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하영홍(河泳弘, 1879~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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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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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인. 일명 주명(周明)

경기도 시흥현 군내면 안양리 263 삼막골(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서 하진찬(河鎭瓚)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삼막골은 60여 호에 달했던 진주 하씨의 집성촌이었다. 이 마을에 진주 하씨가 살기 시작한 것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의 후손으로 조선 중기에 의금부도사를 역임했던 하우청(河禑淸, 1561~1622)의 묘를 이곳 뒷산에 쓴 후손들이 묘 아래 모여 살면서부터며, 하연의 15대 손이자 하우청의 10대 손이 바로 하영홍이다.

그는 21세 되던 1900년 12월, 안양마을에서는 처음으로 예수를 믿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감리교회 지도자반에서 교육받은 후 삼막골을 그리스도의 마을로 만들기 위해 열심으로 전도하였다. 1901년 5월 〈조선감리회 연회록〉 스웨어러(W.C. Swearer, 徐元輔)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삼막골에 지도자 하영홍과 학습인 24명이 마을의 60호 주민들과 친척관계로서 함께 전도하였다고 한다. 이어 그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예수의 말씀을 따라 자기의 전답을 모두 팔고(그의 손자 하창용의 증언에 의하면 종중 땅까지 팔아 집안 어른들이 비난하였다고 한다), 돈 1백 80원을 마련하여 교우 일곱 가정과 함께 초가 6칸의 삼막골교회를 건축하였다. 당시 쌀 한 가마에 4원이었다고 하니 45가마요, 지금 돈으로 계산하면 약 8백만 원을 가지고 교회 건축을 한 셈이 된다. 이후 그는 가세의 빈곤으로 짚신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삼막골교회 봉헌예배는 〈신학월보〉(1901. 8)에 그 내용이 자세히 실렸다. 이를 살펴보면, 1901년 8월 6일 미감리회 선교사 스웨어러와 존스(G.H. Jones, 趙元時) 장로사(현 감리사), 각처 남녀 교인 70여 명이 모여 봉헌예배를 드렸는데, 무지내교회(1895년 창립, 현 시흥시 무지동) 김동현 권사가 기도하여 개회하고 스웨어러가 찬송한 후에 존스가 예식을 읽고 삼막골교회 속장 하영홍과 유사 리지홍\"하진졍이 회당 문서와 지계문권(토지문서)과 열쇠를 장로사에게 전달하니 장로사가 도로 스웨어러에게 전하였다. 이어 오후 2시에 다시 개회하여 스웨어러가 요한복음 15장 1~20절을 읽고 \"열길 물이 한데 모여 큰 강을 이룬 것같이 우리 교회도 각 곳 형제들이 일심이 되어 교회를 이루는 것이니……\"라고 설교한 후 폐회하였다 한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무지내교회 김동현 권사가 개회기도를 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를 통해 안양지역 기독교 전파 과정을 최초로 정리한 이진호 장로는 아마도 하영홍이 김동현에게 전도받았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당시 감리교 선교사들의 선교일지에도 항상 무지내교회를 출발하여 범고개교회(1896년 창립, 현 안양시 박달동)를 거쳐 삼막골교회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세 교회는 상당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02년 5월 스웨어러 선교사는 〈조선감리회 연회록〉에 당시 삼막골교회의 전도사업이 지도자인 하영홍의 지도력에 힘입어 놀랄 만치 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당회원 4명, 학습인 25명, 계 29명이 있고 5명은 세례를 받았으며, 주일학교는 선생이 5명, 학생이 35명, 여자매일학교에는 학생이 5명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여자매일학교라는 이름을 통해서 당시 교회들이 여성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과 남녀를 분리하여 예배를 보고 교육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전도사업과 교육사업을 병행하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던 삼막골교회는 뜻하지 않은 일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청일전쟁 이후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계기로 을사조약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다음, 원활한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동년 8월 청국 안동현 지방의 병참기지와 철도 건설을 위해 수많은 한국인들을 노무자로 보내주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시흥군에도 80여 명의 노무자 동원명령이 내려왔고, 농민들은 유등리(광명시 가학동) 집강(이장) 성우경을 농민 측 협상 대표로 선정, 군수를 찾아가 농번기라 한 사람의 일손이라도 중요한 시기이니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에 군수는 이러한 사정을 조정에 알렸으나 조정에서는 일제의 요구에 따라 계속 인원동원만을 강요할 뿐이었다. 이 와중에 오히려 성우경이 유등리에서 먼저 노무자를 모집하기 시작하여 결국 시흥군의 많은 노무자들이 모집되었을 뿐 아니라, 군수 박우량이 노무자들의 임금을 가로챈 일에 관련되기까지 한 것 같다. 이 일로 인해 분개한 시흥 6개 면 농민 수천 명(혹은 1만 명)이 1904년 9월 14일(음력 8월 5일) 하오 3시 한천교(현 광명시 입구의 안양천)에 모였는데, 이때 성우경이 관가(官家)가 돈을 가로챘다는 소문에 대해 변명하자, 분개한 하영홍이 일어나 일본인에게 아부하며 노무자를 모집한 그의 죄를 지적하였다. 이에 군중이 격분하여 소란해지자 하영홍과 민용훈은 힘써 집회를 해산하려 했으나, 성우경이 이 일은 마땅히 관가에서 재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군중을 인솔해 관가로 이끌어갔고, 이 과정에서 고의는 아니지만 군수와 그의 아들, 일본인 2명이 살해되었다.

이후 하영홍은 이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피신 도중 순검에게 체포되었고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관리협박죄로 15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가 그 후 1등급 감하여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병을 얻은 그는 출소한 후 삼막사에서 요양하다가 1915년 별세하였다. 그의 묘는 안양시 만안구 안양3동 병목 안에 있었는데 1960년대 도시화로 인하여 화장되었다.

한편 일본인이 피살된 데 격분한 일본군은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체포하였고, 지도자를 잃은 삼막골교회는 일제의 박해를 피해 교우들마저 뿔뿔이 흩어져버려 몇몇 가정에 의해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폐쇄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1954년, 한경수 전도사(현 주안교회 원로목사, 감독)가 삼막골에 기도처를 개척하였다. 실로 반세기 만의 일이다. 이 기도처는 신안양교회로 개칭되어 이전하였고, 일년 후 그 자리에 석수교회가 창립되어 맥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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