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29 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7-01-29 11:54
조회
1167
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교수. 426-3051)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 한글/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29 강>>

마. 겨자씨 비유<4:30-32>
    <비교 : 마 13:31-32, 눅 13:18-19>

“이 작은 비유는 복음서들 안에서 두 가지 형태로 전승되었다. 그 하나는, 마르코복음의 이 구절에 나온 형태이며, 다른 하나는, 마태오복음 13장 31-32절보다 루가복음 13장 18-19절에 잘 보존된 말씀 자료에 잘 소급되는 형태이다. ‘마태오복음은 Q형태(Q-Fassung)와 마르코적인 형태를 결합시켰다.’ 그 밖에 마르코복음 4장 30-32절과 특히 일맥상통하는 토마복음의 형태(말씀 20)가 있다. 마르코와 Q자료 사이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Q자료에 의하면 ‘한 사람’이 겨자씨를 그의 정원(마태오복음 : 밭)에 뿌리는데, 마르코복음에는 씨 뿌리는 사람이 아예 나오지 않고, 씨앗과 큰 관목(가장 작은-가장 큰) 사이의 대조가 묘사된다는 점이다”(J. Gnilka, p. 238).

그러나, 이 비유가 Q자료에는 한 부인이 나오는 누룩에 관한 다른 비유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한 사람은(남자)’ 첨가된 것일 수 있다( Michaelis).

불트만(R. Bultmann)은 로마이어(Lohmeyer, Evg. d. Mk. 해당 구절 )의 “막 4:30-32은 같은 비유의 두 변형이 결합된 것이다.”라는 주장을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크랜필드는 현재의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미래에 있어서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되는 하나님의 나라와의 대조라고 말하지만(山口 昇), 옳지 않다. 도드(C. H. D- odd)는 누가가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는 본문을 원래의 것으로 간주하고, 이 비유가 지금 막 실현되는 하나님의 지배권의 성장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녹스(W. L. Knox, Sources II. S. 79, 1)의 견해도 같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큄멜(Kmmel, Verh. u. Erf. S. 122-124)의 주장이 옳다. 즉, Q본문에 비해 원래 것인 마가 본문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핵심은 성장과 발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의 작음과 결과의 큼의 대조를 말한다는 것이다”(R. Bultmann).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은 예레미아스(Jeremias, Gleichn. S. 127-130), 헨리(M. Henry), 슈바이쳐(E. Schweizer), 웨셀(W. W. Wessel), 고울드(E. P. Gould), 레인(W. L. Lane), 산너(A. E. Sanner), 그닐카(J. Gnilka, p. 238), 山口 昇, 黑崎幸吉 등이다.

마가는 이 기사를 【30】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로 시작한다.

이 수사적 질문은 셈족의 습관과 같은 것으로, 랍비들이 즐겨 쓰는 표현이었다. 슈바이쳐(E. Schweizer)는 “마가에게 있어서 적어도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적절하게 말하는 어려움을 강조한다.”라고 하지만, 실은 청중의 주의를 끌려는 것이고(W. Hendriksen, J. Gnilka, p. 239), 청중의 지성을 자극하려는 것이다(E. Bickersteth).

하나님의 나라는 1:15의 주석을 보라.
비유(파라볼레, παραβολῇ)는 3:23의 주석을 보라.

예수님은 【31】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라고 하셨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것을 나타내는 격언과 같은 것이었다(마 17:20, 눅 17:6).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작은 씨가 있다(예 : 흑난초의 씨).

미쉬나(1:22의 주석을 보라.)는 겨자를 야생의 열매로, 테오프라스트(Theophrast)는 재배 식물로 여긴다. 겨자씨의 작음을 강조하는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 “해는 겨자씨 만큼 작게 핏빛으로 물들기 전에는 지지 않는다.” 이 속담은 햇빛의 지극히 희미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겨자씨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 즉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복음 선포에 의한 하나님의 통치의 본격적인 시작이, 세상적 관점으로는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에 예수님의 제자단을 포함시키는 것은 ‘작음’을 강조하는 문장의 성격상, 또 한 알과 같으니라는 말로 미루어 옳지 않다. 같은 이유로 교회로 보는 견해(H. E. Luccock, 이상근)도 받아들일 수 없다.

작은 시작과 대조되는 큰 결과에 대해, 예수님은 【32】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라고 하셨다.

바클레이(W. Barclay)는 말을 탄 사람의 높이 만큼 큰 겨자나무를 보았다는 팔레스틴 여행객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그 키가 대개 10피트(약 3m)인데, 때로 15피트(약 4.5m) 되는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새들이 그 가지에 충분히 깃들일 수 있는 것이다.

깃들일은 카타스케눈(κατασκηνούν)이며 ‘보금자리를 꾸미다’, ‘쉴 곳이 되다’, ‘숨을 곳이 되다’ 등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대제국을 묘사하는 평범한 방법 중 하나는, 큰 나무로 묘사하는 것이고, 또 그 안에 속해 공물을 바치는 민족들은 그 가지의 그늘에서 피난처를 찾는 새들과 같은 것으로 말해진다(겔 17:22-, 31:1-, 단 4:10, 21). 그러므로, 가지에 새가 있는 나무의 비유는 대제국과 그 일부를 형성하는 민족들을 표상하는 것이다”(W. Barclay).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 즉 예수님의 인격과 복음 선포에 의한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가 결국에는 온 세상 나라들을 정복하여 신령한 대제국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사랑의 통치에 있고, 그 백성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현실적 구현이 바로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완성의 때를 소망 중에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교회의 기다림이란 그리스도의 도구 노릇의 특징인 끊임없는 성숙‧성장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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