었습니까?
오늘도 목사들은 저 마다의 강단에서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강단에 서는 것 같습니다. 수만 개의 교회와 여러 방송매체를 통해 수없이 설교가 선포되지만 사람들의 영혼은 더욱 황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인생을 송두리 째 변화시키는 말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 많은 세상에 말로서 혼잡을 더 하고, 잠든 자를 깨우기 보다, 깨어 있는 자를 잠들게 하는, 분명치 못한 나팔을 부는 경우도 많아 보입니다.

은퇴목사에게 강단을 맡기면 설교가 너무 길어져 초청을 꺼린다는 말을 듣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담임목사가 설교 짧게 하라 했다는 말 까지 덧 붙이면서 더욱 길게 하십니다.

이용도목사님은 한 번 강단에 서시면 16시간 설교를 하기도 하셨다지만
듣는 이들에게는 아쉽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길고 짦음의 문제가 아니라 말 보다 능력의 문제일 듯 싶습니다.
저는 무명목사이기에 오라는 데도 없지만, 웬만하면,초청에 응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강단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오프라인 만이 활동의 장인 것은 아닙니다. 놀라운 정보기술의 발달로 온 라인 공간은
시공을 초월하는 선포의 장, 섬김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때로 목사님들께서 카톡에 올리시는 글을 통해 감동을 받습니다.
저도 좋은 글 만나면 나누려고 노력을 많이 합니다. 어떤 때는 스스로 쓰기도 하고, 페친들이 쓴 주옥같은 글을 퍼 나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빨리 전하고 싶어서 제대로 다듬어지지도 않은 글을 올릴 때도 있습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했는데, 인터넷시대에는 순간에 지구촌 어디에나 갑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사방 팔방으로 퍼집니다.

마음만 먹으면 우리는 꿀벌처럼 여기 저기서 좋은 양식을 찾아서 자기도 먹고, 많은 이들에게 인터넷 공간을 통하여 나누어 줄 수도 있습니다.
꿀벌은 본능적으로 꿀을 찾지만, 사람은 어느 것이 꿀인지 분간을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독을 꿀이라고 우기는 경우도 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별의 은사를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계절과 장소에 따라 다양한 꽃이 피어나고, 꿀을 제공하듯이, 보는 눈이 있는 이에게 세상은 온통 꽃밭이요, 축제의 장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가는, 예수님 닮은 길 위의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한국교회에 더러, ‘길 위의 목자’가 아니라,’길 잃은 목자들’도 있는 것을 봅니다.
지난 주에 제 평생에 처음으로 밤을 세워 드라마 한 편을 보았습니다.
드라마 ‘수리남’입니다. 가장 거룩한 종교가 가장 세속적인 목적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드라마입니다.
종교가 비지니스 가 되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강대상은 밥상이 아닙니다.

‘네가 만일 천하를 얻는 다 해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천하를 얻고, 온갖 풍요와 온갖 쾌락을 누린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면 결코 성공했다 할 수 없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예언적 기능을 못하니 문화사역자들이 예언자의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연극, 영화 소설을 통해, 부패한 종교를 조롱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오늘 날, 대중을 움직이는 것은 문화이고, 기독교는 컬트화 되어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의식과 언어에 취해 자신들의 세계에 안주하는 소집단처럼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기독교는 공산혁명전야의 러시아 정교회와 다를 바 없습니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는 기독교의 특성을 잃어 버리고, 비현실적인 공리공론에 취해 예언자적인 사명을 다 하지 못하므로 공산주의가 일어나 모든 것을 집어 삼켰습니다.
러시아 정교회는 오늘까지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정교회 최고지도자가 전쟁광 푸틴은 위해서 축복하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 할 것은 백두혈통을 자랑하는 철부지 김정은이나 핵이 아니라, 맛 잃은 소금이 되어 대중에게 짓 밟히는 한국기독교의 타락상입니다.
기독교가 진정한 기독교가 되면 절대로 나라 망하지 않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옳고 그름을 냉정하게 분별하는 노련한 종들이 되어, 종교계나, 정치계의 사이비 지도자들에게 ‘이놈!’ 하고 호통을 칠 만한,
권위가 있고, 분명한 길을 제시하는 목사님들이 되시라고,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도

아무 것도 없으시나 모든 면에 풍요로우신 주님,
가장 연약하시나 모든 권세의 으뜸이신 주님,
어리석고 연약한 저희들을 친구로, 동역자로 삼아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목회인생 제 2막을 맞은 저희들을 이곳에 모아주시고,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주님의 나라 위해, 주님의 몸된 공교회를 위해 뜻을 모으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길 위의 목자이셨던 주님의 뒤를 충성스럽게 따르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한국교회의 연합과 공교회성 회복과 예언자적 사명을 일깨우는 우리 은목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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