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김윤경(金允經, 1894∼1969. 2. 3)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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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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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9
국어학자. 호는 한결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1908년에 상경하여 우산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를 정동교회의 최병헌 목사가 설립한 ‘서강의법학교’에서 인수하자 의법학교로 옮겨 1909년 제1회로 졸업했다.

1909년 최병헌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그의 신앙적인 감화와 영향력에 힘입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1911년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주시경 선생에게 한글학을 배우게 되는데, 주시경은 그에게 “우리 글이 우리의 오직 하나되는 보배임을 깨닫게 하였고, 나의 일생을 좌우할 감격을 받게“ 하였으며, “우리말 우리 글에 대한 주 선생에게서 받은 감격”은, 그가 일생을 바쳐 한글연구와 한글교육, 한글보급운동에 앞장서도록 작용했다.

1913년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한 그는 이후 4년여 동안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 교사로 있으면서 국어문법, 대수, 서양사 등을 가르쳤으며, “조선어 연구의 기초“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1917년 창신학교를 사임한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22년 졸업했다. 재학 당시 그는 3·1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병기·장지영 등과 함께 ‘조선어연구회’(후에 조선어학회→해방 후 한글학회)를 조직했으며, 졸업하던 1922년에는 흥사단의 전신인 수양동맹회의 창립회원으로도 참여했다.

1922년 4월 배화학당의 교사로 부임, 배화학당 고등과에서 가르치다가 후에는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무주임과 훈육주임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의 공부와 생활을 지도했으며 한글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남다른 헌신과 능력을 눈여겨본 부이 교장은 그에게 근무 특별상금을 내렸으며, 이에 힘입어 1926년 일본에 건너가 닛쿄(立敎)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 “조선문자의 역사적 고찰”이라는 졸업논문을 쓰고 1929년 귀국했다.

그 해 4월 다시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조선어와 역사를 가르치다가,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정든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무죄로 석방되었고 5년여의 실직생활을 했다. 한편 1938년 1월, 그가 옥중에 있을 때 유명한 《조선문자 급 어학사》가 발간되었다(이 책은 뒤에 증보하여 1954년 책이름을 “한국문자 급 어학사”로 고쳐서 발간하였다).

1942년 성신가정여학교 교사로 피임되었으나, 그 해 10월 다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되어 1년 이상의 갖은 고문과 형벌을 받으며 옥고를 치르다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이때 그는 옥중에서 어머니의 별세 소식도 모르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렇게 그리던 해방 후 조선어학회 상무이사로, 국어부흥강습회 강사로 활약하였고 연희전문학교 접수위원이 되었다. 이어 연희전문학교 이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봉직한 그는 연희대학교 문과대학장을 거쳐 1947년 총장대리로 피택되었다. 1948년 《나라말본》과 《중등말본》을 편찬하였고, 1952년 문교부 사상지도원 전문위원·국사편찬위원·대학교육 심의위원·교수요목개정심의회 국어위원 등에 선임되었으며, 이듬해 연희대학교 대학원장, 그리고 국어심의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54년 도서편찬 심의위원에 위촉되었고, 1955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 해 학술회 회원이 되었고,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기독교교육공로상 수상과 함께 문교부에서 국어공로상을 받았다. 1960년 학술원종신회원이 되었으며, 1962년 연세대학교를 정년퇴직하였다. 그 해 학술원에서 학술문화공로상을 수상했고, 1963년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상하였다. 이 해부터 한양대학교 명예교수로 국어학을 강의하다가 1969년 2월 3일 별세하였다.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그는 평생을 한글연구와 교육사업을 통해 나라사랑의 길을 실천했고, 주시경 선생의 인격과 학문에 깊은 감화를 받아 외솔 최현배 선생과 쌍벽을 이루는 민족정신 선각의 길을 걸었다. 또한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면서 기독교적 양심에 입각한 신앙의 생애를 살았다.

그의 교육사상은 우리 민족의 한글, 민족의 역사, 조선 여성의 정신을 교육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첫째, 한글교육사상이다. 그는 우리의 훌륭한 문화유산 중에서도 한글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유산이며,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그 세계적 가치가 증명되어 명성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한글의 우수성은 아주 간단한 기초 음을 가지고 응용하고 변화시켜 수많은 말들을 만들어 내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이 있듯, 어떤 언어를 쓰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인간과 문화가 만들어진다. 때문에 일제가 우리말과 글을 빼앗으려 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귀한 책임을 감당했던 것이다.

둘째, 새로운 조선 역사를 열어갈 수 있는 역사 의식을 갖게 했다. 당시 학교에서는 동양사, 서양사, 일본사는 가르쳤지만 조선사는 가르칠 수 없었으며, 나아가 일제는 민족의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역사 일반에 대한 바른 인식과 민족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깊은 애정을 갖도록 교육했던 것이다.

셋째, 가정과 민족의 주인이 될 건강한 여성을 길러내는 여성교육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배화여학교 재직중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했다. 하나는 배화의 교육 정신이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너도 온전하여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 완전한 사람의 양성에 있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이를 이루기 위한 배화 교육의 장이 평화스런 한 가족으로 가꾸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감리교 신앙과 신학의 특징인 ‘성화’와 ‘완전’의 교리가 교육학적인 해석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여성이 완전한 인격을 발현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여자도 사람인 이상 언제든지 사람으로서 반드시 실현하여야 될 이 사명, 곧 완전하여지려 하며 완전하게 만들려 하는 사명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여성이 자신의 사명을 다함으로써 자기의 생이 실현되고 가정과 민족과 세계가 평화롭게 발전할 수 있다고 했다.

저서:《조선문자 급 어학사》, 1938;《나라말본》, 1948;《중등말본》,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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