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사전]캔들러(Candler, Warren Akin, 1857-1941)

선교사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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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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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감리교회 감독. 8월 23일 조지아주 빌라 라카에서 아버지 사무엘 찰스(Samuel Charles)와 어머지 마르다 캔들러(Martha Candler) 부부의 아들로 출생한 후 1875년 에모리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에 북조지아연회에 허입하고 1886년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내슈빌 크리스천회보 부편집인을 지낸 후 1888년 에모리대학 학장에 취임하여 감독으로 선출될 때까지 10년간 봉직하였다. 1886년과 1890년 총회에 참석한 대의원이었고 1891년과 1911년 범세계감리회 총회에도 파송된 대의원이었다. 1914년 에모리대학교가 애틀랜타로 이사하자 그는 명예총장에 취임하여 1921년까지 봉직하였다. 캔들러 감독이 내한한 것은 1906년 9월, 경성에서 모이는 제10회 남감리교 선교회를 사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캔들러 감독의 마음에는 선교회 사회보다도 사랑하는 제자 윤치호를 만난다는 기쁨이 더욱 컸을 것이다. 캔들러는 감독이기 이전, 윤치호가 공부하는 에모리대학 총장이었다. 윤치호가 1893년 에모리대학을 마치고 학교를 떠날 무렵 고학생활을 하며 근근히 모아두었던 돈 200달러와 함께 \"여기에 200달러의 금액을 학장님에게 기탁합니다. 이것으로 조선에 기독교학교 설립할 기금으로 삼아 주십시오. 제가 상해로 가서 먼저 귀국하게 되면 이 기금으로 선교학교를 세우겠고 제가 귀국하기 전에 교회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게 되면 이 기금을 교육 목적에 임의로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라는 편지를 보낸 바 있다.
1895년 1월 윤치호는 한국으로 귀국하였고, 1896년 남감리교회 리드 선교사가 한국 선교사로 들어와 선교사업을 시작하였다.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던 캔들러 총장이 감독이 되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윤치호의 마음에도 학교를 세울 생각이 부쩍 떠올랐다. 사실 미국 선교부보다 자신이 먼저 귀국했으나 그 동안 서재필과 함께 국가의 일과 독립협회, 독립신문 발간 등 민중개화운동에 주력하게 되어 학교설립을 미루어 오던 차였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이 일본인의 마수에 빠져 더 이상 어쩔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후에는 개성에 들어앉아 인재를 양성하자는 생각이 떠오르고 있을 때 마침 존경하는 스승 캔들러 총장이 감독의 자격으로 온다니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학교설립을 주선했다. 물론 윤치호 개인으로도 학교 하나쯤은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남감리교회의 학교라야 미선교부로부터 인적 물적으로 후원을 받기가 손쉬웠던 것이다. 1898년 남감리교회에서 감독이 된 캔들러 박사가 1906년 9월 내한하여 조선남감리교회 제10회 선교회를 주재하면서 개성에 윤치호가 원하던 선교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한 후 그해 10월 3일 학생 14명을 비롯하여 개성 유지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개교예배를 드렸다. 학교 이름은 한영서원이라 했다. 한영서원의 설립기금은 윤치호가 캔들러 학장에게 기탁했던 200달러를 비롯하여 윤치호 선친이 기부한 정동 토지대금 1,000원과 윤치호 부자가 별도로 마련한 1,000원 등 3,000원으로 개교했다. 당시 캔들러 감독은 윤치호의 선친 윤웅렬 장군을 방문하여 학교가 발전하도록 후원하여 줄 것을 부탁한 바도 있다. 한영서원은 미국 남감리교의 후원을 얻어 소학 과정과 중학 과정, 그리고 중학 과정 졸업생이 들어가 공부하는 영어과가 있었다. 영어과의 목적은 당장 국내 중등학교의 영어교사를 양성하자는 것이었고, 성적이 좋은 학생은 외국 유학을 보내 국가와 사회 차원의 일꾼을 양성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차 한영서원에 대학부를 설치할 목적에서 그 예과격으로 두었던 것이다. 학교 설립 수년 만에 개성에는 한영서원 소학부, 중학부, 실업과, 실업과를 위한 실습장, 목장, 염색공장 등을 설치했는데 이것으로 봐도 장차 한영서원은 실업대학을 지향했던 사실을 반영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총독부에서는 105인 사건을 날조하고 윤치호를 신민회 책임자로 꾸며 최고의 징역을 선고하는 등 박해하여 1917년 결국 한영서원은 폐지, 송도고등보통학교로 격하되었다. 캔들러 감독은 한국에 큰 희망을 주고 갔으나 악랄한 왜인은 그 희망을 송두리채 잘라버렸던 것이다. 그 후 캔들러 감독을 1941년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