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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된 아홉은 어디 있는가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4-01-03 12:44
조회
214
<누가복음 17:11-19>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 시작하는 말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수학 문제는, 우리가 받은 복을 세어 보는 문제이다.”라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피조물로서 받은 창조주 하나님의 복들을 알고, 감사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로마서 14:23 후반에,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죄의 종노릇을 하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회개하고 믿을 날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고 감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배은망덕하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있고, 보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나 사람에게서 받은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보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 사람에게 보람을 느끼게 해 주고,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선사해 줍니다.

2. 열 명의 나환자의 간청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나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나병은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아주 불행한 재액 중 하나입니다. 레위기 13장과 14장 그리고 전통적인 율법 해석의 편집물인 미쉬나 단편 네가임(Negaim)은 나병에 대해 상세하게 다뤘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나환자는 부정한 사람으로 규정되었고, 격리되었습니다. 레위기 13:45 이하를 보면, 나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서 다른 사람의 접근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나환자는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예로부터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도시들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격리 규정이 있었습니다. 나환자들은 다른 지역들에 머물 수는 있었지만, 거주지 밖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환자들과의 접촉은 부정한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랍비 신학은 나병을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간주했으므로, 나환자는 저주받은 죄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따라서 나환자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고통스러운 자의식이 있었습니다. 나병에서 완치된 사람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제사장의 확증을 받아야만 일반인과 같이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나환자는 신체적 고통, 가족과 격리되는 정신적 고통,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는 오해에서 비롯되는 영적 고통을 다 겪으면서 죽지 못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고통은 치유될 수 없다는 절망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독한 불행 중에도 복된 요소는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은 나환자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유대인이었고, 한 명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비참한 나병은 서로 원수처럼 여기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숙원을 풀고 함께 어울리게 했습니다. 불행 속에 담긴 복을 발견하는 것은, 불행을 이기는 길이 됩니다. 오랜 원한 관계를 풀고 한 무리가 된 열 명의 나환자는, 소망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죽기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도 살아 내고 있었기 때문에, 귀신들을 쫓고 불치의 환자들을 고치는 등의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고, 또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열 명의 나환자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나병 때문에 예수님의 옷조차 만질 수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멀리 서서 소리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긍휼히 여기소서”의 헬라어 엘레에손(ἐλέησον)은 도움을 베푸는 감정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쉬운 점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것도 아니고, 전인적 구원을 구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병을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는 해도, 그들은 불치의 병이며, 저주받은 부정한 병이라고 하는 나병을 예수님이 고쳐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긍휼히 여길 만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병처럼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 예수님의 긍휼이 필요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인생 문제와도 비교될 수 없는 가장 심각한 인생 문제는, 주 예수님의 긍휼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의 도움이 없어도, 인간의 힘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 주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주 예수님의 명령과 나환자들의 순종

열 명의 나환자가 부르짖는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은,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율법을 좇아 성전에 가서 제물을 바치고,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완치되었다는 확증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제사장들(히에류신, ἱερεύσιν)이라고 복수형을 쓴 것은, 치유된 몸을 보고 확인해 주어야 할 제사장이 유대인의 경우와 사마리아인의 경우가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같은 유대인들이라도 각자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제사장에게 완치된 몸을 보여 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그 사마리아인은 그리심 산에 있는 성전의 제사장에게로 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납득하기 힘든 점은 나병을 고쳐 주시면서 가라는 것도 아니고, 고쳐 주신 다음에 가라는 것이 아니라, 병든 몸 그대로 가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 믿음으로 구했으니 안수를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안찰을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상관없이 완치된 줄 믿고 가라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열 명의 나환자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해 갔고, 가는 도중에 놀랍게도 깨끗하게 완치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마가복음 11:24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14:15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 사이에서 울부짖는 모세에게 홍해를 갈라지게 한 후에, 이스라엘 자손더러 홍해를 향해 나가라고 명령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먼저 이스라엘 자손더러 홍해를 향해 나가라고 명령한 후에,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홍해가 갈라지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홍해를 향하여 순종해 가니까, 홍해가 갈라지면서 길이 생겼습니다.

믿음의 척도는 바로 순종입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에는, 말씀대로 이뤄지는 기적 같은 은혜와 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과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깨달은 다음에 순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한 다음에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매우 중대하고 절실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특히 코로나19와 그 변이 같은 불가항력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하고, 그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순종하고, 해결된 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순종해 가던 열 명의 나환자들은, 병이 완치되어 몸이 깨끗해진 기적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이,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믿음의 또 하나의 척도입니다. 기적의 은혜에 감사하여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는 것은, 예수님을 단순히 자신의 나병을 고쳐 주실 분으로 믿은 그가 이제는 자신을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주로 믿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단순한 치료사나 퇴마사 같은 사람으로만 믿지 않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영생의 구주로 믿게 되면 이해하기 어려운 감사까지 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만일 다리를 한 쪽만 잘렸으면 하나님께 두 다리가 다 잘리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 만일 두 다리가 잘렸으면 하나님께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 만일 목이 부러져 버렸으면 그 뒤는 걱정할 일이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우리는, ‘고난을 당하면 기껏 죽기밖에 더하겠냐? 죽으면 기껏 천국밖에 더 가겠냐?’ 하는 믿음의 생각을 하면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돌아와서 사례하는 한 사마리아 사람을 보신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탄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례한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4. 맺음말

사랑하는 여러분! 배은망덕하는 사람이 있고,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있고, 보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구속 은혜는 물론, 나병과 같은 불가항력의 인생 문제들을 기도와 순종을 통해서 해결 받은 체험이 있습니다. 또,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은혜와 복을 그때그때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제대로 알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익스피어(Shakespeare)는 “불어라, 불어라, 겨울의 찬바람이여, 너 아무리 차다 해도 배은망덕자보다는 나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보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므로 새 은혜를 받고,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선사해 줍니다.

설교자의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및 역서 : #신약 주석(마~계, 1-15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우린 신유의 도구/ 다수의 논문들/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설교집 37권/ 기타 다수
#번역서 : 예수의 비유(W. Barclay 著)/ 야고보서(A. Barnes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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