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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중에 죄 없는 자가 누구냐?

작성자
원학수
작성일
2015-01-31 10:54
조회
1649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요한복음 8:1-11

지난 주, 본문을 통하여 죄지은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서 정 죄 하려고 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고소를 하며 논란을 일으키는 장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악한 심사를 깨우쳐주시고, 죄지은 여인에게 사죄하시고 용서하시는 모습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고자합니다.
오늘은 우리모두 이 여인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죄인에 대한 문제들을 살펴보십시다.

이 사건이 있었던 시기는, 예수님 수난절이 있기 얼마 전에 일어났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밤에는 베다니나 감람산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어떤 날 아침, 감람산에서 돌아와 성전으로 들어가시려는데, 유대인들이 간음 중에 붙들 은 여인을 끌고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문제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심각한 일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죄를 증오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죄에 대한 문제로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심각성은, 모든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고 양심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찌들리다보면, 사람들의 양심은 마비되어버리고 무디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두고, “화인 맞은 양심”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화인 맞은 무딘 양심도, 어떤 계기를 통하여 다시 찌르고 부끄러움을 알게 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서 보게됩니다.
그것은 심은 골수를 찔러 쪼개며, 철면피한 양심을 부끄러운 줄을 알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의 위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죽었던 그들의 양심을 다시 살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심판하려는 무리들과, 죄를 지었기에 아무런 항변도 변명도 하지 못하는 죄인의 모습에서, 죄인 된 우리도, 어떻게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여보고자 합니다.

1. 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죄”라고 하는, 그 한가지만을 놓고 정의를 내린다고 하면, 무엇이라고 간략하게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쉽게 생각합시다.
윤리적으로 보면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고, 도덕적으로 보면 “도덕에 어긋나는 것” 이라고 해야 할 것이고, 법적으로 보면 “법에 어긋나는 것” 이라고 말 할 것이고,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믿지 않는 것” 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신학적으로 생각하는 죄의 개념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어떤 죄를 지었습니까?
본문에서는 간음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간음이란, 남편이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과 불륜관계를 맺은 것을 말합니다.
아내가 남편 외에 다른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어떤 상황에서였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자기 자신조차도 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고 있는 점이 엿보입니다.
이 여인에게 남편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도 없고, 직업에 대해서도 알 수 없으며, 그의 가정 형편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음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간음 할 수밖에 없는 여인으로 보이는 여자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의 죄의 현장이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죄가 노출될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말씀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완전범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숨길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사람에게 숨긴다해도 곧 드러나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는 더욱 숨길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나무 뒤에 숨어있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이 어떠한 죄를 저질렀는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모두 연약한 죄인들이며, 죄의 가능성을 지니고 사는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나 추적을 해보면 숨길 수 없는 죄가 가득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보여진 죄는 어떤 것입니까?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율법적으로 죄를 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직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발사는 사람들의 머리를 먼저보고, 양복점 기능사는 상대방의 옷을 먼저보고, 양화점 기술자는 상대방의 신발을 먼저바라 보는 것처럼, 이들의 습관은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율법과 견주어 보았을 것입니다.
신명기 22:22-29절까지는 범법자를 모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들은 죽일 죄만 찾아다녔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타난 이들의 모습은, 범법자를 죽이느냐? 아니면 자기들의 눈에 거슬리는 예수를 죽이느냐? 하는 결단을 이미 내리고 온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의 눈에는 긍휼이나 자비란 찾아볼 수도 없는, 살벌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신명기적인 처형방법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반드시 처형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자비와 긍휼은 그리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죄에 대한 정죄의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죄에 대한 개념은 그것이 아닙니다.
여인의 간음죄보다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죄를 더욱 악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들은 종교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자들입니다.
백성들에게 율법을 풀어서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더욱 큰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법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법망을 잘 뚫고, 범죄를 기능적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변 환경을 살펴본다 할지라도, 법의 처벌을 받는 사람들은 법에 대하여 무식한 사람들이지, 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오히려 지능적으로 범법을 하고서도 자유스럽게 활보하고 다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여” 하고 저주를 퍼부으셨고(마 23: ),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고 욕을 퍼부으셨습니다.
그들은 지능적으로 율법에 저촉되지 않게, “고르반 되었다”고 하면서, 부모를 섬기지 않았습니다(막 7:11).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마 23:3). 율법에 무식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마 23:6).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의 소경인 여인의 간음죄보다도, 율법의 선생이 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증한 죄를 더욱 크게 보셨던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불장난을 하다가 화재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처벌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이 과실로 불을 내었다면, 그 어른은 처벌을 받습니다.

야만인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처형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명인이 살인을 하였으면 처벌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여인이 간음한 것보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하고있는 죄는, 예수님이 보시기에 더욱 악하고 무서운 죄악이며,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경중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 어떤 죄를 지었느냐? 하는 것이, 주님 앞에서 사유와 정죄의 대상이 된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의 작은 실수에도 심각하게 보고 비난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그 보다 더한 악을 서슴없이 저지르면서도, 성도들은 작은 잘못만 있어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보시기 전에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은, 바로 그 때문이며,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죄를 알면서도 짓는 것은, 모르고 짓는 죄보다 더욱 악한 것입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작은 죄를 지은 것이, 죄인 줄을 모르고 큰 죄를 짓는 것보다 악하게 보신 것입니다.
죄를 악하게 보시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죄를 짓는 것은 고의적인 의도입니다.
그래서 더욱 악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2. 정죄에 대한 문제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스스로도 양심에 가책을 받습니다.
그 죄에 대하여 아픔과 후회를 합니다.
범죄를 처음 저지를 때에는, 누구나 두려움과 가책을 받지만, 그런 일을 자주 행할 때 양심이 무디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당하는 괴로움에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당하는 무서운 질책입니다.
사람의 실수를 우리는 서로 용서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입니다.
다른 이의 잘못이나 범죄에 대하여 너무 깊은 관심을 갖고 살았던 우리들입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약점에 우리는 민감한 반응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약점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 인간의 성품입니다.
자신의 잘못은 관대하게 숨기고, 남의 약점에는 단호하게 규제하고 정죄하며 가혹한 비판을 일삼으며 살아왔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정한 성품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성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열한 인간 감정에 치우친, 정 죄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의 지도자이며, 사회적인 권위도 가지고 있는 신분입니다.
그러한 지도적인 위치나 신분에 맞지 않게, 그들은 아주 날카롭고 매서운 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연약한 여인의 범죄행위에 대하여, 정 죄하는 모습은, 아주 잔인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남녀노소가 모두 돌을 들고, 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남자는 같이 잡아오지도 아니하고, 여자만을 잡아온 것도 석연치 않는 그들의 태도가 엿보이는 점입니다.
거기에는 아마 어떤 인간적인 감정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자기들의 신분과 관계가 있는 남자였거나, 남자는 제외하고 여자만 처형해야 할만한 딱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편협 된 정 죄는 비열함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모세나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증인이 될 때에도 공평해야 하는 것입니다.
뇌물을 받고, 한 쪽에 치우친 증언도, 하나님은 엄하게 다스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난히 여자에게만, 정 죄 하려고 한 것은, 그들이 약한 자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강한 남자의 앞에서는 약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불공평한 법적 행동문제로 일어나는 정 죄의 태도였습니다.
법이란 만인에게 공평해야 그 법이 권위가 있습니다.

어느 특정인들은 그 법이 무색하리 만치 뚫고 지나가 버리고, 약한 자들만 걸려드는 것이라면 공정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권위를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법을 집행하는 것이 공정성이 없어서 율법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공의로우시고 엄위하신 분으로 율법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율법은 가장 공정하고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이들은 악용하여 불공평하게 사용하였기에, 그것으로도 정죄를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율법을 내세워 살인을 하였고, 율법을 내세워 정 죄 하였고, 율법을 내세워 편 견 하였고, 율법을 내세워 자기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율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말하나 자기들이 유익 되지 않는 것은, 그 율법을 지키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모세의 율법을 들어 정 죄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목적은 다른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말함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 이러라”(6절). 그 뜻은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자와 율법을 내세워, 예수님을 고소하고 로마법과 율법에 의하여 처형해 버리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여자를 동정하여 치지 말라고 하였더라면, 모세의 율법을 어겼으니 처형당할 것이고, 그 여자를 치라고 하면 로마법이 아니고는 사람을 죽일 수 없으니 로마법에 위배되어 처형당할 것입니다.

참으로 이들이 이러한 계교를 짜내었다는 것도 대단한 지혜였으나, 주님 앞에서는 어리석은 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여인처럼 드러나지 아니한 숨은 죄악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도 여인의 범한 죄보다도, 더 흉하고, 더 악하고, 더 가증한 죄악들이 많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는 말씀 한 마디에, 뿔뿔이 흩어져 가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가지 다행한 것은 그들에게도 양심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 사실을 들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 당시에는, 양심이 남아서 여자를 치지 못하고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여자에게 돌을 던질 무딘 양심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더 악하고 흉측한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약점을 정 죄하고, 나서는, 무딘 양심은,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자 복 해야 합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들의 양심으로, 자신들의 죄를 찾아내게 하셨습니다.
침묵으로 그들의 질문에 대응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바라시는 의도가 몇 가지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들 스스로를 판단하게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또 스스로 침착하게 사건을 생각할 것을 기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감정이 흥분된 상태에서 공정한 판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편견에서 단면만 보는 과오를 범하지 마십시다.
좀더 이성을 가지고 보는 것이 현명합니다.
사람들은 남의 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만, 예수님은 침묵으로서 그들을 당황하게 하신 것은, 여자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인임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남을 비판하고, 정 죄 하는 사람일수록, 더 큰 죄와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죄와 허물을 가리우고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자! 우리가 남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손가락 하나는 남에게 가지만, 세 개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의 잘못 하나에, 자기의 잘못은 3가지나 더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남을 정 죄 하기에 앞서서, 이해와 용기에 앞장서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3. 죄의 처리문제입니다.
죄의 문제는 처리되고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모든 죄인들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천국의 시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세례는 사죄의 표로 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하여 처리한 것을, 세 사람의 입장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인은 죄의 처분을 위해, 부끄럽고 후회 서러운 모습으로, 주님께 맡기는 태도입니다.
이미 여인은 예수님만이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체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각자가 자기의 죄들이 드러나 모두 도망쳐 버리고 만 것을 봅니다.
그런 예수님께, 모든 죄를 맡기고 용서를 받는 것이, 어느 법원이나, 재판 관원이나, 관청에서보다도 가장 현명함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치려던 사람들이 모두 가버리고 아무도 없을 때까지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하는 듯한 태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주께 맡기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것이 죄를 해결하는 길이요, 사는 길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리고 모두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손에 든 돌들이, 모두 땅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마치 연회석에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던 자들이, 주인의 책망을 받고 아무 대답도 못하고 침묵하듯, 부끄러운 장소에서 속히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모여든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들이었습니다.
죄인을 심판하고, 정 죄 하는 것은, 자기들의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을 심판하실 분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끝 날에, 예수님께서 철 장 권세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비판하고 정 죄 하는 것은, 하늘의 법이 아닙니다.
세상 법입니다.
마귀의 법입니다.
땅의 법입니다.
사울이 왕이었다 할지라도, 사무엘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릴 수 없고(삼상 13:9), 웃시야가 왕이라 할지라도 대제사장 아사랴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대하 26:30).
무뢰한 행동을 저지름으로, 웃시야는 문둥병을 얻고, 성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각자가 자기 분수에 맞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다만 자기의 위치를 알고 분수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심판하시기에 앞서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천국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한 사람의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눅 15:7).
니느웨 성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더욱 기뻐하셨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우리에 있는 것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았을 때, 더욱 기뻐한다고 했습니다(눅 15장).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입니다.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에 민감하지 말고, 침묵을 배웁시다.
그리고 스스로 회개하도록 기도합시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합시다.
나의 죄는 회개하고 용서를 받읍시다.



전체 3

  • 2015-02-04 14:08

    비밀글을 공개처리하였습니다.


  • 2015-02-04 23:33

    관리자님 , 본글과 같은 장문의 '설교문'을 게시할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을 마련할 수는 없는가요?


  • 2015-02-05 09:51

    지금 감리교회는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너무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하였을 때 바리새인들은 돌을 내려 놓고 그 자리를 떠났으며 주님도 정죄하지 않겠다 하셨건만...

    주님의 말씀은 어디가고 주님의 용서는 어디가고 바리새인들이 내려놓은 돌들을 다시 들어 고소고발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향해 던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감리교 바리새인들의 저주와 정죄로 이 시대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어가고 있으며, 이 시대의 베드로가 또 다시 죽어가고 있으며,
    이 시대에 주님은 또 다시 재판의 골고다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며 너희 중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치라 말씀을 하십니다.
    유대의 바리새인들은 그 돌을 내려 놓았건만, 이 시대의 감리교인들은 그 돌을 내려 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합니다.

    고소고발을 일삼는 감리교 목회자들은 감리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고소고발을 한다고 하는데...
    그 고소고발이 이미 감리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을 허물고 있음이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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