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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7-03-06 14:08
조회
1681
시편 57:1-5, 마가복음 5:1-8.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헤치고 건너편 거라사에 이르렀을 때에 거라사에는 무덤과 산에서 거하며 고함을 지르며 행패를 부리는 광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묶어 놓았어도, 쇠사슬을 풀고 쇠고랑을 깨뜨리고 자기의 몸을 돌로 상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무서워 접근도 하지 못하였고 두려워서 떠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곳으로 제자들과 함께 건너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에 이르렀을 때, 거라사의 광인이 달려 나아와 예수님께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그 광인의 요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 무관심 해 주시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 마귀의 요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려 오셨습니다.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고 자유를 빼앗긴 자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을 깨닫지 못한 자의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는 악마의 소리입니다.
마귀의 소리입니다.
저주받을 자의 소리입니다.
사탄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더욱 악랄한 소리를 마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는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한 영혼이라도 더 자기와 같이 음부로 데려가기 위하여 발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서 9절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을 달라고 아우성칠 때, 므리바 반석을 한 번만 치지 않고 두 번 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못한 죄로 가나안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눈앞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며 죽을 때, 사탄 마귀는 과거에 모세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석을 두 번 쳤다는 이유로 음부로 데려가기 위해, 천사장 미가엘과 싸웠다고 합니다.

욥기에서는 사탄 마귀는 하나님 앞에서 허락을 받아 의인을 시험하고 패망과 재난과 고통과 심한 괴로움을 주고 끝내는 생명까지도 해치는 자, 임을 가르쳐 줍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게 유혹했습니다.
사탄은 요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다시스로 도망하게 했습니다.
사탄은 헤롯에게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게 했습니다.
사탄은 가롯 인 유다에게 예수님을 배반하여 은 30에 팔게 하였습니다.
사탄은 종교의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했습니다.
사탄은 거라사에서 자신의 악랄한 행위가 방해받지 않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거역하게 했습니다.
사탄은 거라사의 광인들을 거처로 하여 그들을 멸망당하게 하려했습니다.
사탄은 거라사의 광인들을 집으로 삼아 멸망의 자녀들을 끌어들이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선과 반대로 악을 행합니다.
사탄은 덕과 반대로 부덕 자가되게 하였고, 의와 반대로 불의하게 합니다.
사탄은 사랑과 반대로 미움을 가져다줍니다.
충성과 반대로 배반자가 되게 하고, 감사와 반대로 불평하게 하고, 평안과 반대로 싸우게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고 배반하게 합니다.

이렇게 사탄은 광인들의 정신 속에서 예수님을 반대하고 멀리하게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들을 뿌리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병든 곳에 치유를, 가난한 자에게 부요함을, 구속받은 자에게 자유를, 불의가 가득한 곳에 의를, 부패가 만연한 곳에 양심을, 불러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을 패망시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죄악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곳에서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힘들고 외로워도 사탄 마귀와 단호히 배격하고 싸워야 합니다.
사탄은 그것을 알고 싫어하여 그리스도를 향한 반대의 탄원을 하게 합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사탄은 종교의 지도자들을 충동시켜서 양심이 거리낌에도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 귀를 막고 고함을 치며 성밖으로 끌고 가 돌을 던졌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원수들을 위하여 도고의 기도를 하였고,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며 죽어갔습니다.
베드로는 사탄의 악랄한 방법으로 유혹하는데도 오히려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기까지 충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으로 이렇게 진리를 지키며 항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는 살인자 가인의 소리입니다.
가인은 시기와 질투로 아우 아벨을 쳐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제물은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심으로 시기가 불같이 일어나서 피를 나눈 아우 아벨을 쳐 죽인 인류최초의 살인자입니다.
그는 피를 나눈 아우 아벨을 죽이는 살인을 행하였을 뿐 아니라, 시체 유기까지 하는 죄를 더했습니다.
그는 살인 후 시체를 유기하면 아무도 모를 줄 알았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에 잇느냐?”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양심을 향하여 물으셨습니다.
스스로 고백하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살인자 가인은 한마디의 말로 더 죄를 첨가하였습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시치미를 뗀 것입니다.
자신의 혈육인 아우를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고서도 자기와는 상관이 없다는 식의 무책임한 항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양심은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가인은 양심의 가책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부인하며 남의 일처럼 넘기려고 하였습니다.

비참하게 죽어간 자식의 소식을 들은 부모의 가슴은 비통합니다.
건강하고 패기만만하던 자식이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는 심장을 도려내는 듯이 평생을 잊을 수 없게 합니다.
살인자는 어떤 원한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죽은 원혼은 하나님이 아시고 슬픈 죽음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네 원수는 나 하나님께 맡기라 내가 갚으리라”
하나님은 피의 탄원소리를 들으십니다.
“가인아 네가 죽인 네 동생 아벨의 피가 내게 호소하느니라.”
사람은 땅에서 부르짖는 핏 소리를 듣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뱀 속에 들어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도록 범죄 하게 유혹했던 사탄은 가인의 속에 들어가 동생 아벨을 시기하게 하고 살인을 저지르게 하더니, 이제는 하나님께 거짓말까지 하게 하는 죄를 더하게 했습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그렇게 말을 하게 한 사탄은 거라사의 무덤 속에 거하는 광인들을 통하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예수님께 항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군이었던 다윗이라도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았을 때, 죽은 우리야의 피의 탄원 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피의 호소를 들으셨습니다.
모든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백성들입니다.
피의 호소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은, 억울하게 죽은 우리야의 탄원을 다윗에게 갚아 주셨습니다.
다윗은 아들들의 싸움에 휘말려 슬퍼했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쫓겨 맨발로 감람산을 넘어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원수 갚는 것보다 하나님은 더욱 잔혹하게 갚아 주셨습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가 아니었습니다.
더 잔혹하고도 속 시원하게 갚아 주셨습니다.
애급의 바로 왕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리며 고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탄원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구출해 내게 하셨습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모세를 바로의 궁전에서 자라도록 섭리하셨고, 시내 광야에서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는 모세를, 가시떨기 불꽃 가운데서 부르셨으며, 바로에게 보내어 말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 제사 드릴 수 있도록 광야로 사흘 길을 나아가게 허락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데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바로의 이 말에서 “하나님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항변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바로의 속에 들어가 하나님을 거역하게 하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거역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때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재앙을 당하게 하였습니다.
끝내는 장자까지 죽임을 당하는 재앙을 받았습니다.
결국은 자신과 추종자들까지 홍해바다의 물 속에 수장되는 죽임을 당하고 애급은 망하게 되고 맙니다.
사탄에게 속아 범죄하고 살인을 저질렀던 다윗도, 무서운 징계를 받았거든 하물며, 주님을 거역하고 범죄 하는 자에게 무서운 징계와 형벌이 내리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살인자 가인에게 억울하게 죽은 자의 핏 소리의 탄원을, 하나님이 갚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는 인색한 부자의 소리입니다.
부자는 자기 위주로 사는 어리석음을 죽을 때까지도 계속 했습니다.
자색 옷을 입고 주지육림에 쾌락을 일삼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의 호의호식에 도취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취하고 향락을 또 찾았습니다.
눈앞에 헐벗고 병들어 고통 하는 불행한 사람의 처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옛날 로마의 귀족들은 먹고 마시고 배부르면 토해내고, 또 마시고 먹고 또 토해내었습니다.
그들은 먹는 것이 일과였고, 마시는 것이 생활이었으며, 취하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로마는 그렇게 귀족 계급들의 타락으로 끝내 멸망을 당했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취한 채 살아갔으나, 노예들에게는 잔혹하였습니다.
노예들에게 가혹한 귀족들의 생활이 영원히 지속 될 수는 없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인색함과 무관심으로 자기 향락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대문간에 누워있는 거지 나사로의 아픈 상처를 개들이 핥으며 귀찮게 해도,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개들과 함께 주워 먹으며 목숨을 겨우 부지하였는데도, 부자는 동정의 눈 한 번 돌리지 않았습니다.
나사로야 먹던 말든, 자기 혼자 먹는 데만 치중했습니다.
나사로야 병이 들었던 말았던, 자기만 향락을 누리면 되었습니다.
거지 나사로야 고통을 당하던 말든 자기만 편하면 된다는 식의 삶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고, 그의 눈에는 죽어 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재산 축적, 부정 축재에 관심을 가졌을 뿐입니다.
창고를 헐어 더 크게 짓고 재산을 쌓아두고 먹고 마시고 즐기려는 데 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주님은 그런 부자를 향하여 “어리석은 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 네 영혼을 취하면 네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서도 책망하셨습니다.
일만 만들어 남에게 지우고 네 손은 조금도 움직이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한 자들에게 무관심한 그들을 “화 있을 진저”라고 저주 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하셨습니다.
“심판의 도끼가 그 뿌리에 놓였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성도는 거칠고 험악한 시대에 진리와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예배소 전체가 소동하여 결박하고 때리고 쇠사슬로 묶고 착고에 채웠어도 진리를 지켰습니다.
빌립보 사람들 전체가 소란을 피우며 무죄한 그들을 때리고 깊은 감옥에 가두었어도 생명을 걸고 양심을 지켰습니다.
외롭고 고독한 가운데서도 선으로 악을 대적하여 싸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고 저주하고 조롱하며 비웃는 원수들을 위해 도고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함이나이다.”
십자가위에서 여섯 시간을 고통당하며 신음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번복하지 않았습니다.

포은 정 몽주는 세상이 온통 변하고 달라져서 사람들이 옛 임금을 버리고 태조 이 성계에게 모두 마음을 돌렸으나, 오직 포은 정 몽주만은 한 번 충성한 임금 공양 왕에게 향한 충성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끝내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철퇴를 맞아 피 흘려 죽기까지도, 자기의 충성심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세상 전체가 변질되어도 성도의 신앙양심은 찬연히 빛나야 합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어둠을 물리치듯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는 언제나 외로워도 빛을 향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무관심한 자가 돼서는 안 됩니다.
기회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육체의 죽음이 두려워 믿음을 잃어서도 안 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사악한 세상을 향해 탄식하시며 일꾼을 찾으시는 하나님께, 이사야는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고 나섰습니다.
결코 “주여! 그 일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원한의 니느웨 성에 복음 전하라는 명령에 진노와 심판을 기대하며 다시스로 도망을 간 요나와 같지 않았습니다.
거라사의 광인 속에 들어가 갖은 만행을 저지르던 사탄은 주님께서 오시자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찾아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한 사탄의 정체를 알고 우리는 단호히 물리쳐야 합니다.
간악하고 무자비한 사탄은 쫓아내어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2천 마리의 돼지 떼들이 몰살해 죽는 다해도 그 귀신의 무리를 추방하지 않으면 다시 악을 저지를 것입니다.
거라사의 광인을 괴롭히던 사탄은 다시 성도들을 괴롭히려고 갖은 교활한 수단을 다 부립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는 말은 영생을 포기한 자의 소리입니다.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배도 자들에게 체포되신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총독 빌라도 에게 재판을 받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도 흠도 없으시다 는 사실을 알고 예수님을 놓아주려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는 예수냐?”
그러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원하고 예수님을 멸하게 하자 하였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다시 묻습니다.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충동받은 군중들은 “바라바로 소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총독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자 저희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생떼를 쓰는 것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총독 빌라도의 책임을 회피하는 이 말에서 “죄도 흠도 없으신 예수님을 너희가 십자가에 처형하던지 말든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는 항변을 듣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죄도 흠도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이 시기로 넘겨진 줄을 알았습니다.
군중들에게 네 번이나 놓아주자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는 사람을 보내어 꿈 이야기와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 찬성하는 편으로 손을 씻었던 것입니다.
그의 아내가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라고 한 말은 십자가에 못을 박는 일에 동참하는 재판을 하지 말라는 말이었는데 그는 아내의 그 말의 반대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방법으로 총독자리를 지키려했으나 그의 말은 영생을 포기하고 영원히 멸망을 받을 저주의 형벌을 자초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잠깐 살다 떠나갈 세상을 위해 영원히 살게 될 그 삶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그의 말에서 우리는 “나의 유대인의 총독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한일인데 나에게 장차 있게 되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삶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하는 것과 같이 들립니다.

여러분!
생명을 향한 주의 말씀을 기억하는 삶이 되십시다.
총독 빌라도의 이러한 행동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가운데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고 영원히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란 말은 양심이 무딘 지도자들의 말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초대 교회의 7집사 가운데 스데반 집사는 성령의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합니다.
대제사장은 이 사실을 확인하려고 스데반 집사를 불러 “이것이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스데반 집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역사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게도 사모하고 기다렸던 메시야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셨는데 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처형하여 죄를 범하였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그 죄를 회개하라고 그들의 죄를 지적하며 양심을 찌르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자 저희들은 이 말을 듣고 오히려 이를 갈며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아가 돌로 쳐 죽여버립니다.
자신들이 알지 못하고 저지른 죄였다 할지라도 지적하여 깨우쳐 주고 회개하도록 권하는 설교자를 그들은 귀를 막고 듣기를 거부했으며 양심에 찔림을 받으면서도 돌로 쳐서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들의 무디어진 양심은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우주와 인류와 만물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고서도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서도 자신들의 잘못을 알지 못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메시야를 죽이고서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대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증거 해야 할 대제사장입니다.
민족과 백성들의 양심이 되어야 하고 모든 언행에 모범이 되어야 하는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의 양심이 무디어지고 마비되어지면 그 시대의 민족성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무딘 양심으로 지도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들이 귀를 막고 이를 갈며 스데반을 성밖으로 끌고 가 돌로 쳐 죽인 것은 “메시야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심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도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철면피한 변명의 말이 들립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망치질을 한 자들은 우리가 아닌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항변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죄인들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셨으며 우리와 나와 깊은 상관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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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3-06 14:14

    필자의 설교집을 구입하신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목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설교집 5권과 CD 2장을 2만원에 드린것입니다. 입금 하셨으니 지방과 교회 이름만 알려 주시면 됩니다. 앞으로도 좋은 인연으로 만나기를 바랍니다. 다른 목사님께도 소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 승리하세요 감사합니다,


  • 2017-03-06 14:31

    저의 전화번호는 010-8208-0675번 입니다. 입금하시는 은행은 우리 은행 1002-237-342782입니다.
    착오 없으시기바랍니다. 무슨 일이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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