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제일교회 박물관 소식(4)
강찬모님은 답이 없으시넹.
샤프 선교사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유관순의 가족 중 오빠에 이어 관순까지 공주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관순도 파란 눈에 미소가 아름다운 사부인(사애리시)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사부인의 집에 도착한 관순은 그림에서나 볼 수 있었던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선교사의 집이 낯설고 신기하면서도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부인은 관순을 딸처럼 대해줬고 덕분에 영명여학교에 들어가 안정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공주제일교회에서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주에서 공부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공주에 와서 공부하고 있던 오빠와 함께하는 생활이 즐거웠습니다.
특히 주말이면 오빠와 함께 예배를 보고 공주의 제민천 등 공주의 곳곳을 오빠와 함께 돌아다니는 시간들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종종 일본인들이 주민이나 학생들을 괴롭히거나 무시하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오빠가 몹시 화를 내는 모습에 같이 분개하면서도 관순은 오빠에게 어떤 화를 당할까봐 걱정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나 2년 여를 공주에서 생활하면서 공주의 공산성과 금강, 미나리꽝과 특히 제민천을 돌아다니며 많은 생각을 정리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공주는 관순에게 많은 추억을 안겨주고 성장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관순이 13살 되던 해 겨울에 사부인은 영특한 관순이 더 넓은 세상에서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서울의 이화학당에 장학생으로 추천하여 공주를 떠나게 됩니다.
1918년 유관순은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 고종 장례식을 계기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학교가 휴교함에 따라 고향 병천에 내려와 아우네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아우네 장터 독립만세운동으로 부모님이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돌아가시고 유관순은 그 주모자로 붙잡혀 공주 교도소에 이송 수감되게 됩니다.
천안에서 정안을 거쳐 공주까지 백 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이동을 해야 했고 그렇게 그리웠던 공산성과 금강을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다시 보게 됩니다.
공주 교도소에는 이미 공주읍 만세운동을 주모하여 붙잡혀 수감된 오빠가 있었지만 직접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공주 교도소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고초를 겪다가 유관순은 반성의 기미가 없고 죄질이 크다는 이유로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 수감되게 됩니다.
서울 형무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세상이 아닌 지옥과 같았습니다. 유관순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함께 수감되어 있던 많은 애국지사와 일반 재소자들과 3.1 독립만세운동 1주년을 기해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되고 그로인해 수많은 고초를 겪게 됩니다.
이후에 수감생활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고문이 자행되었고 어린 여자의 몸으로 모진 고초를 받으면서 유관순은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유관순 나이 열여덟, 9월 28일 유관순은 그렇게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거두게 됩니다.
아마도 죽어가면서 먼저 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처음 세상에 대하여 눈뜨게 하여주고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보냈던 공주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군계일학의 감릭회 빛여성인 누님. 혹 허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보내주시걸랑 우리 집안으로 오세요.
근데요. 샤프선교사 부부가 맞나요?
급 또 질문 : 위 동영상 자료 등과 박물관이 문화섴교 뭐 그런건가요?
강찬모님은 답이 없으시넹.
샤프 선교사 부부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유관순의 가족 중 오빠에 이어 관순까지 공주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관순도 파란 눈에 미소가 아름다운 사부인(사애리시)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사부인의 집에 도착한 관순은 그림에서나 볼 수 있었던 빨간색 벽돌로 지어진 선교사의 집이 낯설고 신기하면서도 무척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부인은 관순을 딸처럼 대해줬고 덕분에 영명여학교에 들어가 안정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공주제일교회에서 종교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공주에서 공부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공주에 와서 공부하고 있던 오빠와 함께하는 생활이 즐거웠습니다.
특히 주말이면 오빠와 함께 예배를 보고 공주의 제민천 등 공주의 곳곳을 오빠와 함께 돌아다니는 시간들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종종 일본인들이 주민이나 학생들을 괴롭히거나 무시하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오빠가 몹시 화를 내는 모습에 같이 분개하면서도 관순은 오빠에게 어떤 화를 당할까봐 걱정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나 2년 여를 공주에서 생활하면서 공주의 공산성과 금강, 미나리꽝과 특히 제민천을 돌아다니며 많은 생각을 정리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공주는 관순에게 많은 추억을 안겨주고 성장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관순이 13살 되던 해 겨울에 사부인은 영특한 관순이 더 넓은 세상에서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서울의 이화학당에 장학생으로 추천하여 공주를 떠나게 됩니다.
1918년 유관순은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여 공부를 계속하게 됩니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 고종 장례식을 계기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학교가 휴교함에 따라 고향 병천에 내려와 아우네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됩니다.
아우네 장터 독립만세운동으로 부모님이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돌아가시고 유관순은 그 주모자로 붙잡혀 공주 교도소에 이송 수감되게 됩니다.
천안에서 정안을 거쳐 공주까지 백 리가 넘는 길을 걸어서 이동을 해야 했고 그렇게 그리웠던 공산성과 금강을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다시 보게 됩니다.
공주 교도소에는 이미 공주읍 만세운동을 주모하여 붙잡혀 수감된 오빠가 있었지만 직접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공주 교도소에서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고초를 겪다가 유관순은 반성의 기미가 없고 죄질이 크다는 이유로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 수감되게 됩니다.
서울 형무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세상이 아닌 지옥과 같았습니다. 유관순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함께 수감되어 있던 많은 애국지사와 일반 재소자들과 3.1 독립만세운동 1주년을 기해 옥중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되고 그로인해 수많은 고초를 겪게 됩니다.
이후에 수감생활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고문이 자행되었고 어린 여자의 몸으로 모진 고초를 받으면서 유관순은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유관순 나이 열여덟, 9월 28일 유관순은 그렇게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거두게 됩니다.
아마도 죽어가면서 먼저 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처음 세상에 대하여 눈뜨게 하여주고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보냈던 공주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군계일학의 감릭회 빛여성인 누님. 혹 허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보내주시걸랑 우리 집안으로 오세요.
근데요. 샤프선교사 부부가 맞나요?
급 또 질문 : 위 동영상 자료 등과 박물관이 문화섴교 뭐 그런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