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새벽 기도에 대하여 궁굼합니다.

작성자
지나가다
작성일
2007-04-01 15:06
조회
2074
물어 볼데다가 물으셔야지요 이곳은 물어 보나마나 입니다.
모 카페이 이런 글이 있네요. 참고가 되시라고 펐습니다.
=========================================

새벽기도에 대한 답글을 올리면서 제가 겪었던 새벽기도의 생활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새벽기도와 함께 자랐습니다. 새벽기도에 참석하기 위해서 교회 예배당의 장의자에서 잤으며, 새벽 3시 반정도 즈음이 되면 그 이른 때부터 새벽기도에 참석하기 위해서 오는 권사님, 집사님, 성도님들의 발걸음과 문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깼습니다. 그리고 새벽 4시 반이 되면 어김없이 온 동네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새벽기도에 참석한 나는 여느 때의 예배에서와 같이 담임교역자(나는 조사(助師)와 목사를 네 분 거쳤다)의 설교를 나만의 비법으로 속기를 쓰듯이 빠짐없이 기록하였으며, 이를 가지고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새벽기도는 하루의 문을 여는 시작이었습니다. 새벽기도에 참석하여서 담임교역자의 설교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지녀온 나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다녀오면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교회 예배당에 들러서 기도를 하고 난 후 다음의 일을 보았습니다. 이런 나의 기도하는 신앙 생활의 습관은 교회의 지도가 물론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새벽기도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반사(주일학교 교사)들에게는 교회에 들러서 하루에 30분 이상 기도하도록 교육하였으며, 이를 확인하는 노트가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에 참석하여서 기도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으며, 만일에 말입니다. 새벽에 기도하지 않고서 하루를 지낸다면, 그 날은 그것이 온종일 마음에 걸렸습니다.

신학을 한 후 목회를 할 때도 새벽기도회를 갖고서 새벽기도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새벽기도는 그 날 하루를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여겼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루를 은혜 중에 지내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의 오랜 습관의 새벽기도 생활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구원론적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론적으로 깨달아 비로소 알게 되면서부터 였습니다. 그런 나에게서의 기도란 것이 어떤 것인지는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내가 어렸을 때부터 겪어왔던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서 새벽기도를 갖는 것으로부터 신앙 생활을 시작해 나가고자 했던 모습은 나만이 가진 신앙 생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면 보게되는 우리네 교회의 일반적인 성향이었습니다. 그만큼 누구도 새벽기도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는 우리네 교회의 모습입니다.

새벽기도!.

우리네 한국 교회 신자들은 왜 이 새벽기도에 일생을 두고 목숨을 거는 듯이 하는 열심에 있을까요? 새벽기도의 참석을 독려하고 열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서는 어느 때부터인가 새벽기도의 방법도 다양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기도를 모범으로 한 40일 새벽기도가 생기더니, 100일 새벽기도와 급기야는 잘못 이해한 일 천 번제를 본 딴 1000일 새벽기도도 생겼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부활 전의 고난주간을 기린다며 특별기도회도 갖습니다. 그 외에도 수능시험 때이면 어김없이 대학입시 고득점과 합격을 위한 특별기도회도 있으며,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신년특별기도회, 부흥집회를 한다며 특별기도회 등 등, 온갖 이런 저런 명목을 만들어내 여기에 맞춘 각종 새벽기도회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새벽기도를 하게 할까요?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만일에 말입니다. 새벽기도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또는 믿음이 약한 사람으로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상대적으로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사람은 참으로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새벽기도는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을 가장 값지게 보내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닮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와 응답을 받는 때로 가르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모범적인 기도를 따르는 것인 데다가 새벽은 기도가 열리는 시간으로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때가 이때이며,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시간으로서 새벽에 기도가 응답이 되는 역사가 가장 많은 때로 알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새벽기도를 갖는 것은 당위성을 갖는 듯 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새벽기도에 참석하여서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그 당위성을 저버린 가장 못난 짓을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새벽기도는 한국에 있는 교회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그 교회가 올바른 교회인지를 입증하는 척도처럼 말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그 교회는 새벽기도를 하고 있나?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문제 있는 잘못된 교회야!.\" 라고 말하는 것을 너무나도 쉽게 말합니다. 이렇게 새벽기도는 이것으로 교회이냐, 교회가 아니냐를 말하는 것이 될 정도로 우리네 교회에서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기도회의 한 유형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회를 갖는 것은 다양할 수 있으며, 그래서 기도회의 종류를 다양한 형태로 가져나갈 수 있는데, 새벽기도는 기도회의 다양한 형태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 믿는 신자가 기도회를 갖는 것은 그 중요성과 필요성을 말하면서 당위성을 말하며 요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자원함과 자발적으로 가져 나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하나님의 본의를 좇는 자에게서 나오는 갈망이 기도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기도할 수 있으며, 또한 저녁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서 기도는 어느 때이든지 간에 무시로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일정하게 가져나가기 위해서 하루에 어떤 때를 특정하게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하고서 기도회를 가져나갈 수도 있습니다. 언제 기도를 하든지 간에, 그리고 그 기도를 어떤 유형으로 가져나가든지 간에 신자가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 대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으로 갖게 되는 것이며, 또한 이 땅에 품으신 하나님의 계획을 품어 소원함으로 갖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러한 기도가 신자에게서 새벽기도의 형태로 종교적 계율이 되다시피 한 것은 첫째, 한국적인 토속의 기도 습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한국 교회의 초기 신앙의 모습은 목사의 설교와 함께 그들이 보인 모습을 그대로 따르고자 했습니다. 여기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는데 길선주 목사입니다. 그는 본래 승려로 선도(仙道)를 수행하여 도인(道人) 칭호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에는 토속신앙인 선도 수행의 과정에서 신비체험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개종하였습니다만, 그 후에도 예전에 새벽예불을 해오던 습관에 의해서 선도식 수행 방식으로 경건의 수행을 계속하였습니다. 이런 그의 수행이 가장 뚜렷하게 영향을 끼친 것이 기도 생활입니다. 그래서 길선주 목사는 선도 수행 때부터 행하던 대로 하루 세 차례 시간을 정해 놓고 선도식의 기도를 했는데, 여기에 따라서 새벽기도를 하고 선도식 체조를 했습니다. 이 선도식 체조는 선도 수행에서 꼭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하는 관습은 역시 토속신앙에 따른 민중의 새벽기도에서도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도의 모습인데, 여염집 아낙네들은 가정을 위해서나 기타 소원을 빌며 구해야 할 일이 있을 때 새벽에 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새벽에 기도를 하는 관습을 가져온 것은 아직 날이 밝기 이전의 이른 시간에는 소위 신령한 존재와 영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여인네들은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비는 종교행위를 해왔습니다.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의 습관은 이런 한국의 토속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인 동시에 또한 선도가 갖는 명상과 함께 체력 단련에 가장 좋은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길선주 목사는 한국 교회에 새벽기도 외에도 통성기도의 한국 교회에 전통으로 남겨준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에서의 기도는 항상 통성기도란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독특한 한국적 새벽기도의 형태는 곧 전국 교회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를 말해주는 기록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선교사 캐롤(A. Carroll)의 증언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는 1905년 초에 열린 개성지방 ‘부인(夫人) 사경회’에 대해 기록하기를,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날에는 새로 몇 사람이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이덕주, 초기 한국 기독교사 연구).

그러나 기도에서 통성기도 하는 모습은 선교사들에게는 부정적으로 비쳤습니다. 왜냐하면, 이 통성기도는 기도자가 큰 소리를 내면서 하는 기도로 자기가 하는 기도를 곁에 있는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하기 때문에 통성기도로 기도하지 않는 다른 기도자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초기 선교사였던 스캇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통성기도를 ꡐ소리의 바벨탑ꡑ(a babel of sound)이라고 혹평할 정도로 그런 기도형식 자체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덕주는 ‘초기 부흥운동에 나타난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에서 통성기도가 불교나 유교, 민간신앙에서 집단적으로 소리내어 경이나 주문을 외우는 독경(讀經) 혹은 독송(讀誦)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구 한말의 독특한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 자생적으로 창출된 토착적 신앙 양태라고 보았습니다(이광호, 기도에 대한 성경신학적 고찰).

그러나 말입니다. 새벽기도가 어떤 사람에 의해서, 또는 어떤 배경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든지 간에 그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새벽기도의 모습은 토속의 무속신앙에서나, 이를 기독교적인 새벽기도로 이끌어낸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에서만 새벽기도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기도의 습관은 고대 교회사에서 은수자(隱修者; 은둔하며 수도 생활하는 사람)와 수도원의 등장에 의한 수도사의 기도 생활을 통해서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은수자에게서 그의 수도 생활의 주된 것은 기도였습니다. 이들이 수도원으로 들어온 수도사의 생활에서도 새벽에 정해진 시간에 기도 드리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베네딕트 수도원을 세운 수도사 베네딕트(A.D. 480-547)에 의해서 만들어진 수도원 규칙에는 수도자들이 여름에는 한 시 반, 겨울에는 두 시 반의 이른 새벽에 기도하는 것(이것을 철야를 뜻하는 vigil 이라고 말한다) 외에도 하루 7회에 걸쳐 최소한 4시간을 기도하는 시간으로 정해 놓고 기도하게 했습니다. 이런 기도 생활은 이후 로마카톨릭교회의 사제들의 규칙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사제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기도해야 했으며,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종을 칠 때 기도하는 3종기도(三鐘祈禱)의 전통도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기도 생활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서가 아니라 수도에 의한 자기 열심을 좇는 종교적 열심으로 행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새벽기도 하는 모습은 단지 한국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새벽에 집회를 갖고 새벽기도를 하는 모습이 한국만의 독특한 모습을 띠는 것은 토속적인 무속신앙과 혼합한 기도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새벽기도만이 아니라, 교회에 따라서는 저녁기도에도 참여하도록 독려하기도 하며, 새벽기도와 함께 매주 금요일에는 철야기도에도 참여하게 하여 밤을 지새워 날을 맞을 때까지 기도하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수도원에서 보는 것과 같은 수도 생활의 중요한 일과가 되는 기도 생활에 많은 시간을 가져나가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가 오늘날처럼 새벽기도에 힘을 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모습에서 가져나간 것이 아닙니다. 다음의 몇 가지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한국 교회는 신자들이 철저하게 자기 기복신앙에서 새벽기도를 가져나가게 했습니다. 둘째, 한국 교회는 새벽기도의 참석으로 신자들의 열심 있는 믿음을 이끌어가고자 했습니다. 셋째, 한국 교회는 새벽기도를 교회 부흥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성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새벽기도로 인해서 새벽기도의 유무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는 새벽기도회를 잘못 만들어 가는 것이 문제이지 새벽기도 그 자체가 문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벽기도를 가져나가는 교회는 그것의 근거를 성경에서 끌어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새벽기도를 강하게 주장하는 분들이 새벽기도를 갖지 않는 교회를 교회가 아닌 듯이 여기며 마치 이상한 신자들인 것처럼 여기는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새벽기도의 기원이 성경에 있는 것으로 알고서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그들이 제시한 성경 구절은 새벽기도를 말해주는 것으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새벽기도를 말해주는 성경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성경구절을 가지고서도 그것으로 새벽기도의 근거로 삼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대표적인 구절을 보겠습니다. 먼저 구약입니다.

시5:1-3.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이 기도는 다윗 왕의 노래입니다. 시편 5편은 다윗 왕이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모시어 섬기면서 그분께 간구하는 모습을 노래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1-3절은 그러한 내용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여기서 다윗 왕이 아침에 주께 기도하며, 이런 그의 기도를 주께서 들으실 것이라는 표현을 한 것은 아침 기도가 그의 하루의 첫 일과를 시작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제사장이 동이 트자 마자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아침 제사와도 비교되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기도에 기초가 되는 것은 주이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서 나오는 거룩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늘 악한 죄를 일삼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인하여 늘 기뻐하고 주를 의지할 수가 있다는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5편은 새벽기도의 필요성이나 그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사랑을 입고 있는 것에 대한 찬양의 표현인 것입니다. 주를 향한 사랑이 주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온전히 의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아는 이런 시적인 의미의 분위기를 간파했다고 하면, 새벽기도를 독려하는 것으로 자주 인용하여 말하는 시편108편 1-2절의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정으로 찬송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나, 시편 119편 147절인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에서 언급하고 있는 ‘새벽을 깨우리로다’,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가 새벽기도를 말하며 이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절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08편은 다윗 왕이 노래한 시로 주이신 하나님은 자기편으로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주를 의지하는 그 마음의 든든함을 노래하고자 하는 기쁜 마음의 벅참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심정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며, 119편은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데 주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이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말하면서 밤새도록 깨어 있으며 해도 뜨기 전에 주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에서 주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에서는 새벽이라는 단어가 나오며 기도의 표현이 있습니다만 사실 이 기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기도가 아니라 찬양이며 시입니다.

새벽기도의 당위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신약의 마가복음 1장 35절을 비롯하여서 몇 몇 성경구절을 들어서 예수님이 새벽기도의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기도의 모범을 따라서 새벽기도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글에서 새벽기도의 필요성을 언급한 부분을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새벽기도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주님을 본받기 위함입니다. 본문 마가복음 1장 35절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처럼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을 가장 값지게 보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닮아 새벽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와 응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

그러나 그 구절은 예수께서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을 가장 값지게 보내는 것으로 기도를 하셨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예수님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해 나가셨는데 그 특징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리면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이 기쁜 소식을 믿으라는 전파와 여기에 따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들린 사람과 병자들을 고치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가버나움에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하시고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고 회당에서 나와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그 집에 모여든 온갖 병으로 고통을 겪으며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이 모두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사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날 아직 날이 채 밝기도 전인 이른 새벽에 그곳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나가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이른 새벽에, 그리고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은 몸을 쉬시면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과 교통(交通)하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기도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언제라도 순종으로 섬겨나가고자 하는 자태를 가져 나가셨습니다.

그리고서 날이 밝아왔을 때 자신을 찾아 나온 시몬과 그 일행에게 자신이 온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러 온 것임을 말씀하시며 갈릴릴 온 지방을 두루 다니며 여러 회당에서 설교하고 이적을 행하는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른 새벽에 기도하셨는데, 이것은 새벽기도의 전형(典型)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중요한 전환점이 일이 있게 되는 사역을 수행하기에 앞서서는 기도하는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마가복음 1장 35절의 경우에서는 이른 새벽에 하는 것이었습니다만, 6장 46절에서는 날이 저문 저녁때에 기도하려고 산으로 올라가셨으며,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서 붙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는 고난을 받으실 때가 이르렀으므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가진 날에도 기도하러 겟세마네라고 하는 동산에 오르셨는데, 그때는 밤이었으며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한 번은 새벽 때의 시간이시고, 또 한 번은 날이 저문 저녁 때의 시간이고, 다른 한 번은 밤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으니, 도대체 어느 때를 기도의 전형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까? 만일에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른 새벽에 기도한 것을 가지고서 모목사가 설교한 것처럼 그리고 대부분의 목사가 그렇게 설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새벽기도가 필요하며 이를 주님을 본받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날이 저문 저녁 때에 기도한 때도 동일하게 적용하여서 날마다 새벽기도를 하고자 하는 것처럼 날마다 저녁 기도를 해야 할 것이며, 또한 날마다 밤을 지새우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누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억지이며, 예수님이 기도의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각각 기도하신 것을 가지고 이를 말씀해주신 성경 구절을 그렇게 획일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새벽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그러면서도 이들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이른 새벽에 기도한 것을 가지고 기도의 모범과 근거로 삼고서 자기들이 새벽기도를 주장하는 것도 참으로 억지라고 하는 것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시는 사역을 수행하시는 중에 기도를 하고자 하실 때는 이른 새벽이든 저녁 때이든 또는 깊은 밤이든 그때의 여건 속에서 하신 것이지, 이후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기도한 것으로 모범을 삼고서 그 때의 기도 방식을 좇아서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새벽기도를 하는 교회나 새벽기도를 하는 사람은 그러한 기도 시간을 갖는 것을 주님과의 관계성에서 가져나갈 수 있습니다만, 그 근거를 성경을 근거로 해서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키고자 하여서는 안 됩니다. 새벽기도이든 저녁기도이든 철야기도이든 아니면 낮에 하는 기도이든 간에 말이죠. 기도는 성경이 그렇게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자들 자신들이 기도의 필요성을 가지고서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고대 교회사 시대때부터 등장하는 수도원에서는 하루에 8번까지 기도를 정기적으로 가져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유대인들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오전 9시와 오후 3시 두 차례에 걸쳐서 성전에서 예배와 함께 기도시간을 가졌으며, 이는 예루살렘교회를 이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할 마음을 품으며 기도 생활을 정기적으로 가져나가고자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우리 육은 할 수만 있으면 안 하는 쪽으로 가져나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과는 다른 길로 가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영에 관한 일인데, 우리는 육의 욕망을 좇아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만이 아니죠. 찬송도, 하나님 말씀의 묵상과 상고도, 또한 이 모든 것이 있는 예배도, 성도의 사랑을 말하며 그렇게 원하는 교제도, 봉사도..... 우리는 이 모든 것에서 자기 육의 욕망을 좇아 사는데 걸림돌로 여깁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것에 어떤 정해진 규칙이 없다면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 육입니다. 가령 새벽기도회를 만들어 놓고 그 시간을 정해 놓고 이를 지키도록 정해 놓으니까 하는 것이지, 이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고 하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 우리 육입니다. 그런데 사실 새벽기도를 만들어 놓아도 기회만 주어지면 기도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 육입니다. 게다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서 새벽기도를 하는 열심을 갖는다고 하면 그 열심을 인정받고자 하며, 그에 합당한 상급(보상, 보응)을 요구하는 우리 육입니다. 만일에 누구도 인정을 해주지 않으며, 그에 대한 어떤 상급도 있지 않으면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결코 그 손해나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 육입니다. 이런 우리 육의 성질을 교회는 가장 적절하게 잘 이용합니다. “기도는 만능이다”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다”(막9:23)라고 말하고,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 라고 말하면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7:7-8) 라고 꼬드깁니다.

그러한 우리 육이기에, 이 육을 거스려서 우리가 기도할 마음을 품고 이를 정기적으로 바르게 가져나가고자 한다면 이는 권장해야만 할 일일 것입니다.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살전5:18).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기도의 모임을 가져나가는 것 또한 그 필요에 의해서 얼마든지 가져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경계를 하는 것은 기도를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님이 지적하며 의식하고 있듯이 “새벽기도에 대한 그릇된 인식으로 인하여 많은 폐단과 부작용을 낳고 있으며 결국은 기도의 본질을 흐려놓고 말았다.”는 데 있습니다. 굳이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설명을 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새벽기도가 신앙의 척도처럼 여겨지고 있는 가운데 매일 새벽기도 하지 못하는 많은 성도들은 죄의식을 느끼거나 자유를 잃고 예수님을 포기하는 듯한 믿음에 빠져 있음을 봅니다.”라는 정도라면 새벽기도가 얼마나 오용(誤用)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도에게 믿음이 있는지, 아니면 믿음이 없는 것인지는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신앙의 척도로 등장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말이죠. 우리 자신에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볼 수가 없는데 주님께서 그를 붙들고 계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또한 믿음에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단지 새벽기도회의 참석 여부로 신앙의 유무를 말하며 신앙의 좋거나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님은 새벽기도가 신앙의 척도처럼 여겨지고 있는 가운데서 매일 새벽기도 하지 못하는 많은 성도들이 있음을 전제하면서 이들이 죄의식을 느끼거나 자유를 잃고 예수님을 포기하는 듯한 믿음에 빠져 있는 것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며, 따라서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날을 지키는 문제로 남을 비난하지 못합니다(골2:16).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앞으로 올 일에 대한 상징에 불과하며, 다만 그 본체이신 그리스도의 그림자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골2:17), 그 어떤 것으로도 짐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참조, 행15:1-29). 그러니까 새벽기도를 신앙의 척도인양 말하며 성도들에게 짐 지우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가 새벽기도를 만들어서 성도들에게 참여하여 기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그 환경을 조성해 줄 수는 있습니다만, 그 새벽기도에 참여하여 기도하는 것은 성도 각 개인의 필요와 형편에 의해서 각자가 자원함과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성도 각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참여할 수도 있고, 또한 참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새벽기도를 가지고 죄의식을 느끼거나 자유를 잃는다거나 예수님을 포기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는 것은 새벽기도를 가지고서 교회가 율법의 종교를 만들어 신자들에게 죄의식에 이르게 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며, 신자들 또한 자기 열심의 종교로서 새벽기도를 가져나가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죄의식을 느끼거나 자유를 잃는다거나 예수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새벽기도는 참여하는 자가 기도의 필요를 가지고서 참여하는 것이므로, 새벽기도를 신앙의 척도로서 가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성에서 그분의 뜻을 이해하고 받들어 섬겨가려는 자기 부인을 해나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것을 육에 속한 현세적 복을 구하는 기복신앙으로 잘못 가져나가서도 안 되겠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가져나간다고 하면 말이죠. 이는 그가 믿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을 가지고서 실상은 토속적인 무속신앙을 해나가는 것이요, 그래서 우상을 신앙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새벽기도에 참석하여서 기도하고자 하는 자는 그 기도에서 그러한 육의 사람이 죽고 오직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영의 사람으로 산 자가 되는 자기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이상으로 새벽기도에 관한 답글을 마칩니다.

새벽기도는 한국 교회가 참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부분이기에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욱 강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벽기도가 갖는 기도의 본질 여부를 떠나서 단지 새벽기도의 시행과 그 참석 여부로 신자들의 믿음을 판단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교회의 사이비나 이단성도 판단하는 지경입니다. 그런 앞에서 어느 누가 새벽기도에 대한 언급을 쉽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삐뚤어져 뒤틀려 있는 교회 앞에서 참된 기도를 말해야 하는 존재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입니다.

부디,
기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 속에서
참된 기도를 하는 믿음에 있으시기를
주께 구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자료 출처 : 개혁주의 신앙공동체
                  이천우 목사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03-29 11:23)
* 관리자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0-04-01 07:00)



전체 2

  • 1970-01-01 00:00

    <지나가다>님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지나가시다가 이런 좋은 글 옳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007-04-03 15:57

    개혁주의신앙공동체 이천우 목사님의 글을 너무 잘 읽었습니다. 정말 귀한 답글을 올려주신 \\'지나가다\\'님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7.06.15 2349
1144 윤새별 2024.03.03 5
1143 유경준 2024.02.23 92
1142 노형근 2024.02.08 3
1141 노형근 2024.02.08 76
1140 노형근 2024.02.07 6
1139 노형근 2024.02.07 6
1138 궁금해요 2024.01.05 3
1137 ㅇㅇ 2023.12.04 5
1136 교회 2023.12.04 11
1135 www 2023.12.04 7
1134 은하수 2023.11.22 3
1133 남궁현 2023.11.12 4
1132 궁금 2023.10.05 4
1131 감리교 2023.10.05 6
1130 성도 2023.09.25 254
관리자 2023.09.25 4
성도 2023.10.05 5
성도 2023.10.08 3
1129 김근영 2023.06.28 6
1128 나눔 2023.05.31 7
1127 우비봉권사 2023.05.28 312
1126 궁금이 2023.05.18 251
1125 궁금이 2023.04.11 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