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23강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06-11-27 20:16
조회
1262
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객원 교수. 426-3051)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한글/ 설교집 16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23 강>>

나. 서기관들의 오해<3:22-30>
    <비교 : 마 12:22-32, 눅 11:14-23>

이 기사는 전형적인 논쟁 설화이다. 이 전승이 직접 목격자의 증언에 의한 것이었는지 어떤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신뢰할 만한 전승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C. E. B. Cranfield, “데라”).
마가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신 예수께 대해 기록한 마태(마 12:22-23)나, 단순하게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께 대해 기록한 누가(눅 11:14)와 달리, 곧바로 이 사건을 기록하였다.

마가는 이 기사를 【22】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로 시작한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1:22의 주석을 보라.)은 지역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다(J. D. Stevens). 이 서기관들의 명성은 시골 사람들뿐만 아니라, 시골 서기관들에게도 영향력이 있었다(M. Henry). 실제로 이 서기관들에게는 지방 서기관들보다 더 큰 특권과 권위가 있었다(A. E. Sanner). 이 서기관들이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영향력이 얼마나 널리, 그리고 얼마나 고르게 퍼졌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서기관들이 머나먼 길을 내려온 것은 자발적인 선의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염탐을 목적으로 파견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갈릴리 선교가 산헤드린의 비판적 주의를 끌었다는 점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W. L. Lane).

예수께 대한 적의의 실제적 핵심 세력을 대표하는바 예루살렘에서 온 교권자들은 훨씬 더 혹독하게 비방하였다. 즉, 예수님을 가리켜,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하였다. 극도의 모독을 느끼게 하는 이 표현은 “그들의 시기와 악의의 결과이다”(E. Bickersteth, W. Hendriksen). 그들은 추종자들을 잃기 시작한다고 느꼈으며, 이에 견딜 수가 없었다(대조 : 요 3:26, 30). 그렇다고 해서, 듣기도 하고 직접 보기도 한 예수님의 이적을 부인할 수도 없고 해서 걸고넘어진 점이 바로 그 이적의 동인에 관한 것이었다. 즉, 예수님이 귀신(1:23의 주석을 보라.)을 쫓아내는 것은 바알세불을 지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또 귀신의 왕을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비난함으로써 예수님의 일을 비합법적인 것으로 낙인을 찍고, 그분을 요술사의 범주에 집어넣는 것이다. 마법에 대한 고발은 널리 퍼져 있었고, 탈묻과 교부 문서에서 증명된다”(W. L. Lane). 이 점에 대해, 그닐카(J. Gnilka, p. 191)는 “여기서 예수께 행해진 비난들은 처음 나온 것이지만, 가장 오래 된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의 논쟁에서도 거듭 반복된다. 이 비난들은 백성을 미혹한다는 고발과 관련된다(요 7:20, 21, 8:48, 10:20. Just. Dial 69). 기적의 카리스마가 사회적인 갈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예수님은 새로운 가르침을 선포하기 때문에 기적의 카리스마를 지닌 자로서 주술의 혐의를 받는다.”라고 하였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사랑을 행하거나, 다른 사람의 사랑의 행위를 기뻐하고 격려해야 할 율법 종교의 교권자들이, 시기와 종교적 위선에 사로잡혀 사랑의 주님을 저주받을 마법사로 매도하는 것이다. 실은 그들 자신이 귀신의 왕 바알세블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자신의 신분과 자신의 일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중요한 일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바알세블(Βεελζεβοὺλ)은 라스 사마라(Ras Shamara) 명판에 있는 것처럼, 본래 신의 칭호이었고, ‘집의 주’를 의미하였다(F. C. Grant). 또, ‘거주의 주’, ‘불결의 주’라는 뜻도 있다. 슈바이쳐(E. Schweizer)는 그 신을 가리켜 “옛 시리아의 신이었다”(왕하 1:2)라고 하였다.
유대인들에게는 귀신의 왕(마 12:24)인 ‘사단’(1:13의 주석을 보라.)으로 이해되었다.

예수께서 그들의 비방에 대해 비유로 대답하신 것에 대해, 마가는 【23】예수께서 저희를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단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비유는 파라볼라이스(παραβολαίς)로서 παρά(‘곁으로’, ‘건네어’, ‘넘겨’)와 βάλλω(던지다)의 합성어이며, 한 사물을 다른 사물 곁에 두어 비교함으로써 깨우치는 방법을 뜻하는 것이다. 비유는 예수님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사용한 것이었다(삼하 12:7, 사 5:1-7). 바클레이(W. Barclay)는 “예수님과 같은 시대의 위대한 학자이며 교사인 랍비들도 종종 그들의 교훈을 인식시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라고 하였고, 또 “예수님은 앞서 사용된 비유의 방법을 그대로 답습하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유대의 교수 형식을 취하여 새로운 의미와 아름다움으로 채우셨다.”라고 하였다.

“비유의 방법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끌게 한다. 그 방법은 정상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거의 보편적으로 흥미를 끌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림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상대적으로 추상적인 사상들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즐겨 비유를 사용하셨다. 그렇게 하신 또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즉, 비유란 ‘천국의 의미를 지닌 세상의 이야기’로서 해석되어 왔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인간의 정신을 천국의 것들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세상적인 것들을 사용하셨다. 어떤 이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자연적인 질서와 영적인 질서 사이에 단순한 유비가 아니라, 내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믿으셨다.’ 또한, 바울이 보이는 세계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알려 주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말했을 때(롬 1:20), 그도 같은 말을 한 것이었다.......템플(Temple) 감독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규칙적이며 정상적인 데서, 즉 해가 뜨고 비가 내리며 식물이 자라는 것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도록 가르치셨다.’라고 말하였다”(W. Barclay).

일반적으로 비유의 목적은 사람들이 이미 익숙해 있는 사물에 대한 판단을 유도한 후에, 그 판단을 그들이 알지 못했던 다른 사물의 의미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유의 본질은 인간의 정신을 깨우치기 위해 찌르는 검이다”(W. Barclay). 그러므로 “비유의 해석은 서재에서 오랜 노력 끝에 발견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유란 그 이야기가 예시하는 단 하나의 진리가 듣는 사람의 정신을 만나기 위해 뛰어나와야만 하는 것이다”(W. Barclay).

서기관들과 예수님의 논쟁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면전이 아닌 곳에서 예수님을 악평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자기 앞으로 불러다가 비유로 논박하신다. 대개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은 면전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고, 뒤에서만 악평을 일삼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당한 사람은 어느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게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때로 비유는 직설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나타낸다(삼하 12:7). 예수님이 ‘사단’(1:13의 주석을 보라.)이 어찌 사단을 쫓아낼 수 있느냐라고 하신 것은, 서기관들의 비난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사단은 사단 자신을 쫓아내지 못한다. 또한,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도 쫓아내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는 “모든 사람은 사단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도, 그 자신의 이익에 반하여 직접 행할 리도 없다는 것을 안다.”라고 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은 사단을 쫓아내는 일은 사단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즉, 선한 목적은 악한 방법으로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한 서기관들의 비방이 얼마나 얼토당토아니한가를 밝히 일깨워 주시기 위해 몇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24】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25】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26】만일 사단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이에 망하느니라.
나라나 집이나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면 서지 못하고 결국 망하고 마는 것처럼, 사단의 왕국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사단의 왕국이 완전히 멸망하는 때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이다.

자신의 축귀가 귀신의 왕을 힘입은 것이 아님을 소극적인 비유로 설명하신 예수님은, 이제는 적극적인 비유로 설명하신다. 【27】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이 구절은 이사야 49:25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람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강한 자는 죄와 질병, 고난과 죽음 등을 통해 인간을 지배하는 사단을 의미하고, 세간은 “사단이 사악한 통치를 하는 데 가치 있는 것들”(W. Hendriksen)인 “사단의 도구와 기구들”(E. P. Gould), 그리고 사단에게 속한 인간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유의 요지는 사단보다 더 강한 자인 자신이 강한 자인 사단을 제압하고, 그 집에 있는 사단의 소유, 특히 인간들을 탈취하여 자유롭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축귀의 권능은 바알세불이 아니라, 그 안에 내주하신 성령에게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사단의 힘은 결정적으로 제압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왕국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상대적으로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와 그 나라는 더욱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요일 3:8). 사실상, “예수님은 삶을 악의 힘과 하나님의 힘 사이의 싸움으로 받아들이신다. 그분은 해답 없는 문제에 관한 명상으로 시간을 낭비하시지 않았다.......우리는 악의 기원에 관한 논의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그 문제와 싸우는 방법을 쓰는 데에는 훨씬 더 적은 시간을 보낸다. 어떤 사람이 자다가 깨 보니 자기 집에 불이 나고 있었다. 그는 선 채로 개인 집의 화재의 기원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읽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은 선과 삶의 한가운데 있고, 세상에서 맹위를 떨치는 악과의 본질적인 싸움을 보셨다. 그분은 그 문제에 관해 명상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그 문제를 처리하셨고, 다른 사람에게 악을 극복하고 의를 행할 힘을 주셨다. 예수님은 질병 퇴치를 사단을 정복하는 일 중 하나로 보셨다”(W. Barclay).

이어서 예수님은 【2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29】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라고 엄히 경고하셨다.
진실로는 아멘(ἀμὴν)이며 {‘견고하다’, ‘신실하다’를 뜻하는 히브리 어원에서 온 말이다(P. E. Hughes)}(고후 1:20의 주석). 이 말은 구약성경에서 ‘서약’, ‘진술’, ‘선언’ 등을 확인할 때 사용했는데(민 5:22, 왕상 1:36, 렘 28:6), 그것이 예배 때의 기도에 동의를 표하는 회중의 응답으로 발전하였다(시 106:48, 느 8:6, Ⅱ 에스드라서 15:13, 18:6, 계 5:14, 7 :12, 19:4). 또, 보통 문장의 서두에서 ‘진실로’, ‘참으로’, ‘정말로’라는 뜻으로, 그리고 찬양 등의 끝에 기원을 나타낼 때에 사용되었다. 또한, 이 말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계 3:14).

{쇠트겐(Schoettgen)은 이 말이 얼마나 미신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는가를 입증하기 위해 수많은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아멘’을 말하는 자는 축복하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 “‘아멘’을 말하는 자는 누구이든 그에게는 낙원의 문이 열리게 된다.” “‘아멘’을 짧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날이 짧게 될 것이다. 반면에, ‘아멘’을 분명하게 길게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의 날이 길게 될 것이다.”}(고전 14:16의 주석).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ἀμὴν λέγω ὑμίν)는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반영하는 유명한 표현인데, 본서에는 처음으로 나타난다. 특히, 확인할 때 사용하신 형식으로 마태복음에 31회, 누가복음에 6회, 본서에는 13회 사용되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ίν)라는 표현이 25회 나온다. 이 표현은 새롭고도 중대한 교리나 교훈을 줄 때에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진실로라는 말에 의한 도입구가 예수님의 말씀을 특징짓는 것인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 도입구는 묵시문학자의 이 같은 명세 양식에서 그가 예고한 종말 때의 일들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성을 독립적으로 부여하기 위해 사용된다”(J. Gnilka, p. 194).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의 죄(하마르테마타, ἁμαρτήματα)는 1:4의 주석을 보라.
훼방은 블라스페미아이(βλασφημίαι)이며 모든 종류의 비방 또는 욕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사람이나 사물, 특히 하나님께 대해 비방하거나 욕하거나 모독하거나 불경스런 말을 지껄인다는 뜻이다. 그 좋은 예로, 비록 회개하기는 했지만, 그 직전에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한 사실을 들 수 있다(막 14:71).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의 요지는 이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용서받지 못하는 단 하나의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라고 하셨다.
여기서 성령은 독립적인 행동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적 행위의 내적 근거로 고려되고 있다. 이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수세 때에 임하셨고, 또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가시기도 하였다. 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갈릴리 선교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특히, 예수님은 자신의 축귀를 성령께 돌리신다. 고울드(E. P. Gould)는 “성령의 작용이 제일 분명한 것은 이적에서 보여진 능력이 아니라, 이적의 도덕적 특성에서이다. 예수님의 남은 생애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이적들에 관한 도덕적 독특성이 있다. 바로 거기에서만 뚜렷하다. 이 특징은 특히 예수님이 사람들의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시는 곳에서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내적 생명을 어지럽히는 악령으로부터 그들을 자유롭게 하는 데서도 나타난다.”라고 하였다.

성령의 힘과 사단의 힘 사이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전자는 의와 진리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을 용서하고, 자유롭게 하며,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 후자는 불의와 거짓과 증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하고, 속박하며, 멸망으로 이끄는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성령의 힘을 사단의 힘으로 뒤바꾸어 예수님을 비난함으로써 성령 훼방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슈바이처(E. Schweizer)의 “예수님 자신은 율법 선생들이 이 죄를 범했다고 주장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기 때문에 경고하신다.”라는 설명은 옳지 않다.

예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악의 힘과 속박에서 불운한 인간을 자유롭게 하셨을 때(마 12:22, 눅 11:14), 율법 선생들은 사단의 힘으로 돌렸다. 성령께서 진리를 깨우치시고(요 16:13. 참조 : 요 14:17, 16:13, 요일 4:6), 예수님을 주로 믿게 하시지만(고전 12:3), 시기와 질투와 편견 등으로 굳어진 마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성령의 능력을 사단의 힘으로, 하나님의 선을 사단의 악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 훼방 죄는 단 한 번에 범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엡 4:30)이 성령을 거역하는 데 이르게 되고(마 12:32), 성령 거역을 계속하게 되면 성령을 소멸시키는 데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살전 7:5). 그 결과로 성령께서는 그 인간에게서 떠나 버리시는 것이다(시 51:11).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하는 자가 용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특별한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성령을 통해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로 믿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성령을 훼방한 사람이 진실로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면 그도 역시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뭇사람 앞에서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가 사하심을 받고 사도로 쓰임받은 사실로도 입증되는 것이다.

아무튼, “성령 훼방 죄는 끊임없이 성령의 조명을 거절하고, 성령의 역사를 반대하고, 일부러 예수님을 잘못 선전함으로써 그들 자신을 정당화하는 의도적인 맹목의 죄이다”(R. A. Cole). 그리고 이 죄는 영원한 죄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영원한 죄의 죄(하마르테마토스, ἁμαρτήματος)는 א, B, L, Δ, Θ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 C*vid, D, W, ƒ13 사본 등에는 하마르티아스(ἁμαρτί-ας)로 되어 있고 ; A, C2, K, Π에는 크리세오스(κρίσεως)로 되어 있다. 사본의 가치상 첫째 것을 취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고울드(E. P. Gould)는 “영원한 죄는 그 인간을 영원한 형벌, 즉 그 결과가 영원한 형벌인 형벌에 종속시킨다.......죄의 영원성에 의한 용서의 불가능, 즉 끊임없는 죄에 결부된 끊임없는 결과가 끊임없는 형벌의 철학이다.......영원한 형벌은 너무 커서 진노가 결코 감소될 수 없는 단 하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죄의 효력의 결과이거나, 회복이 불가능한 죄 된 상태가 고정되는 죄의 과정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에 대해, 마가는 【30】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라고 하였다.
더러운 귀신(πνεύμα ἀκάθαρτον)은 1:23의 주석을 보라.
이 구절은 마가가 덧붙인 설명인 것 같다. “이 구절의 동사가 미완료 시제인 점은 반복과 고정된 정신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W. L. 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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