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교회 장로님들께...
작성자
오재영
작성일
2020-07-15 22:25
조회
1360
주님의 긍휼하심을 기도드리며...
이재철 목사의 저서“매듭짓기”라는 말씀에 등장하는 사연입니다. 그가 어느 날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어느 교회 장로님으로부터 전자우편(e-mail)을 받았습니다. 교회 문제로 인해 목회자로부터 받은 상처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이 일을 겪으면서 자꾸 소화불량과 통증이 있어 위 내시경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위벽에 마치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퀸 것과 같은 생채기가 두 줄이나 나 있어 피가 고인 상태라 아물지 않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제가 무슨 독한 약을 복용했었거나, 또는 극심하게 신경 쓰는 일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약을 복용한 적은 없다고 답변을 했지요. 그러자 독실한 불교 신자라는 그 의사가 제게 충고했습니다. ‘선생님, 종교를 한번 가져보시지요.’ 그 말을 들은 저와 제 아내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 방을 나왔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하나님께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의사가보기에 그 상처가 얼마나 깊었으면, 평생 크리스천으로 살아온 그에게 종교에 귀의할 것을 권했겠는가? 자기 환자의 그 깊은 내적 상처가 실은 종교로 인함 인줄은 상상치도 못한 채... 그런데 자기가 알기는 그 교회의 목사도 바로 그 장로와의 갈등으로 인해 심장 부정맥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자기는 그 장로와 목사 두 분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기에, 두 사람 다 나무랄 데 없이 인격적이고 모범적인 삶을 사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목사와 장로의 신분으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의식지도 못하는 가운데 이렇듯 상대의 생명을 서로 해치고 있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사단의 올무다...
이것은 비단 특정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 배려와 희생하려는 마음은 없이, 주님 뜻 관계없이 자기주장들을 세우려는 생각들로 오늘 대부분의 교회가 목사와 장로, 성도들 간의 갈등으로 내홍을 격고 있다.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다. 어찌해야 이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종교의 허황과 무용성, 및 해악 성을 깨닫게 해 줄 수가 있을까? 너나없이 주님의 엄위 앞에서 주님을 믿는다는 그 믿음의 저울에 자신을 올려놓고, 냉철히 각자 본질적인 질문을 스스로 물어야한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그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 그리고 진리를 세상에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편지, 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 하신다. 지금 세상이 우리를 보고 그리 생각들을 하는가?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목사든 장로든 본질에 있어 자신의 거듭남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분쟁 중에“감게”에 등장하여 말하는 이들 대부분이 義를 빙자하여 추태(醜態)들 이지만 실상은 상대를 대중 앞에 끌어내어 “망신”주려는 꼼수일 뿐이다. 본인들은 망신당해야만 회개하는가? 피차 사단의 덫에 점점 더 옥쪼임과, 늪에 빠져 함께 소멸할 뿐이다. 진정, 교회를 사랑한다면 주님 앞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엎드려 기도해야한다. 이것이 사명자다운 본인과 자녀를비롯한 공동체 모두가 사는 길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기도는 자기 기분에 따라 자기편리한대로 하고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하고 하라 하시는 말씀이 없으면 기다려야 한다.(겔4장)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기도 한다는 이들에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엄위 앞에 엎드리는 겸손의 모습들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주님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려하는 주제파악 못하는 오만방자(傲慢放恣)한 모습들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더러운 야욕의 악취를 풍기며,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마저 실족시키는 걸림돌들이 되고 있을 뿐이다. 이 罪들 어찌 감당들을 할 것인가?
진정 본인들이 내세의 소망 분명한 거듭난 이들로서 십자가를 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찬송가 289장의 가사 대로, “주 예수 내만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망령된 행실을 끊고,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 천성에 올라가 주님을 뵐 그 기쁨과 소망때문에 사는 이들이다. 이것이 아니면 단언하건대 교회의역사가 얼마이든지, 목사가 무슨 대단한 학위를 받았든지, 대를 이은 평생을 섬겨왔다하여도 신앙의 연조와 관계없이(히5:11-14), 그 신앙공동체는 지금 교할한 사단에게 포로된 신세로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 한동안 회자된 말 중에 “적(敵)과 싸우는 데는 등신,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는 귀신(鬼神)”들 이라 하지 않는가? -
이재철 목사의 저서“매듭짓기”라는 말씀에 등장하는 사연입니다. 그가 어느 날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어느 교회 장로님으로부터 전자우편(e-mail)을 받았습니다. 교회 문제로 인해 목회자로부터 받은 상처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이 일을 겪으면서 자꾸 소화불량과 통증이 있어 위 내시경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위벽에 마치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퀸 것과 같은 생채기가 두 줄이나 나 있어 피가 고인 상태라 아물지 않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제가 무슨 독한 약을 복용했었거나, 또는 극심하게 신경 쓰는 일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약을 복용한 적은 없다고 답변을 했지요. 그러자 독실한 불교 신자라는 그 의사가 제게 충고했습니다. ‘선생님, 종교를 한번 가져보시지요.’ 그 말을 들은 저와 제 아내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 방을 나왔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하나님께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의사가보기에 그 상처가 얼마나 깊었으면, 평생 크리스천으로 살아온 그에게 종교에 귀의할 것을 권했겠는가? 자기 환자의 그 깊은 내적 상처가 실은 종교로 인함 인줄은 상상치도 못한 채... 그런데 자기가 알기는 그 교회의 목사도 바로 그 장로와의 갈등으로 인해 심장 부정맥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자기는 그 장로와 목사 두 분을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기에, 두 사람 다 나무랄 데 없이 인격적이고 모범적인 삶을 사는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목사와 장로의 신분으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의식지도 못하는 가운데 이렇듯 상대의 생명을 서로 해치고 있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사단의 올무다...
이것은 비단 특정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로 배려와 희생하려는 마음은 없이, 주님 뜻 관계없이 자기주장들을 세우려는 생각들로 오늘 대부분의 교회가 목사와 장로, 성도들 간의 갈등으로 내홍을 격고 있다.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다. 어찌해야 이 신앙의 본질을 상실한 종교의 허황과 무용성, 및 해악 성을 깨닫게 해 줄 수가 있을까? 너나없이 주님의 엄위 앞에서 주님을 믿는다는 그 믿음의 저울에 자신을 올려놓고, 냉철히 각자 본질적인 질문을 스스로 물어야한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 그 삶 자체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 그리고 진리를 세상에 보여주는 ‘그리스도의 편지, 친서, 그리스도의 향기,’라 하신다. 지금 세상이 우리를 보고 그리 생각들을 하는가? 이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목사든 장로든 본질에 있어 자신의 거듭남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분쟁 중에“감게”에 등장하여 말하는 이들 대부분이 義를 빙자하여 추태(醜態)들 이지만 실상은 상대를 대중 앞에 끌어내어 “망신”주려는 꼼수일 뿐이다. 본인들은 망신당해야만 회개하는가? 피차 사단의 덫에 점점 더 옥쪼임과, 늪에 빠져 함께 소멸할 뿐이다. 진정, 교회를 사랑한다면 주님 앞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엎드려 기도해야한다. 이것이 사명자다운 본인과 자녀를비롯한 공동체 모두가 사는 길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기도는 자기 기분에 따라 자기편리한대로 하고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하고 하라 하시는 말씀이 없으면 기다려야 한다.(겔4장)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기도 한다는 이들에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엄위 앞에 엎드리는 겸손의 모습들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주님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려하는 주제파악 못하는 오만방자(傲慢放恣)한 모습들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더러운 야욕의 악취를 풍기며,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마저 실족시키는 걸림돌들이 되고 있을 뿐이다. 이 罪들 어찌 감당들을 할 것인가?
진정 본인들이 내세의 소망 분명한 거듭난 이들로서 십자가를 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찬송가 289장의 가사 대로, “주 예수 내만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망령된 행실을 끊고, 의심의 구름이 사라져 천성에 올라가 주님을 뵐 그 기쁨과 소망때문에 사는 이들이다. 이것이 아니면 단언하건대 교회의역사가 얼마이든지, 목사가 무슨 대단한 학위를 받았든지, 대를 이은 평생을 섬겨왔다하여도 신앙의 연조와 관계없이(히5:11-14), 그 신앙공동체는 지금 교할한 사단에게 포로된 신세로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다.
- 한동안 회자된 말 중에 “적(敵)과 싸우는 데는 등신, 자기들끼리 싸우는 데는 귀신(鬼神)”들 이라 하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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