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장용하(張龍河, 1900. 4. 22~1978.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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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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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당시 배재고통보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그는, 3월 1일 배재학교 교사 김진호(金鎭浩)의 지시로 독립선언서를 중국 영사관에 전달하였다. 이후 그는 동기생인 이봉순(李鳳舜)ㆍ염형우(廉亨雨) 및 친구인 이춘봉(李春鳳)ㆍ서정기(徐廷基) 등과 함께 \"조선은 독립할 수 있으니 일동은 분기하라\", \"조선민족은 자신을 먼저 가지라\" 등의 제목으로 경고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조선독립신문〉 배포에도 참여했는데, 이는 1919년 3월 1일 천도교 계열의 보성전문학교 교장 윤익선(尹益善)이 천도교 측 33인 중 1인인 이종일(李鐘一) 등과 협의하여 창간ㆍ발행한 전단 성격의 지하신문으로, 특히 제2호(3월 3일 발행)는 \"가정부조직설(假政府組織說), 일간(日間)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가정부를 조직하여 가대통령을 선거한다더라. 안심안심 불구(不久)에 호소식이 존하리라\"는 임시정부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었으며, 3.1운동의 진전 중 국내외 각지에서 자발적 독립운동가들에 의하여 등사되어 널리 배포되었다. 그 또한 〈조선독립신문> 제2호를 등사ㆍ배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1919년 4월 그의 주도하에 독립선언의 내용을 담은 지하신문 〈반도의 목탁〉을 발행, 서울 시내 곳곳에 배포하다 일경에 발각되어 그를 비롯한 8명이 체포,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복심법원에서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복교하여 1921년 3월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영어사범과에 입학하여 1925년 3월에 졸업하였고, 그 해 귀국하여 4월에 모교인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취임하였다.

그 후 1941년 7월 20일 교장 사무취급(事務取扱)으로 임명되어 학교를 운영해 나가다가 1943년 2월 23일에 정식으로 제7대 배재중학교(1938년 일제의 개정조선교육령에 따라 교명 변경, 5년제)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가 교장으로 재직할 때는 일제 말 혼란기였다. 1938년 3월 미나미 총독은 \"국체명징\"(國體明徵), \"내선일체\"(內鮮一體), \"인고단련\"(忍苦鍛鍊) 등의 교육정책을 내세웠는데, 특히 내선일체는 민족적 양심을 파멸시키는 것이요, 인고단련은 문화적 생장을 파멸시키는 교육정책으로, 가히 총칼보다 무서운 독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41년 12월 8일 일제는 진주만을 기습,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시작했고, 이에 따라 미나미 총독은 대동아건설이라는 패권주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모든 학교 체제와 교과내용을 철저히 병영화했다.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근로봉사라는 미명하에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교련 시간을 통하여 실제 군사훈련을 받았다. 학원에 대한 사상 사찰도 극에 달하였고, 특히 한국인 교사와 상급학생들에 대한 사찰은 혹심하였다. 이 시기 학원 사찰 임무는 각 학교마다 배치된 현역 일본군 배속장교에게 맡겨졌으니, 이들의 말 한마디가 교사나 학생들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당시 배재에는 배속장교 \"스에비로\"와 교련 교관 \"간도오\"라는 자가 있었는데, 배재 5학년 졸업반에 학도병으로 나갈 나이가 된 김옥근이라는 학생이 기(旗)에다 자기 이름을 일본말이 아닌 한글로 쓴 것을 보고 반일사상을 가졌다고 판단, 이를 문제삼아 졸업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암담한 혼란기에 학교운영을 맡아 수행하던 그는 1945년 9월 30일, 해방 후 사회적ㆍ사상적ㆍ교육적 대 혼란기를 맞아 미군정하의 교장직을 사임했다.

4.19학생의거는 정치사적으로 볼 때 이 나라 민주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역사적 사건이었으나, 배재사(培材史)적인 관점으로 볼 때는 배재 중흥의 좋은 기회를 무산시킨 불행한 사건이었다. 1955년 12월 8일 다시 제10대 교장으로 취임한 그는 1957년 학교 재산소유권을 미감리회 선교부에서 정식으로 넘겨받았고, 이듬해인 1958년 독자적인 자립경영을 위하여 수익재단을 만들었으며, 부족한 교실을 해소하기 위해 우남학관을 준공하였다. 또한 창립자인 아펜젤러기념관을 건축하기 시작하였고, 배재대학 설립 기성회를 창립하여 하월곡동에 20여만 평의 대학 부지를 확보하고 교사 기공식을 갖는 등 여러 모로 학교 부흥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본관 건물 준공을 6개월 앞두고 4.19라는 정치적 변혁으로 1960년 5월 30일 또다시 교장직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니, 배재로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대학 건립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을 떠난 후, 대학부지로 책정된 20여만 평의 하월곡동 땅이 자기 개인 소유라고 하는 연고권자가 나타나 결국 배재대학의 꿈도 좌절되고 말았다.

한편 이듬해인 1961년 1월 17일 그는 전체 교직원과 재단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또다시 제11대 교장으로 취임, 학생 대표들과 교직원 대표ㆍ총동창회장 및 이사장이 모인 자리에서 간단한 취임식만 갖고 시무하였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학교 내 파벌과 분규가 생겨 중단된 아펜젤러기념관과 재판중에 있던 대학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1961년 6월 26일 다시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그의 사임에 대해 〈배재신문〉 35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년 5월 우리의 뜻하지 않은 분규로 인하여 일시 학교를 떠나시게 되매 학교 발전에 많은 영향이 있었고, 다시 선생님을 모시게 됨으로써 우리에게는 다시 광명이 비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러 어려운 문제 처리에 있어 또다시 불의의 사정으로 인하여 학교를 떠나시게 되니 우리들의 실망도 크려니와, 선생님께서 학교의 발전과 학생들의 실력향상을 보시기 전에 사임하시게 됨에 대하여 학생, 학부형, 동창들의 애석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그는 1968년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감리교 장로로서 정동제일교회와 자교교회에서 봉직하였으며, 1978년 9월 15일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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